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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시대의 가장 큰 계명 (마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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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가장 큰 계명 (마 22:34-40)

 
인류의 문화에는 수평문화가 있고 수직문화가 있습니다. 수평문화란 시대에 따라 바뀌는 음악 · 패션 · 소비문화 · 유행 이런 것을 가리킵니다. 반대로 수직문화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유구한 가치관을 말합니다. 윤리 · 철학 · 종교 이런 것이 수직문화에 해당합니다. 사람이 수평문화를 알지 못하고 수직문화만을 따른다면 그 사람은 고리타분한 사람, 보수적인 사람,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얻을 것입니다. 반대로 수직문화를 모르고 수평문화만을 따르는 사람은 깊이가 없고,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질 안개와 같은 가치를 좇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당연히 수직문화에 해당합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나오시는 이유는 요즘 유행하는 사상이나 문화를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른 곳에 가도 얼마든지 배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나오시는 목적은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반석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율법사가 계명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답변을 했다는 사실은 수직문화도 늘 새로운 질문에 직면할 수 있고, 늘 그 시대에 흡족한 대답을 제공해야 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계명이 경직돼 있어서 어떤 해석의 여지가 없다면 율법사는 질문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 질문에 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토론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21세기에 들어섰는데, 그들의 윤리와 종교는 여전히 중세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는 아직도 여자가 운전을 하는 것이 금지돼 있습니다. 여자가 운전하다가 걸리면 매를 맞아요.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자가 직업을 갖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그래서 의대를 졸업한 여자 의사가 하루아침에 거지로 길거리에 나서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권의 모든 성인 남자는 수염을 길러야 되는데, 그 이유는 모하멧이 수염을 길렀다 라는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의 문제는 이런 주제에 대한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에요. 질문 자체를 금지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21세기를 살면서도 중세의 가치관을 고집하는 모순을 빚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도 예외는 아니에요.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가족계획을 금지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가톨릭 성도들이 가족계획을 하지 않느냐? 합니다. 많은 가톨릭 성도들이 합니다. 그 말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과 성도들이 행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에요.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성도들이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문화 · 결혼문화 · 가족 이것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교회가 옛날의 계명만을 고집하게 되면 결국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면 사람들이 듣지도 않고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에요. 그렇다고 그것이 경직돼 있어서 해석의 여지가 없고 적용의 자율성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율법사가 계명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예수님이 대답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해석과 토론이 가능하고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의식하지 못할 뿐이에요.

예컨대 레위기 20장에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에요. 그러나 이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을 근래는 못 봤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시대와 경우에 맞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해석을 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해석을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거부했을 텐데 해석을 함으로써 오히려 그 말씀을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신명기 22장 말씀을 보면 ‘남자가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 여자를 친정아버지 문에서 끌어내어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당연히 오늘날 이 말씀대로 실천할 수 없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구절을 부인하기 때문입니까? 아니에요.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시대와 경우에 맞춰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의 계명을 해석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뭐라고 명령하셨냐면 남자든 여자든 다 죽이고 그들의 가축과 소유를 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구절을 읽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아무 해를 끼치지 않은 나라를 쳐들어가서 정복하는 것은 범죄행위이고, 그 성의 남자와 여자를 다 죽이는 것은 살인행위이고, 그들의 가축과 소유를 빼앗는 것은 강도행위에 해당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런 명령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경직돼 있어서 해석할 수 없고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은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사실이에요. 한 예로 구약성경에는 일부다처제를 실천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내가 두 명이 있었고, 야곱에게도 아내가 네 명이 있었고, 다윗 왕에게는 아내가 몇 명이었는지 파악하기가 어렵고, 솔로몬에게는 아예 하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태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금지도 안했지만 장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 당시의 문화였기 때문이에요. 그 당시에는 그것이 통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 그렇게 했다가는 아내에게 얻어맞고 감옥에 갑니다. 왜냐하면 법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율법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의 의식수준과 보조를 맞춥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을 때, 그들을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시키셨지만 그렇다고 노예제도 자체를 하나님이 비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과거 노예 신분이었지만 나중에 그들도 노예를 두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노예제도는 존재했습니다. 

누가복음을 쓴 누가는 의사였는데 그 당시 의사는 노예계급에 속했습니다. 그럼 왜 성경은 노예제도를 비판하지 않았느냐? 링컨이 말한 것처럼 ‘나는 남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도 남을 노예로 두지 않겠다.’ 왜 이런 말씀이 성경에 없느냐? 그건 마치 그 시대에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다 라는 주장을 하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만일 그런 주장을 했다면 사람들이 거부하고 실족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의식수준과 보조를 맞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칙은 주시되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사람의 자율성에 맡기셨습니다. 사람이 준비가 되면 그때 가서 자율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원칙을 실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내가 남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으니 나도 남을 노예로 부리지 않겠다’라는 말씀은 없지만, ‘남에게 대접 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에요. 얼마나 적용하느냐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임금이 있고 귀족이 있고 계급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 자체를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바라는 공정사회에 대한 원리가 다 성경말씀 속에 이미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얼마나 발굴하고 적용하느냐? 이것은 우리의 몫이에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 속에 있는 원리를 다 발굴하지도 못했고 다 적용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우리의 의식수준은 여전히 발전의 여지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계명의 핵심 목적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명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그 사람은 계명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다’는 말, 그 한마디 말씀 속에 이 모든 계명을 주신 목적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혜택을 받으시는 게 아니고 사람이 혜택을 입습니다. 사람이 계명을 어기면 하나님이 해를 입으시는 게 아니고 사람이 해를 입습니다. 사람이 계명을 어길 때 사람만 분노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분노하십니다. 

예로부터 종교인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릴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청난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광신의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광신은 신앙이든 계명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이웃에게 득의도 되지 않는 나의 종교, 나의 열심, 나의 광신만을 주장하게 될 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신의 위험이에요. 

우리가 열심히 믿으려고 할 때 열심히 믿어야 되고 열심히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열심이 목적을 벗어나게 되면 누구를 위한 열심이 되겠습니까? 참 사람은 안 믿는 것도 문제이지만 잘못 믿는 것도 문제에요. 차가운 것도 문제이지만 이상하게 뜨거운 것도 문제에요. 그래서 안 믿으면 불신자가 되지만 잘 못 믿으면 이단이 됩니다. 올무는 양쪽에 존재합니다. 이쪽에 가도 멸망의 길이 있고 저쪽으로 가도 멸망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고 정치의 관심이 지나쳐서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원수로 여기고 대적하고 칼로 찔러 죽이고 그리고 서로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정치에 대해 무관심한 게 나아요.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가져서 그것이 국가에 무슨 득이 된다는 얘기입니까. 왜 우리 민족은 정치든 스포츠든 신앙이든 무엇을 하든 그것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하지 못하고 광적인 차원에서 그것이 사람에게 해가 되고 덕이 되지 못하고 자기의 고집만을 주장하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얘기입니까. 

이것은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에요.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의 열심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정말로 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것입니까? 교회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되는 문제에요. 

예수님이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길에서 무엇을 의논하였느냐 너희 가운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고 먼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늘 그들에게 이 근본적인 동기에 대해서 일깨워 주셨다는 사실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던, 사도가 되던, 목사가 되던, 무엇이 되던 늘 근본적인 이유와 동기에 대해서 바로잡지 않으면 빗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도 빗나갈 위험이 있다면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여기까지 제 설교를 들으신 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역할이 뭐냐? 계명이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계명을 인간이 해석해야 되고, 계명이 인간의 의식수준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라면 하나님 없어도 되는 것 아니냐? 하나님을 배제하고도 사람끼리 계명이 무엇인가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질문하는 사람은 율법사였지만 대답하는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스스로 계명을 정할 수 있다면 예수님께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여쭈어야 됩니다. ‘하나님, 나는 누구며 무엇을 해야 됩니까? ― What must I do? 내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됩니까? 어떤 것이 바른 것입니까? 그리고 왜 내가 그것을 해야 되고 내가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내가 그것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그것을 행하지 못할 때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의식수준이 발전하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인류역사의 정치 · 사회 · 사상의 발전을 가져온 위대한 인물들, 그들은 뛰어난 의식수준을 가졌지만 그것이 개인의 삶과 일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말한 토마스 제퍼슨에게는 흑인노예가 있었고 ‘나에겐 꿈이 있다!’라고 외쳤던 마틴 루터 킹 박사는 사생활이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캘커타의 성자였던 테레사 수녀는 개인적인 의심의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의식수준이 발전해도 스스로 바른 길을 발견할 수 없고, 그것을 이룰 행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도 예수님이 필요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도 예수님이 필요하고, 그것을 행하지 못할 때에 그때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시고, 예수님이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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