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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 1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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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 18:1-15)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장막을 치고 살고 있었습니다. 마므레는 헤브론이라고도 하는데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곳입니다. 마므레에는 상수리나무와 동굴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가 127세로 죽었을 때 헷 족속에게서 동굴을 샀는데 그 이름이 막벨라 굴입니다. 여기에 사라가 묻히고 아브라함도 175세로 죽었을 때 이곳에 묻혔습니다. 

아브라함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을 때 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세 사람 중에 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창 18:13). 

그런데 성부 하나님은 아무도 본적이 없고 볼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리고 성령님도 원래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8장의 여호와 하나님은 성육신하기 이전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예수님이 자주 이렇게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두 천사가 함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두 여섯 번 나타나셨습니다. 앞의 다섯 번은 주로 환상 혹은 영적인 존재로 나타나셨는데 창세기 18장에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더 가깝고 친숙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깝고 친숙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느냐? 그 이유는 ‘너희 집에 속한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창 17:23). 

할례라는 것이 굉장히 아프고 힘든 것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피하거나 조금도 미루지 않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 14:23).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순종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복도 가까워집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복과 가까워지시기 바랍니다. 

장막 문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두 천사를 보고 일어나서 달려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창 18:1~2). 

우리의 신앙생활이 앉을 때는 앉아야 되고 뛸 때는 뛰어야 합니다. “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시 139:1~2).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 앉는다는 것은 조용히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시 37:7~8). 

이 세상에 나쁘고 악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잘되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을 보고 불평하거나 성질을 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때가 되면 악한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임재가 있으면 즉시로 일어나 뛰면서 주님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 사람이 나타난 시간은 오후 2시쯤이었습니다. 햇볕이 뜨거워 아무도 여행하지 않을 시간에 세 사람이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닌 비범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보고 즉시 발 씻을 물을 가져오고 엎드려서 절하며 떡과 버터와 우유 그리고 송아지 요리를 대접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앉아있을 때는 앉아야 되고 뛸 때는 뛰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두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한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에게 용무가 있었습니다. 사라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시키기 위해서 방문하신 것입니다. 

Ⅰ. 사라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은 사라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실 사라는 아브라함이 죄를 짓게 한 여자입니다. 애굽의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으라고 해서 이스마엘이 태어난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먼저 하갈을 취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라가 그렇게 하라고 먼저 제안을 했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와 비슷합니다. 그때도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 주어 아담이 먹은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징책을 받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라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라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 103:10~11). 

하나님이 만약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셨다면 우리가 벼락을 맞아도 아마 열 번은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창세기 18장 9~10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사라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나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창 18:9~10). 

아브라함에게 물어보는 것은 세 사람이 다 물어봤는데 약속을 줄 때는 한 사람이 줍니다. 바로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예수님이 돌아오시면 무엇이 좋습니까? 아브라함이 회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지금 자식을 낳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돌아오시면 자식을 낳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죄를 짓고 어리석으며 무지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전에 맺은 은혜언약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구원하여 그들에게 영생을 주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영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서 영원히 벌을 받고 불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해서 영생을 주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안 믿어서 못 주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럴듯한 이야기 같지만 인본주의적인 사상이고 성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전에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 구원해서 영생을 얻고 천국에 영원토록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계획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라가 아무리 허물이 많아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삭이 태어나게 하시고 이삭으로부터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Ⅱ. 사라의 지속되는 불신앙 

주님의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받았지만 사라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창 18:12~13). 

그런데 하나님이 사라가 웃은 것을 아시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사라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창 18:15). 

사라는 겉으로 웃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웃었습니다. 하나님은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신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7절에 아브라함도 엎드려서 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웃은 것에 대해서는 사라에게 한 것처럼 추궁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까 좋아서 웃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라의 마음속에 왜 이런 불신앙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메튜 헨리가 주석에서 설명했듯이 사라는 이 일에 2차적인 원인만 생각하고 1차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차적인 원인이란 아브라함과 사라의 육체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1차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2차적인 원인으로 불가능해도 1차적인 원인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했습니다. 2차적인 원인으로 처녀가 아들을 낳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천사가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니까 마리아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2차적인 원인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고 믿은 것이고 사라는 2차적인 원인으로 안 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내 능력으로 안 되는 일이 많아도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게 되었더라도 하나님이 고치시면 살게 되고 내가 어려운 일에 빠졌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사라는 믿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사용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풍랑을 만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시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 풍랑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고 즉시로 잔잔해졌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너희가 왜 믿음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책망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도 아들이 귀신 들린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왔는데 제자들이 귀신을 못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이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와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하자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즉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아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도 하나님으로는 됩니다. 사라를 가리켜 믿음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불신앙은 타락한 모든 인간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누구든지 불신앙 가운데 머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라를 긍휼히 여기시어 불신앙에 머무르게 두지 아니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불신앙을 치유해주셨습니다. 


Ⅲ. 사라의 불신앙에 대한 치유 

사람의 불신앙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됩니다. 창세기 18장 10절과 14절에 하나님이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0).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4). 

불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자꾸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거짓말도 자꾸 들으면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가르치는 곳에 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자꾸 들으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단에 빠지는 것 아닙니까? 

믿음은 이처럼 들음에서 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을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두 번이나 약속의 말씀을 주셔서 불신앙을 치유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라의 관점을 변화시켰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밑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위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려다보게 하신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땅을 사라고 했습니다.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끌려가는데 땅을 사서 땅문서를 항아리에 넣어 잘 보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네가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고 그때 이 땅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렘 32:17). 포로된 것은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 그렇게 될 줄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라는 남편을 존중했습니다. 창세기 18장 12절에 보니까 아브라함을 가리켜 “내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것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벧전 3:6). 

사라의 장점은 남편을 존중한 것입니다. 남편이 믿음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라의 믿음이 부족해도 치유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 사이에는 서로의 믿음을 격려해야 됩니다. 아내가 교회에 나오는데 남편은 술집과 도박장을 찾아다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교회에 가면 배웅해주고 자기도 언젠가는 가겠다고 최소한 이렇게는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라는 훌륭한 남편과 신앙의 교제를 하면서 불신앙이 치유된 것입니다. 

결론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 장막에 거하고 사라가 장막 문에서 말씀을 들었듯이 우리의 인생은 ‘장막 인생’입니다. 장막에 살다가 언젠가는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몸이 장막입니다. 우리의 몸은 흙으로 지어진 것으로 영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힘과 능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도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줄로 믿습니다. 

내 힘과 능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수 없어도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내 힘과 능으로는 영생할 수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인간으로는 불가능해도 하나님으로는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장막 인생 가운데 살아갈지라도 믿음을 늘 사용하셔서 어려움을 이겨나가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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