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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여라(2) : 용서해라 (마 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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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여라(2) : 용서해라 (마 6:9-15)

[마태복음 6:9-15]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왜 기도하는가?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입니다. 물론 지난 시간의 말씀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이방인들의 기도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모두 아시는 아버지께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 말은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기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중의 ‘용서’에 대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보려 합니다.
존 스토트는 그의 책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기도문의 말을 앵무새처럼 (이교도들이 중언부언하는 것처럼) 반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말을 진지하게 기도한다는 것은 혁명적 함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보려고 하는 본문 14~15절은 주기도문의 사족처럼 붙어 있습니다. 제가 본문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 말씀이 주기도문의 정의(definition)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도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너희가 하는 일이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 너희가 자기 몫을 다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몫을 너희 스스로 차단하는 셈이 된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종교인이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추어내는 기도를 했습니다. 자기의 의만을 강조해서 죄인과 세리들과는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부각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기도의 내용이 자기들은 선행을 많이 하고 착하니까 특별대우를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의 기도 가운데도 그런 의가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응답받아야 하는 이유를 대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고난이 닥칠 때 왜 그런 일이 닥치는지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려고 하기보다는 내가 당하는 것이 누구와 비교해서 억울하다고 생각하죠.
“주기도문에 의하면” 기도란 우리의 계획과 뜻을 하늘나라에서 성취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문장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소위 ‘두괄식’이죠. 주기도문의 핵심입니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강력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맨 먼저 강조한 대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묵상한 것처럼,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는데 꼭 기도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런 의문은 바로 우리가 기도에 대하여 전혀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주기도문에 감춰둔 비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신자가 필요한 것을 아니까 이제는 지경을 넓혀 더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알고 계시니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기도는 신앙인의 삶의 지경을 바꾸는 일이 아닐까요?

만일 기도하면서 변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다면, 그리고 기도에 대한 불평이 아직 우리의 삶에 남아 있다면 바로 바리새인과 이방인의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려운 이야기인가요? 지금까지 우리가 기도하던 이유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이야기인가요?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인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는데 아버지의 뜻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맺음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기도를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의 능력은 부끄럼 없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만능열쇠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모든 문제의 해결사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죄 사함을 받고,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낫고, 기도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이제 기도를 끝낸다.”라는 마침 부호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이름입니까?

어떤 모임에서 한 분에게 기도를 시켰더니 그분이 기도하다가 이 “예수의 이름으로”를 잊어버렸습니다. 기도가 끝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꾸만 빙빙 돌리기에 보니까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종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시작할 때도 주님 이름으로 기도를 하지만 마칠 때도 주님 이름으로 끝을 내야 그것이 기도입니다.

저는 매주 하는 축도이지만, 가끔 그런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말을 잊어버리면 어떡하나? 이렇게 많은 회중 앞에서 갑자기 할 말을 잃어버린다는 것.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납니다. 당시 영어를 가르치시던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한국말을 잘하시는 분인데, 채플에서 설교를 하고 축도 할 시간에 조용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왜 조용할까?” 잠시 후 그분이 이렇게 축도를 시작했습니다.
“요즈음은….”

갑자기 ‘지금은’이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죠.
이것은 단지 말에 대한 실수와 두려움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 기도는 시작도 끝도 될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죠.
우리는 종종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세상도 압니다. 아니 악한 사단의 세력도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며 우리의 삶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합니다.

욥기 22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화목’이 무엇인가요?
좋은 관계입니다. 좋은 관계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관계는 접촉에서 이루어집니다.

들어보셨던 설교제목이죠? “접근이냐? 접촉이냐?”
예수님 당시에도 가까이 나아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들은 방관자였습니다. 즉, 예수님의 인격과 관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접촉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특별한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예수 이름의 권세가 드러난 것입니다.

지난해 보았던 영화가 있습니다. [7번 방의 선물]
7살의 지능밖에는 안 되는 아버지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죠. 사랑하는 딸 예승이가 보고 싶어, 우여곡절 끝에 딸을 감옥의 7번 방으로 데려옵니다. 그 안에는 온갖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승이는 너무 평온하고 행복합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 그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을까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살도록, 어떤 환경 가운에서도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도록 말입니다. 온갖 우상이 난무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세력들 앞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 되도록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구하는 것을 다 구했을 때에 일어날 결과에 대해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C.S. 루이스가 죽기 직전에 "하나님이 내 생애에 구한 어리석은 기도를 모두 다 들어주셨다면 나는 과연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말했습니다. 감히 추측건대 부정으로 감옥에 가 있거나,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타락하여 폐인이 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인간이 구하는 것의 결과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요컨대 인간은 자기가 구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에 침묵과 심지어 거절로 응답하시는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 신자를 감옥에 보내거나 폐인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간구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기도를 통해 이 땅 위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끊임없는 도전이 옵니다. 기도가 필요한 이유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선택이 불완전할 때가 많기 때문이죠.

언젠가 제가 고민하며 페북에 올렸던 글을 소개합니다.
‘착한 남자 콤플렉스’

목회자 자녀로 살아오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바로 착한 남자 콤플렉스였습니다.
목회자 아들이기 때문에 착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
그런데 목회자가 되어서는 더욱 불가능한 일 때문에 곤혹스럽죠.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 목회자가 되려는 노력. 그런데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노력이라는 걸. 누구에게 좋은 사람이 되면 누군가에게는 좋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순간에 설 때가 있기 때문이죠.

제가 오늘 왜 이런 글을 쓰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의 고민일 수 있기 때문이죠.
어제 교회에서 "감리사 선거"(감리교에서는 한 지방을 이끌어 가는 대표를 선출하는 2년제) 가 있었습니다. 두 명의 후보가 나온 상황에서 저도 누군가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상황이죠. 곤혹스러운 것은 만나 교회가 가지는 위치와 규모 때문에 선거인단의 숫자가 당락을 좌우한다는 것. 분명히 저는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얘기를 해도, 개인적 의견이 누군가를 결정할 수밖에 없기에 한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죠.

나는 모두에게 착한 남자이고 싶은데 절대로 그렇지 못한 상황.
저는 제게 있는 작은 권력이라도 휘두르지 않고 싶은데, 제가 하는 행동이 누군가에게 힘의 피해자가 되어 버리는 순간.
말을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는 상황,
언젠가 어떤 선배 목사님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하더군요. 대형교회 목회를 하는 순간 죄인으로 사는 것이라고. 동기들의 모임에서 밥을 사겠다고 말하면 "그래 너 잘났다!" 소리 듣고, 눈치 보느라 조금 늦게 일어서면 "있는 놈이 인색하다 소리" 듣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욕 안 먹고 살고 싶은 이 마음은 멀까요?
오늘은 제 푸념도 섞여 있지만. 욕먹을 수 있고, 누군가의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축복인데, 누릴 것은 누리고, 나눌 것은 나누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모두에게 영원한 숙제 "착한 남자 콤플렉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겨라!


관계를 회복하는 용서!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오늘 말씀의 핵심으로 돌아오겠습니다.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의 하나가 ‘용서’ 아닌가요? 사랑하라! 아니면 용서하라! 왜 그렇게 많이 들었을까요?
그만큼 힘든 것이기 때문이죠. 사랑과 용서만큼 이기적인 것이 있을까요?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사실 용서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주관적 감정이죠.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해 아프고, 그래서 받은 상처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용서의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사실 여하를 떠나서 용서하지 않는 한 그 상처를 끝까지 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죠.

용서가 이기적인 것은 용서하는 순간 우리는 더 그 상처를 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만 더 생각해 보세요. 용서는 우리가 멋지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잘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자신이 의지와 관계없이 어쩔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당한 아픔이 있습니다. 남자를 지극히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남자에게 받은 상처가 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회자를 경계하는 사람들에게는 목회자에게서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교인들과 관계를 잘 못하는 목회자들은 역시 교인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기도 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양해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그냥 못 본 척 넘어가 준다는 것도 아닙니다. 상처를 준 사람과 친구가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 잘못된 일들을 곱씹지 말고 기억 속에서 떠올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시작됩니다. 삐뚤어진 우리 마음과 상처를 가지고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보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되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상처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한 상처는 낫지 않습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주 경험하는 것인데, 어딘가에 부딪혀 ‘멍’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곳이 자꾸 신경이 쓰이죠. 누군가 건드리면 아프죠. 그래서 예민해집니다.
용서는 ‘정서적인 멍’을 치료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조엘 오스틴의 [행복의 힘]에 보면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최근에 한 여성이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어렸을 때 그녀는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당한 그녀는 남자를 믿지 않았다.
아예 남자를 믿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내면에는 여전히 분노와 억울한 마음이 있었고 탓에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무려 26년 동안이나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미워했고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화가 나고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용서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다행히 그녀는 상처에 발목이 잡혀 사명에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용서할 때 비로소 자유를 얻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마음에 새겼다.

그녀는 서른여섯 살에 아버지가 사는 곳을 찾아갔다. 문을 열고 딸의 얼굴을 본 아버지는 당황했는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그녀가 말했다.
“아빠, 단 하루도 아빠를 미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이런 독을 품고 살 수 없어요. 아빠 때문에 제 인생을 망치지 않을 거예요. 이제 아빠를 용서할래요. 저한테 잘못하신 거 다 용서할게요.”

그녀는 그날 아버지 집을 나설 때 마치 감옥에서 풀려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때까지 그녀는 내면의 상처 때문에 늘 관계를 맺는 데 실패했고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은 결혼해서 예쁜 아이를 셋이나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사업에서도 꽤 성공한 그녀는 지금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고 말한다. 상처를 털어버리자 회복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지 아니면 우리가 용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인지. 분명한 것은 용서받은 자가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하면서도 용서하지 못한다면 용서받은 사랑이 실제로 우리에게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대할 수 있습니까?
저에게 오늘 말씀은 굉장히 역설적이고 반어적인 표현으로 들립니다.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제가 BTD 영성훈련을 인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미움이 있는 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복되지 않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참 신기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우리 마음속에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들 수 있을까요? 그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가요?
분명히 다른 두 가지의 논리적인 사건이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저에게 이 말씀은 전후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이 두 가지의 용서가 함께 나타나지 않는 것은 뭔가 불완전, 아니 진정한 용서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조이스 마이어의 책 [단순함이 주는 기쁨]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초신자일 때에 매일 저녁 하나님께 지난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침대 옆에서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처음으로 용서를 구한 날, 나는 용서했는데 너는 아직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주는 선물을 받지 않는구나.”
용서를 주고받고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서를 누리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 누리는 권리는 우리가 그 용서를 알기에 용서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김장환 목사님의 예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게는 용서의 주간이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이 부족 외에는 어떤 곳에도 이런 풍습이 없다고 합니다. 이 용서 주간은 일정한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날씨가 좋은 날을 잡아서 그 부족의 모든 사람이 지금까지의 잘못들이 오해든 사실이든 상관없이 모두 용서해주는 주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많은 죄를 용서받고서도 정작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한 잘못에 대해서는 인색하게 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빚 탕감의 비유를 들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이런 일을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용서받은 것처럼 주위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아무런 단서를 달지 마십시오. 용서에는 특별한 날과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날씨가 좋아서 용서의 주간을 정하고 용서의 주간이기 때문에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는 어느 아프리카 부족처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모두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므로 우리의 짐을 털어 버리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말이죠.

남매가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격한 감정으로 대립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고 뛰어왔다.
"오빠가 먼저 싸움을 걸었어요."
누이동생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쟤가 먼저 시작했어요."
오빠도 큰 소리로 말했다.
두 아이의 말을 다 들은 어머니는 손을 잡고 이렇게 달랬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고 싶지 않단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누가 먼저 그만두려 하는가, 누가 먼저 화평한 사람이 되는가 하는 점이란다."

실제로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을 원어로 보면 ‘죄’를 ‘빚’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진 빚과 같은 것입니다. 진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갚아야 할 빚을 은혜로 탕감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자신이 생활 속에서 받아야 할 빚들을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세요!
그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다음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순간 이미 여러분의 마음에는 용서받은 평안함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누가 얼마나 많은 빚을 지었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물으시는 분이 아니라 “누가 용서 했느냐?”라고 물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알기 전, 용서는 참으로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나서 용서는 내 삶의 빚이 되었습니다.
빚은 갚아야 합니다. 처리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만큼의 아픈, 그리고 힘든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려야 하는 평안함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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