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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땅히 있어야 할 것 (호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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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있어야 할 것 (호 4:1-5)


카일 아이들먼(Kyle Idleman)은 저서 ‘팬인가, 제자인가’(Not a fan)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팬처럼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어린 시절 마이클 조던 사진 옆에 예수의 사진을 붙여놓았던, 즉 예수 그리스도의 팬이었던 그가 어른이 되어 “팬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예수는 자신의 팬이 많아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라고 말하며 전적으로 그에게 항복하고 헌신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팬은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팬은 관람석에 앉아 응원만 할 줄 알지 경기장에서 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조금도 모릅니다. 예수의 팬은 예수에 관해 모르는 게 없어도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팬은 자기 것을 조금도 희생하지 않은 채 예수를 따르기 원합니다. 그러나 삶이 뿌리째 흔들리지 않고서 예수를 따를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면 무엇인가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밤만이 아닌 낮에도 동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그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만 예수를 따르는 것은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진정한 제자라면 밤낮으로 예수를 따라야 하고, 손해를 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니고데모와 같은 선택의 상황에 서게 됩니다. 팬의 길과 제자의 길 중에서 선택해야할 때가 찾아옵니다. 그때 당당하게 드러내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머리로는 하나님을 열심히 연구하지만 그분께 마음을 드리지 않으며, 예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한다면 다만 예수의 팬일 뿐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예수가 좋아서 따라다니는 팬입니까? 아니면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를 좇아가는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제자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은 백성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잘 알고 있어야 했고, 하나님을 더욱 잘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 가는 것을 거부하였고,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세상을 향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과 포악하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영혼은 황폐해졌으며, 황폐해진 영혼에서 오는 갈증을 우상숭배와 향락을 통해 채우려다 더 큰 죄를 범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결국 무서운 죄에 오염되어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이 되었으며, 그 결과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방치해 두었다가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빠질 것이 분명하기에 심판에 처하게 해서라도 돌이키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를 통해 죄악을 지적하게 하십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와 책망은 곧 우리의 범죄이며 우리를 향한 책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진실이 있어야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의 아버지는 요한 게오르그 칸트(Johann Georg Kant)입니다. 한번은 말을 타고 산길로 지나가다가 강도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칼을 들이대는 강도들에게 모든 것과 말을 빼앗겼습니다. 강도가 물었습니다. “숨긴 것이 더 없느냐?”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럼, 가거라.” 그는 무사히 빠져나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바위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런데 바지춤에 금덩어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갈등을 하다가 강도들에게 다시 돌아갔습니다. “조금 전에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물을 때 없다고 했는데 가다보니 금덩이를 숨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도 마저 받으시오” 강도에게 금덩어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빼앗은 물건과 말을 내어주며 엎드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당신이 두렵습니다.” 그의 진실에 강도들도 무릎을 꿇고야 말았습니다.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도 진실 앞에서는 누구나 두려워 떱니다.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진실의 히브리어 ‘에메트’는 ‘거짓이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실이 없었습니다. 종교성은 있고 경건한 분위기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 진실한 헌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을 파기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죄를 짓기가 다반사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사랑하고 더 섬기고 좋아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보다 세상이나 인간적인 것들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과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 마땅히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진실하게 행하려 힘써야 합니다. 부족한 진실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바랍니다.
 
둘째로 인애가 있어야

영국의 미들랜드(Midlands) 지역에 오른손이 없는 여인의 동상이 있어 관광객이 많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 한 십자군 병사가 회교 정복자 살라딘 왕에게 사로잡힌 적이 있었는데, 그의 사랑하는 여인이 날마다 살라딘 왕에게 찾아와 병사를 놓아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러자 사악한 살라딘 왕은 여인의 사랑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왕은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네 한 손을 잘라 가지고 오면 너의 남자를 풀어 주겠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즉시 오른 손을 잘라 왕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한 쪽 팔이 없는 여인의 동상은 그녀의 희생적인 사랑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졌다고 합니다.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오른손을 주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애요 사랑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인애의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애가 있는 자를 ‘헤시드’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망과 지옥에서 영생을 얻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모름지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애가 신앙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살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잃어버린 인애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 위에 인애를 더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인애를 더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혹시 사랑의 고백이 입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삶 속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사랑이 실행되고 있습니까? 인애의 모습이 마땅히 우리의 신앙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셋째로 지식이 있어야

파스칼(Blaise Pascal)은 17세기 최고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했습니다. 1654년 11월 23일, 평생 잊을 수 없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 날의 영적 체험을 “불에 휩싸인 은총의 밤”이라고 저서 팡세(Pensée)에 기록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파스칼을 찾아오셨고, 그는 비로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파스칼은 이 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해 주실 때 알 수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태도를 바꾸라고 지적합니다. 철학의 인식론적 태도를 버리고 그 대신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과 같은 인식론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파스칼은 ‘나는 생각한다’(cogito)라는 이성 중심에서 ‘나는 믿는다’(credo)라는 신앙 중심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지식의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히 아는데 그치는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겪어서 아는 것이고 친밀성을 가지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신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합니다. 오해가 생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근원을 잃어버린 사람이 됩니다. 자기 교만과 오만 속에서 살다가 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과 향락을 추구하는 정욕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갔고, 하나님의 말씀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서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렸기에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리학자 뉴턴(Isaac Newton)은 말년에 치매가 와서 모든 기억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자기의 나이도 생일도 모르는 스승을 바라보던 제자가 답답해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알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내 구주 되신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지식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심판뿐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있어야 할 것은 없으며 없어야 할 것으로 채워져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이제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비록 손해가 난다 할지라도 있어야 할 것들로 갖추어져야 합니다. 부디 없어야 할 것들에 관심 두지 마시고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알아가면서 하나님을 더 잘 예배하고 더 섬기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우리의 신앙 가운데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인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신앙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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