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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혼에 관하여 (마 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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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에 관하여 (마 5:31-32)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은 여호와의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아서 출애굽하게 하신 여호와를 따르는 것입니다. 즉 출애굽을 반영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도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도 애굽에서 나그네였으며 애굽에서 학대받았던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객과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방인들을 본받지 말고 가나안 족속들이 섬겼던 우상들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출애굽으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들을 다 내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망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진멸하지 아니하고 남은 자들로 말미암아 새 출애굽의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새 출애굽은 옛 출애굽의 회복이나 원상태로 돌이킴이 아닙니다. 더 크고 온전한 새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새 출애굽의 구원의 성취인 교회는 더 이상 옛 출애굽을 반영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을 본받지 말라는 명령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었던 우리를 구원하심이 교회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옛 출애굽의 구원을 반영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새 출애굽의 구원을 반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는 자로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예언했습니다. 이 약속을 성취하는 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취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써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험을 이기심으로 새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는 적임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이기신 후에 갈릴리에 거하여 사셨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옛 출애굽의 구원에 끝까지 순종함으로 동행하지 못하여 이방인에게 망하여 수치와 비참함을 먼저 당했던 갈릴리 지역에서 천국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고 사망의 그늘진 땅으로 업신여김을 받았던 갈릴리에 가장 먼저 큰 빛이 비치었습니다. 천국을 세우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를 이 곳에서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위하여 일할 일꾼들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갈릴리에서 천국의 사역을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리의 모든 병든 자들과 약한 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이처럼 예수, 제자들, 무리들이 함께 하니 아주 원초적인 나라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산에 오르셔서 천국의 복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일꾼인 제자들에게 천국의 율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제자들에게 천국의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그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이 사명을 따라 어떻게 천국의 제자들로 의로운 삶을 살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며,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따라 사는 것이 천국 제자들의 의로움입니다. 

그럼 어떠한 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인가? 이것을 마태는 6개의 대립 명제를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립 명제에서 말한 것은 화평입니다.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아래 낮아져서 섬기므로 화평케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대립 명제에서 말한 것은 마음과 몸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천국의 제자들이 어떤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혼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 말씀도 이혼불가의 가르침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혼에 담겨있는 삶의 원리를 알고, 우리의 전 삶에 이 원리가 적용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6개의 대립 명제가 어떤 이유로 선택이 되었으며 그 순서를 따라 어떤 배열을 하고 있으며 또한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그냥 임의로 선택한 6가지 명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참조해야 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출애굽기의 율법의 법규를 말한 방식입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출애굽기 강론을 할 때 말씀을 드렸더랬습니다. 첫째로, 종의 법규를 말했고, 둘째로, 배상의 법규를 말했으며, 세 번째는 헌신의 법규로 사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던 근거는 마가복음에 있었다고 여러분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보면 5장-7장까지 천국의 법을 말하고, 8장-9장은 천국의 권능을 말합니다. 그 후 10장부터 천국의 일꾼을 부르는 것이 나옵니다. 천국의 일꾼들인 제자들에 관해서 마태복음은 9:35절부터 25장46절까지 말합니다. 

먼저 9:35-16:20절까지는 천국의 왕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가르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후에 16:21-25:46절은 천국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로써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대원칙을 먼저 말한 후에, 누가 천국의 으뜸 일꾼이 되는가를 말합니다. 

즉 20:16절까지는 누가 천국의 일꾼이 되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20:17-25:46절은 어떻게 하면 천국의 으뜸 일꾼이 되는가에 대하여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는 천국의 제자로써의 자격을 말한다면, 뒤에서는 천국의 제자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점에 주목해서 마태가 말하려는 문맥을 따라 6개의 대립명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의 세 가지와 뒤의 세 가지를 나누고, 앞에서는 천국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말하고, 뒤에서는 천국의 의로운 삶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혼에 관한 오늘 본문은 천국의 제자의 의로운 자격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앞의 간음하지 말라는 명제와 오늘 본문을 같이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나 양용의 교수는 이 두 가지 명제를 분리해서 봅니다. 저도 분리해서 보는 입장을 취합니다. 

계속 비교해 보는 예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산상설교 해석을 소개해 왔습니다. 오늘도 역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혼에 관한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말한 진정한 이혼에 대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보고, 그런 다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모세의 가르침을 왜곡시킨 것을 보인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 잘못된 가르침을 교정한 것으로 말합니다. 즉 모세의 율법에 원래 품은 뜻을 잘못 해석해서 가르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고 새롭게 재해석하여 원상태로 돌려놓는 일을 하신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가르침은 이혼을 쉽게 하지 말라는 것인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혼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가르쳤고, 예수님은 이것을 교정하여 원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혼인상태로 돌이켜 놓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럼 과연 로이드 존스 목사의 의견이 맞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에 19장을 보면 또 이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9:1-12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느 자는 간음함이니라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으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 대답으로 예수님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으면’이라고 묻게 되면 이혼에 대하여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 대답으로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라는 식으로 하셨으니 바리새인들은 이혼을 쉽게 여겼고,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는 본래 그렇지 아니하다는 식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교정하여 원래 에덴 동산으로 돌려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창조의 원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예수님이 가르치셨다면 창조의 원리와 12절 말씀이 맞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든 고자는 정관수술을 해서 아이를 생산하지 못한 경우를 생각하면 되고요,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는 천성적으로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경우이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자는 바울처럼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 바울은 본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둘이 한 몸을 이루라는, 그리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에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으로 산상수훈의 이혼에 관한 말씀을 해석하였는데 부분적으로 맞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천국을 위하여 고자가 된 자’들은 현재의 남자와 여자가 장가가고 시집가는 질서를 뛰어넘어 주님이 나라가 임할 때에 이루어질 질서를 이미 살고 있는 자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과거 에덴 동산으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오히려 발전적이여 새로운 질서로 성취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9장에서 주님은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고, 12절 끝에서도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보통 이 땅의 질서 안에서는, 즉 창조의 질서 안에서는 이 말씀을 받을 수가 없으나, 새로 난 성령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받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것은 구약의 질서상 있어서는 안됩니다. 창조의 질서를 새 창조의 질서로 완성함을 마태복음 19장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질서로 회귀하는 가르침이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혼에 대한 말씀은 구약 신명기 24: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보십시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말지니라.”

여기 보면 이혼 증서를 써주게 되는 경우가 아내에게서 수치되는 일이 발견이 될 때와 아내를 미워할 때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19장에서는 ‘어떤 이유가 있거든’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여기 이 부분에서 이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약속한 땅을 기업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려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신명기 이 부분은 약자를 보호하는 문맥입니다.  

이 당시에 여자가 혼자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룻기에 나타난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 둘을 다 잃으니 그 인생이 쓴 물처럼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과부가 되거나 이혼녀가 되면 가나안 땅에서 살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 만일 남편이 아내를 아무렇게나 내버리게 되면 어찌되겠습니까? 바로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자를 보호하여 가나안 땅에서 생명을 누리게 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요즘으로 본다면 실업수당을 받는 것과 같아요. 예전에는 그냥 사장 마음대로 직원을 해고했었습니다. 거의 학대에 가까웠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해고된다 하더라도 국가가 보호를 해줍니다. 얼마 동안 자신이 받았던 월급의 몇 퍼센트까지 지원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약자를 보호하는 셈이지요. 바로 이와 같은 법으로 이혼에 대하여 신명기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신명기의 이혼도 악용을 하면 남편 마음대로 이혼 증서를 써 줄 수가 있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거든’, ‘아내를 미워해서’라는 것은 정말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 분명하게 수치가 되는지, 왜 아내를 미워하는지 정확하게 명시되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슬람 세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남성우월주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법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 완악함을 위하여 조절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천국의 의로운 제자는 신명기 율법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럼 마음의 완악함은 무엇입니까? 전부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내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보다 더 괜찮은 자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 배우자를 통해 내가 좀 더 낫게 보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자기 유익을 위해 선택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핵심의 가르침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전적으로 죄인을 사랑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경건하지 못할 때에, 우리가 아직 더러웠을 때에 아들을 아끼지 않고 화목제물로 내어주셔서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심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죄인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였고 죄인들을 자기의 몸에 연합을 시키셨습니다. 바로 이런 빛 가운데 교회는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온전한 연합을 이루신 것입니다. 바로 이 구원을 반영하며 사는 것이 천국의 제자들의 의로운 삶입니다. 출애굽의 구원을 반영하여 수치스런 일이 발견되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내는 것이 이스라엘의 의로운 삶이었습니다. 이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셨습니다. 

죄인들의 수치를 발견하여 내쫓으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다시는 죄로 말미암아, 다시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분리될 수 없는 새로운 구원의 질서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창조의 질서를 새 창조의 질서로 완성하셨습니다. 천국의 제자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바로 새 창조의 질서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력한 연합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부부연합은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이 되기도 전에 결혼하면서 이혼하였을 경우 위자료를 결정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결혼이 파괴된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가 이렇게 타락해 있는 현실입니다.

이미 죄인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구원하사 주님의 몸에 연합시키셨는데, 부부가 이혼하는 것은 이 연합을 무시하는 것이며 파괴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은 우상숭배와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구원은 이제 사단을 본받지 않고 마귀를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사단이 가장 즐겨하는 일은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교회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의 질서가 완성이 되었습니다.

아내의 수치스러움, 결격사유 등은 남편이 도리어 낮아져서 섬겨야 할 사유가 되는 것이지, 이혼의 정당한 사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남편의 수치스러움, 결격사유 등은 아내가 도리어 낮아져서 섬겨야 할 사유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는 상대방의 약점이나 단점을 찾아내어 공격하고 뒤에서 헐뜯고 비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용서하고 그 약점을 감당해서 짐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천국 제자들의 의로운 삶입니다.

여기 이혼에 관한 말씀은 단순히 이혼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 제자로 의로운 삶을 사는 원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서도 가르쳐져야 합니다. 이 말씀은 직장에서도 가르쳐져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 어디에서나 이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성도들 가운데 오래 교회의 잘못된 점들에 대하여 많이 들어왔고 또 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부족한 점들을 볼 수 있는 귀와 눈이 많이 발달합니다. 교회의 완전한 수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맞는 것인지, 맞지 않는 것인지 저울에 달아 재어 봅니다. 그리고 그런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예리한 비판을 하고 교회가 아니다는 식으로 교회를 떠납니다.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스스로는 의롭다고 여길지 모르나 실제로는 주님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이요, 사단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를 만족시켜 주길 원합니다. 모든 행사나 일들이 자기를 만족시키길 원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찾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섭섭한 일이 생기면 아주 심하게 반응을 합니다. 무언가 자기를 수치스럽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 신실한 교인들 가운데에는 섭섭한 일이나 상처를 받은 말에 대하여 그 앙금을 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술을 한 잔 하면서 훌훌 그 앙금을 털어버리는 것을 잘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 상처를 마음 속 깊이 넣어두고 있고, 그것을 언제든지 꺼내게 될 순간을 기다리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연합을 파괴하기를 기다립니다.

본문에서 음행한 연고가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행은 부부연합을 파괴하는 근본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혼이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음행의 증거가 하나라도 발견이 되면 무조건 이혼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시골 고향에 대해 방송하는 TV를 보면 시골 동네 할아버님들은 거의 빠짐없이 바람을 폈습니다. 그런데도 황혼의 세월까지 함께 부부로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어르신들이 거의 모두 그렇게 살아오셨습니다. 참 대단한 분들이십니다. 음행에도 불구하고 연합이 깨지지 않았습니다. 음행을 정당화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이에 비하여 현재의 젊은 세대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처럼 주의 날에 주님의 성찬상에 앉아 떡과 잔을 먹고 마심은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요 주님의 길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즉 서약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지 입맛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을 반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한 새 사람으로 만드신 주님의 일에 함께 하는 자가 천국의 제자들이며, 천국의 의로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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