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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향기(2) : 품격(品格) (벧후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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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향기2 : 품격(品格) (벧후 1:4-11)
 
 
❚품격을 지킵시다

세상 모든 것에는 지켜야 할 품격(品格)이라는 게 있습니다. 나라에도 나라의 품격에 해당되는 국격(國格)이라는 게 있지요? 얼마 전 대통령을 수행하고 미국에 갔다가 성추문으로 나라 망신시키고 국격을 떨어뜨린 청와대 대변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나라의 품격도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소중한 국격을 한 개인이 바닥까지 떨어뜨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가끔 이렇게 우리를 대한민국 국민임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최근 뉴스에는 아주 대조적인 두 나라의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방송되었습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조지 부시는 지금 여든 아홉 살입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머리를 빡빡 민 채 역시 까까머리인 두 살배기 사내아이를 안고 웃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아이는 부시가 대통령이었을 때 그를 모셨던 경호원의 아들입니다. 이 아이가 백혈병에 걸려 치료받으면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자 아빠의 옛 동료들이 함께 삭발하고 투병을 돕는 모금에 나섰고 그들의 상관이었던 전직 대통령이 모금에 힘을 보태고 아이에게 용기를 주려고 머리를 깎은 것입니다. 

긴 말이 필요 없지요? 이 사진 한 장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직도 나라의 품격, 국격을 지키고 있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우리 대한민국은 83세 된 전직 대통령이 숨겨둔 재산 때문에 압수수색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면서 추징금 2205억 원 중 아직 1672억을 안 내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검찰이 칼을 빼들고 전직 대통령 부부와 자녀들의 재산을 압류 중인 것입니다. 

이 뉴스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로 나가면서 “야, 대한민국 참 이상한 나라다” 소리를 세계적으로 듣게 되었으니 되게 부끄럽습니다. 국민의 사랑과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는 전직 대통령을 우리는 언제쯤 보게 될까 답답하면서도, 다시 한 번 ‘품격’(品格)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전직 대통령이나 공직자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국민 한 사람의 품격이 나라 전체의 국격을 드높일 수도, 바닥에 떨어뜨릴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도 교격(敎格)이라는 있지 않을까요? 효자교회, ○○교회 하면 떠오르는 품격인데 그 교회의 목회자나 성도 한 사람이 얼마든지 교회의 품격을 드높일 수도, 바닥까지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성도(聖徒)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품격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향기> 두 번째 시간으로 우리 성도들,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품격>(品格)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나아가 교회가 갖추어야 할 교회의 품격, 소위 교격에 대해서도 말씀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신사와 양반

서양에는 ‘신사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뿌리는 ‘기사도’인데 중세의 기사들은 명예롭지 못한 기습공격이나 약자나 패자에 대한 학대와 살해를 금했습니다. 기사도는 용기, 성실, 명예, 예의, 경건, 겸손, 약자 보호라는 덕목을 가지고 있으면서 윗사람에게는 용기, 정의, 겸손, 충성으로, 동료들에게는 예의로, 약자에게는 연민으로 대하고 교회에 헌신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기사도의 뒤를 이어 신사도가 나옵니다. 신사(紳士), Gentleman이지요? 

신사도는 명예의 존중, 관용, 봉사, 함부로 남과 싸우지 않는 것,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는 경우에도 일정한 룰을 지키는 것(페어플레이 정신), 부상당한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 것, 여성에 대한 정중한 태도, 노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위로 등을 통해 품격을 갖추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신사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신사도에 대해 나옵니다. 사도행전 17:11 말씀을 함께 찾아 읽읍시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우리가 전에 읽던 개역성경에는 이 “더 너그러워서”가 “더 신사적이어서”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 ‘신사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가문이 좋은, 출신이 좋은, 고귀한’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베뢰아 사람들이 모두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받아들이는 좋은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영적 신사가 되어야 하지만, 생활이나 언행이나 자세에 있어서도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 교회 성도들 참 신사적이다”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저 교회 성도들 참 양반이다”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서양의 신사도와 비슷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양반정신’이 있지 않습니까?

흔히 ‘양반’ 하면 ‘에헴’ 하고 헛기침이나 하며 뒷짐 지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진정한 양반정신은 “내가 양반입네” 하며 잘 난 체 하고 특권의식이나 누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양반정신은 체면이나 체통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데 이 체면 체통이 “양반은 비가 와도 뛰지 않는다”는 식이 아닙니다. 이 양반의 최면과 체통은 헌신과 희생, 그리고 나눔을 통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진짜 양반은 서재에 들어앉아 책을 읽으며 후학들을 가르치다가도 임진왜란 때처럼 나라에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일어나 의병을 일으키고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입니다. 

유명한 경주 최 부잣집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진짜 양반입니다. 이 가문에 대해서는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이라는 제목으로 책까지 나왔습니다만 자그마치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던 집안으로 이들은 여느 부잣집과 달리 이런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 “흉년에 땅 사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바로 이러한 철학이 이 집안을 300년 동안이나 부자로 유지해 주면서도 주변 모든 사람에게 칭송 받는 명문가로 남게 해 준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양반정신이고, 이게 진짜 신사도고, 이게 진짜 우리가 지켜야 할 품격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진짜 신사가 되고, 진짜 양반이 되어야 합니다. 돈도 잘 벌어서 잘 쓰고 잘 나누는 것이 우리의 품격입니다. 희생과 헌신, 나눔이라는 아름다운 자세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것이 우리의 품격입니다. 우리 효자교회 성도들은 모두 신사가 되고 양반이 되길 바랍니다. 겉으로만 폼 잡고, 잘 차려 입고 품위 있는 체 하는 가짜 신사, 가짜 양반 말고 우리의 삶에서 향기가 나는 품격 있는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세상은 점점 경박하고 저속해져만 가는데 이런 세상의 흐름과 멀리 하고 반드시 성도의 품격을 지켜야 합니다.

❚성도의 품격, 교회의 품격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성도의 품격’에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무엇보다 말과 행동에서 품격을 지켜야 합니다. 성도라는 이름은 거룩할 성(聖), 무리 도(徒), 거룩한 무리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와 행동에서 거룩함의 품격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삶에서 흐트러진 자세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시면 자세부터 흐트러집니다. 평소에는 신사인 체 하고 아주 고매한 사람처럼 행동하다가도 술에 취하면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고 언어가 흐트러지고 자세가 엉망이 됩니다. 

신사인 우리가, 양반인 우리가 세상의 술 취한 사람처럼 흐트러져서야 되겠습니까? 또한 성도는 어디를 가서든지 바르지 못한 처신을 하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 성도의 격에 맞지 않는 언어를 쓰지 말아야 합니다. 저속하거나 과격한 언어, 폭력적 언어는 성도라는 품격에 맞지 않습니다. 말 한 마디를 해도 향기를 품는 말을 하십시오. 말에도 에너지가 있고 독이 있다고 합니다. 화초를 향해 매일 욕을 하면 화초가 시든다고 하는데, 집에서 키우는 개를 향해 매일 저주를 하면 개가 시름시름 앓는다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저는 당회나 제직회 등 교회의 모든 회의와 모임에서 이런 원칙을 세웠습니다. 회의를 하거나 모임을 하다가 언성이 높아지거나, 말다툼이 일어나거나, 성도의 품격에 맞지 않는 표현이 나오면 그 즉시 그 회의와 모임을 폐한다. 왜요? 거기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니까요. 하나님 계신 회의나 모임에서 그런 말 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말과 표현이 나온다면 그건 하나님 안 계신 자리니까 즉시 끝내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안에서 서로를 부를 때 친하다고 해서 이름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권사님들, 제가 절대 서로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지요. 아무리 친하고 나이가 어려도 “아무개야” 하지 말고 꼭 ‘권사’ ‘집사’ 직분으로 부르라고 했지요? 왜요? 친할수록 예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 줄 때 내 품격도 살고, 그래야 교회의 품격도 세워집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언어와 행실과 자세를 통해 성도의 품격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교회도 품격이 있는 교회가 되고, 그 교회 성도들도 품격이 있는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성한 성품

이 ‘성도의 성품’에 대해서 오늘 본문인 베드로후서 1:4~11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을까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 나오는 ‘신성한 성품’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특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특성을 지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이름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본성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신성한 성품’이 오늘 주제인 성도의 품격과 같은 뜻입니다. 성도의 언행심사, 성도의 삶의 자세를 통해 나타나야 할 거룩한 성품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는 어떤 성도의 성품, 어떤 품격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5~6절을 봅시다.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제일 먼저 ‘덕’(德)이 나오지요? 다음 주에 이 덕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그 다음은 ‘지식’이지요? 다음주에 ‘덕’과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그 다음이 ‘절제’입니다. 5주에 살펴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인내’입니다. 5주 후에 ‘절제’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경건’입니다. 그 다음에는 ‘형제 우애’입니다. 그 다음이 최종적으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사랑의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절제하고 때로는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목사지만 가끔 내 맘대로 해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나도 남들처럼 말도 막 하고, 행동도 함부로 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간혹 차를 몰다가 정말 화나는 일이 생기면 욕도 하고 싶고, 자기가 먼저 잘못해 놓고 도리어 저에게 화내고 욕하는 사람 만나면 한바탕 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여러분은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참아야 하잖아요? 어디 목사뿐이겠습니까?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체면과 체통을 지켜야 할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대학교수가 낮에는 학생들 가르치다가 밤에는 강도짓과 성범죄를 일삼다가 붙잡힌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두 얼굴을 가진 사람처럼 살 수 없기 때문에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남이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우리의 품격과 체통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품격과 체통도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형제우애와 사랑 때문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품격은 ‘나를 위한’ 품격이 아니라 ‘남을 위한’ 품격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위한’ 품격,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품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성도와 교회는 사회의 품격을 이끄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품격과 도덕 양심을 이끌어 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좀 달라” 하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때문에, 성도들 때문에 조금은 세상이 밝다고 좀 덜 썩는 것 같다고 인정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왠지 거꾸로 된 느낌입니다. 요즘은 교회와 성도들의 언행심사가 오히려 세상의 것을 함부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안이 오히려 세상보다 더 천박해지고 경박해진 느낌입니다.

저도 설교자지만 요즘 설교자의 언어도 ‘재미있는 설교’라는 명목으로 거칠고 천박한 쪽으로 휩쓸려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에서 해서는 안 될 상스럽고 경박한 표현과 행동을 하는 목회자들이 있고 성도들은 그것을 들으며 재미있다고 즐거워합니다. 강단에서뿐 아니라 뉴스에 심심치 않게 사기니 음주 뺑소니니 성추문이니 아주 천하고 경박한 범죄에 연루된 목회자들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순간 한국 교회 전체의 품격이, 교회의 품격인 교격(敎格)이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디 목회자뿐이겠습니까?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하는 언행이, 그리고 교회 밖에 나가 하는 언행심사와 자세가 품격을 잃으니 세상이 우리를 얕잡아봅니다. 우리가 교회 밖에 나가서 혹시 “나는 저 사람 때문에 교회 안 갈 거야” 소리를 듣는다면 그게 어디 나 혼자의 품격만 떨어지는 일입니까? 교회의 품격이,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이 다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교회가 분쟁과 다툼 때문에 주변 불신자들이 “나는 교회 안 다니지만 저 교회는 가지 마라” 소리가 나온다면 그건 그 교회의 품격만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국가에는 국가의 품격인 국격(國格)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이미지입니다. 교회에는 교회의 품격인 교격(敎格)이 있습니다. ◯◯교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입니다. 성도에게는 성도의 품격(品格)이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 안과 특히 교회 밖에 나가서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자세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 성도의 품격을 지켜 나갈 때 교회의 품격이 서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오늘도 우리의 옷매무새를, 마음 매무새를, 말과 행동의 매무새를 조심스레 가다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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