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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혜 (빌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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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빌립보 1:1-11

헤밍웨이의 소설 ‘세상의 수도’, (Capitol of the World)라는 소설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페인의 한 아버지가 어느 날, 아버지와 불화하여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를 하려고 결단을 합니다.  아들의 가출이 자기의 허물  때문이라고 느낀 아버지는, ‘엘리베랄’이라는 신문에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하였다.- 아버지가”라고 광고를 실었습니다. 그런데 ‘파코’라는 이름은 스페인에서는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약속한 당일에 몬타나 호텔에 나가보니까, ‘파코’ 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800여명이 나와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더랍니다. 

이 간단한 이야기에는 인간 삶의 단면을 잘 보여줍니다. (1) 불화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파코’란 이름을 가진 아들에게만도 이처럼 많다는 것입니다. (2) 비록 불화하기는 하지만 화해하기를 기다리고 사모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또한 많다는 것입니다. (3) 이처럼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갈망하는 이들이 많은 시대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 삶의 단면을 예민하게 본 헤밍웨이도, 실제로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는 은혜의 필요성을 알았지만, 은혜의 강에 자신을 던지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은혜가 필요한 줄은 알았으면서도, 안타깝게도 은혜의 강에 자신을 담드지 못한 연고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는 참으로 안타까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정원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왕이 있습니다. 이 왕은 정원에 있는 모든 나무와 풀꽃 하나하나를 정성으로 관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아침에 정원에 나가서 보니까, 모든 나무들이 시들어 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왕은, 문 옆에 서 있는 떡갈나무에게 시들게 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왕께서 “떡갈나무야, 무슨 일이 있었니? 도대체 왜 다들 시들어 있지?”라고 하니까, 떡갈나무가 대답하기를, “나무들이 서로 자기가 다른 나무보다 못하다고 실망하고 있어요.. 소나무는 자신이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낙심을 하고, 포도나무는 복숭아나무처럼 똑바로 서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낙담을 하고 있습니다. 또 제라니움은 라일락처럼 날씬하지도 못하고, 향기도 없다고 불평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왕이 자세히 살펴보니까, 모두 시들어 있는 나무와 풀과 꽃 가운데서도 유독히 생기가 있고, 아름다운 꽃이 하나 있었는데, 그 꽃이 바로 팬지(Heart-peace)였습니다. 그래서 왕은 팬지에게 물었습니다. “팬지(마음의 평화)야, 다들 절망 가운데서 시들어 가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작은 꽃인데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는 것을 보니까, 짐의 마음이 매우 기쁘구나! 그런 연유가 무엇이냐?”라고 했습니다. 팬지는 임금님에게 대답하기를, “예, 임금님 고맙습니다. 저는 원래 볼품이 없는 꽃입니다, 하지만 임금님께서 떡갈나무나 소나무나 복숭아나무, 혹은 라일락을 원하셨다면, 저를 뽑아 버리고, 그들을 심었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임금님께서 저를 이 귀한 정원에 심으신 것은, 저를 보시면서 마음에 평화를 느끼기 위함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임금님께서 언제나 저를 보시면, 마음의 평화를 느끼시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했다합니다. 이처럼 진정한 평화라고 하는 것도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팬지 꽃처럼 평화를 이루고자, 곧 그리스도 예수와 바른 관계를 이루고자 정성을 다해야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고 누릴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의 소원은 빌립보 교인이 성령의 은혜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샬롬’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안식이나 평온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샬롬’은 (1) 전쟁 중에도 잃지 않은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평화는, 언제 어디서 적군이 겨눈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고,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부비트랩 때문에, 나에게 죽음이 밀어닥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주님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에 누리는 평화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샬롬’은 (2) 태풍처럼 거친 풍랑 속에서 누릴 수 있는 평온함과 잔잔함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집채보다 큰 파도가, 여러분이 타고 있는 배를 집어삼킬 듯이 달려들어도, 말씀 한 마디로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여러분을 붙잡고 계신다는 믿음 때문에 누리는 평화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샬롬’은 (3) 앞과 뒤, 바른 것과 그른 것을 분간하기 어려운 혼란 속에서도 모퉁이 돌이 되셔서 좌와 우를 견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누리게 되는 화합과 조화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에수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바라고 사모합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 사도는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정성을 다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하여, 필요한 것과 옥바라지를 할 사람을 보내준, 빌립보 교인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본문 빌립보 1:1-11입니다. 여기서 본문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사도 바울은 지금 몸은 감옥 안에 있지만, 영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바울의 몸은 비록 쇠사슬에 매여 있고, 감옥 안으로 주거가 제한 되어 있을지라도, 실상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과도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평강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7절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담대하게 고백하기를, ‘내가 여러분 모두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인 줄 압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을 나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갇혀 있을 때에나,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에나, 여러분 모두는 나와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란 ‘오직 나사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자 구원의 은총’을 말합니다. 왜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가 하면, 여러분이 받은 구원의 은총 곧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이 받을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도무지 받을만한 자격과 공로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엄청난 사랑을, 나를 위한 사랑과 은총이라고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얻은 구원이기에 은혜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믿으시면 아멘)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가 없이, 값없이 공짜로 주신,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값진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무엇을 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기에 은혜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가장 값진 선물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즐거움으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받은 즉시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해야만 하고, 나의 공로가 전혀 없이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 받은 자답게 늘 기뻐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저와 여러분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런 값진 은혜를 받은 그리스돟인에게 권면하기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평강은 내적으로 평안한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백성을 눈동자와 같이 보살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 만족한 삶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 참된 평강이 있는 것이지 평강이 있은 후에 은혜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은 존 웨슬리의 구원의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738년 5월 24일(수) 웨슬리의 일기에 보면 기록하기를,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진정으로 ‘아멘’하고 대답할 수 있는 분은, 은혜 받은 분입니다. 그런 분으로 가득한 교회가 복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그리스도인에게 임한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본문 1-2절에서 빌리보 교인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살고 잇는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 모두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종’이란 표현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종’과 같은 표현입니다. 종의 모든 것이 주인의 소유입니다. 종은 오직 주인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신실한 신자에게는 그런 의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란 표현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세상의 노예와 다른 점을 본문에서 증거하는데, 다른 점이란, 곧 종된 바울과 디모데에게 평강이 넘치는 것은 물론, 주님을 섬기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라고 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부와 성자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된 사람이고, 생명의 주인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러분 모두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임을 즐겁게 인정하고 고백하기 바랍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예수의 종 된 사람에게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평강과 복이 가득하여 넘치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믿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의 종’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 9-11절에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더 풍성하게 되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에 순결하고 흠이 없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지적한 말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했을 때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셨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셨으며, 여러분에게 값없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여러분에게 성령의 은혜를 아낌없이 부어주는 이유도 바로 여러분이 이런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본문 9-11절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더 풍성하게 되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에 순결하고 흠이 없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빌립보 교인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풍성해져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알고, 그래서 생활 속에서 흠은 없고, 의의 열매만 가득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자면 먼저 사랑이 풍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크면 클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부터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처럼 사랑을 풍성하게 베풀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1년도에 미국 뉴욕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알카에다에 의해서 9.11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온 세계를 충격과 경악으로 몰고 갔던 사건입니다. 비행기가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뉴욕세계무역센타)를 들이받아서 삽시간에 110층 짜리 빌딩이 불덩어리가 되어서 녹아내리고 말았는데, 그 때에 어떤 사람이 휴대폰으로 가족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는데,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을 사랑했소.’, ‘사랑한다고 전해주오’라는 시 마디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순간 죽게 된다면, 무슨 말을 남기겠습니까?
사랑한다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말보다 더 귀한 말이 없습니다. 죽는 순간에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인생의 마지막에 보석처럼 빛날 것은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보내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편지에서 권면하기를, ‘너희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존재입니다. ‘비록 종은 되었지만 세상에서 나보다 복된 사람은 없다.’라는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누리며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평강을 충만히 누리고, 이웃과 나누며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의 가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해야 하고, 값없이 받은 사랑을 값없이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그런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진진하게 풍겨야만 합니다.
 
신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한 마디로 축약을 한다면 ‘사랑’입니다. 아무리 힘이 들고 험한 세상이지만,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되는 것을 믿고,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사랑 때문에, 세상에 생명의 역사가 넘쳐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무엇인지를, 세상에 밝히 보여주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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