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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생활의 훼방꾼 (갈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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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생활의 훼방꾼
갈라디아 3:1-12

예전에 어떤 학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방에 갔다가 어떤 호텔에 머문적이 있습니다. 저녁에 함께 간 분들이 외출을 하자고 해서, 자동차로 한 10분 정도 가는 거리를 찾아서 갔습니다. 유명한 개화기 지도자였던 김옥균 선생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김옥균 선생의 무덤에 갔다가, 그 지역의 향토사학자 한분의 안내로 김옥균과 관계가 있는 곳까지 찾아갔다가, 일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데, 가로등이 없는 시골길이라 그만 숙소가 있는 호텔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평시에는 호텔의 네온간판이 켜져 있는데, 그 날따라 고장이 나서 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밤길에 이정표가 제대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할 수 없이 운전하는 목사님께서 네비게이션에 호텔 이름을 입력을 하고나니까, 네비게이션 화면에 가야할 길이 분명하게 나타나서, 길 안내를 정확하게 해주어, 숙소로 돌아 온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잘 모르는 길을 가자면 네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여정을 가면서도 실수 없이 가려면,  좋은 인생길을 안내할 네비게이션을 소유해야 합니다. 어둡고 답답한 인생길을 달려가면서, 만일 언제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이라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하시고 자비하시며, 처음과 마지막을 아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분명하게 들을 수만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이미 인생길을 가는데 가장 좋은 네비게이션을 소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네비게이션의 안내는,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으며,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인류의 그리스도라고 믿고 사는 사람이라고, 환경의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과 같은 환경의 어려움을 당하며 살고 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남들과 함께 당하는 환경의 어려움을, 넉넉하게 극복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고감도의 안테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 사도께서 갈라디아 교인에게 하신, 본문 갈라디아 3:1-12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믿음생활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먼저 믿음의 길에는 훼방꾼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1절에서 갈라디아 교인에게 말씀하기를,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보면 갈라디아 교인을 바른 믿음의 길에서 홀려가지고, 어리석음 믿음의 길을 가게하려는, 믿음생활의 훼방꾼이 있음을, 바울 사도가 명확하게 갈라디아 교인에게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성령의 능력 아래 있는 공동체인, 교회 안에도 바른 믿음의 길을 가는, 성도의 삶을 훼방하는, 훼방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받고, 야훼의 명령을 따라서 성막을 건설하고,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야훼께 피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류의 그리스도가 되는, 나사렛 사람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은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바로 나의 구원과 영생을 위한 사건으로 믿고, 나사렛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여러분 모두가, 지금 이 시간 나사렛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현존을 체험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심령이 세상에 속한 것과 허욕과 탐심으로 인하여, 메마르거나 무뎌지지 않아야만, 그리스도 예수의 현존을 체험할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성결하고, 겸손하고 정직한 성도는, 마음의 문을 열고 ‘주여! 말씀하옵소서, 이 죄인이 듣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 기도하는 중에 성령님의 임재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곁에 현존함을 체험할 수가 있고, 겸손히 마음의 문을 열고,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듣는 중에,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수가 있으며, 여러분의 귀를 세우고, 전심으로 말씀을 듣는 중에, 예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심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하여 참 자유와 평화를 맛보는 분이 지금 여기에도 계십니다.

청각장애인은 음악소리를 들을 수 없고, 시각장애인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그림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안 들린다고 아름다운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안 보인다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멋진 풍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듣는 것과 보는 기능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안 들리고 안 보이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소리는 누구나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안테나가 주님께로 향한 사람은, 누구나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훼방꾼이 여러분의 바른 믿음생활을 방해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훼방꾼은 율법주의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인간의 공로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논리로 율법을 몰랐던 갈라디아 교인의 믿음생활을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 여러분의 바른 믿음생활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지 한번 가만히 여러분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가정마다 바른 믿음생활의 훼방꾼에는 특색이 있고, 종류도 다양할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보다도 바른 믿음생활의 훼방꾼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나의 믿음을 방해하고, 나의 영성생활을 혼란스럽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바른 믿음생활을 방해하는 훼방꾼을 잘 살펴서,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행하듯이,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싹뚝 베어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른 믿음생활을 하자면 다음으로 받은 은혜를 발견하고,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믿음생활을 하자면,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크신 은혜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6-7절에서 갈라디아 교인에게 말하기를,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움으로 여겨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러니까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점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매일의 믿음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큰 은혜를 발견한 사람은 건강한 신앙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그리스도인은 매일의 믿음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의식하면서, ‘은혜의 렌즈’를 통해서,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렌즈를 통해 무엇인가를 보는 경우에, 정작 렌즈를 느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렌즈는 사물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런 렌즈처럼, 성령의 은혜는 하나님의 세계를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고감도의 안테나가 텔레비전 전파를 잡아야만 화면이 나오고 소리가 들립니다. 지구 반대편 세계의 소식까지도 안방에서 옆 동네 이야기처럼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주일예배와 수요기도와 새벽기도는,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 예수와 우리를 연결하는 고감도 안테나에 방향을 맞추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심령을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갈망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영적인 고감도 안테나의 방향을 예수 그리스도와 맞추는 삶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와 영적 주파수를 맞추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바른 믿음생활은 내 방법과 경험과 계획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믿음생활은 인간의 방법과 경험과 계획을 버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방법과 계획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다르게 표현할 때에는 ‘전적신뢰’, ‘절대의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전적신뢰’란 ‘인간의 모든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방법만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의미이고, ‘절대의탁’이란 ‘인간의 계획은 모두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잘대적으로 밑겨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믿음이란 이처럼 인간의 모든 계획과 방법과 경험을 그리스도 에수 앞에서 전적으로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방법에만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9-11절에서 갈라디아 교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기록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아래 있다."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셨고, 성령께서 믿게 하는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하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불러 세웠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3-5절에서 갈라디아 교인에게 말하기를,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을 맺으려고 합니까?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참말로 허사였습니까? 여러분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러하신 것입니까?’라고 했고, 6-7절에서는 말하기를,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움으로 여겨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격려합니다. 복음은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했다는 것을 믿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소망이 생기고, 담력을 가지게 되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삽니다. 이제부터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가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하기 전에 만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설교하려는 목회자에게 물으시기를, ‘너는 설교 원고대로 살고 있느냐? 살지도 못하는 것을 왜 설교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신다면, 해 아래에 살고 있는 목사 가운데, 담대하게 설교할 목사가 전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설교자는 어떻게 설교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해 아래 있는 설교자는 대부분 설교 하기 전에 ‘네가 설교하려고 한 말, 그것이 네 말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설교자의 대답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입니다.’라고 대답을 할 것이고, 그 때에 설교자가 듣는 대답은, ‘그런가! 그러면 자네는 나의 심부름이나 하게!’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든 설교자는 말하기를, ‘성경이 말씀하기를,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이라고 하면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줄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인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힘 입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 11:6-10절에서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마치 타국에서와 같이 약속의 땅에서 거류하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에 어려운 목사의 아내로 살다가,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하라자끼 모모꼬라는 사모님이 있습니다. 모모꼬는 악성 폐암 선고를 받았지만, 남편은 나중에야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사모님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폐암환자라는 소식을 남편에게서 들은, 그 날부터 시작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생명이 붙어 있는 44일 동안, 그러니까 죽기 이틀 전까지 글을 썼습니다. 
남편의 입에서 ‘당신이 악성 폐암에 걸렸소. 의사가 두 주일 남았다고 하오.’라는 선언을 들은, 그 날의 일기입니다. ‘내 마음은 주를 경배하며, 내 영혼은 구원되신 하나님을 기뻐하노라. 오늘이라는 날, 1978년 6월 28일을 나는 분명히 적어 놓아야만 하겠다. 오늘은 내 길지 않은 생애에 있어서, 획기적인 날이 되었다. 나의 생애는 오늘부터 시작된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삶이다.’라고. 7월 30일 그녀는 교회에 갈 수 있는 모든 기력을 상실했는데, 그 날이 주일입니다. 일기에 적기를, ‘나갈 수 없는 교회! 지금쯤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겠지…’라고 하고는, 사모님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당과 예배의 광경을 생각하면서, 병상에서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녀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마지막 글을 썼는데, ‘신앙이란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는 엄마의 병을 알고 있다. 머지않아 더 심한 육체의 괴로움이 엄습해 온다는 것도 각오하고 있다. 그러나 엄마에게 더 분명하게 알려진 사실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직도 사랑이시며 신실하시다는 것,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깊게 엄마를 감싸주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또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이 엄마와 함께 계셔서 곧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다 주시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단다. 아들아! 제발 고통스러운 이 엄마를 보아라. 엄마의 최후를 꼭 지켜보아 주기를 바란다. 엄마의 육체가 식어져 굳어졌을 때, 거기에 죽어 있는 것이 엄마가 아님을 확인해 다오. 죽는 것은 육체일 뿐이다. 이 엄마의 나그네길에서 엄마는 육체를 남기고 떠난다. 그러나 이 엄마는 여기를 떠나서 어딘 가로 갔다는 것을 너도 알게 될 것이다. 어디에 갔을까?  어느 분 앞에 갔을까? 하나하나 네가 스스로 기도해서 해답을 얻어 보아라. 그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이 세상에서 남기는 커다란 선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는 쓰여지는 것 속에서 나타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여러 측면에서 쓰임을 받도록 부르십니다. 믿음의 시작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믿음여정을 가다가 보면, 바른 믿음을 방해하는 다양한 훼방꾼을 만납니다. 하지만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수신할 수 있는 고감도의 영적인 안테나를 준비함으로써, 하늘로부터 오는 주님의 음성을 명확하게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바른 믿음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내 방법과 경험과 계획이 아니라 모든 것을 겸손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뜻과 섭리에 맡기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무슨 일을 추진하더라도, 어려워하지 말고, 성령께서 가라는 길로 용기 있게 달려가면서, 아멘으로 순종해야만 합니다. 비록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예수와 더불어 잠간 동안 함께 고난을 당하면, 영원한 영광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하여, 제 평생 오직 믿음으로만 살았다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는 믿음생활을 하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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