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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신앙과 경건 - 실천하는 신앙 (약 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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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앙과 경건 - 실천하는 신앙 (약 1:19-27)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었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 대신에 동양 윤리로 인생과 역사의 이해를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바라지도 못한 중에 외국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와서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의 구원문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하고 제대로 축복받기 위해 실행하는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성경을 몰라서 잘 못 믿는 것도 아니고, 교육을 받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목사의 신학지식이 부족하거나 교회 건물과 형편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말만 있고 행위가 없는 외식적 신앙사상이 주님이 계시던 그 당시 외식으로 일관되던 유대인들의 신앙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제시된 하나님의 약속을 실행해야 한다는 필수사항을 짚고자 합니다.


1.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라(:19-21)

1) 듣는 자가 되고 주장하는 자가 되려하지 말라. 

빨리할 것은 듣기, 듣기는 너무도 중요하다. 듣는 것은 배움의 기본자세입니다. 배워 실력있는 자가 되려면 들어야 합니다. 듣기를 잘해야 합니다. 진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듣기를 민첩하게,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2) 그러나 말하기를 더디 하라 - 그러므로 대인관계에서 가볍고 경솔한 말, 무책임한 말 심지어 악하고 부정적인 말을 삼가야 합니다. 성급한 말, 조급한 언어는 실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언어에 조급한 자는 미련한 자라 하였습니다.(잠29:20) 

3) 성내기도 더디 하라 - 분노는 상대방에게 충격적인 전달방법입니다. 성내야 할 충분한 이유와 명분이 있어도 성내는 건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4)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 언어와 분노에 대하여는 사실 깊이 생각하면 단지 어떤 태도나 표현 방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문제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 입니다. 21절은 그런 점에서 언어와 감정표현에서의 근본대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심에 더러운 죄와 차고 넘치는 악을 청산해야 합니다. 주여 정결케 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5)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말씀을 겸비함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능히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야 하겠습니다.


2. 말씀은 실행되어야 합니다. (:22-25)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만 하는데 그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많은 사람들이 듣기만 좋아합니다. 많이 들으면 신앙인줄 압니다. 물론 들어야 믿을 수 있고(롬10:14) 듣는 가운데서 믿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신앙은 그 들은 말씀이 실제생활에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생활에 적용이 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려 하면 결코 쉽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듭니다. 

계 10:9-10『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는 꿀같으나 그 배에는 쓰더라고 한 것은 실행하고자하는 현실은 힘들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축복받기 위해 소위 축복성회니 무슨 성회니 하는 집회마다 짐을 싸들고 달려갑니다. 

그러나 참된 축복은 그런 축복 성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혹 이미 복 받을 근거를 스스로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제 실행만 하면 복 받을 수 밖에 없는 성도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그 중에 가르치는 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만하고 행치 않아서 주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마 23: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마 23:1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물론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외식하는 신자들이었습니다.

마 11: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어린이들이 놀이를 할 때 피리를 불며 춤추고 초상을 치르는 애곡을 할 때는 가슴을 치는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풍습이기도 합니다. 그와 같이 주님은 기쁨의 소리, 심판의 예고를 해도 감각이 없어진 백성들이라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외식이 심화되면 정서가 메말라버리고 기쁨과 슬픔에 알맞은 감정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심각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고했습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정서요 말씀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마음 상태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수많은 지식의 풍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행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에 대한 아주 미사려구한 표현들은 난무한데 진정 자신을 희생하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이웃을 품는다. 뭐 세계를 품는다고 노래는 하는데 실제 죽음을 각오하고 선교하라면 두려워하지도 못합니다. 이것이 말만하는 한국교회의 신앙 현실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은 말씀의 실천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외에 축복받는 비결을 말하는 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마귀가 가져다 주는 복입니다. 물질과 기적이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이른 바,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 』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말씀의 실행은 반드시 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으로 하여금 구원과 은총을 받는 보고(寶庫)입니다. 이 축복의 말씀은 지상의 삶에도 크신 은총을 입게 하는 언약서입니다. 

25『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여기 온전한 율법이란 복음 자체를 뜻합니다. 참된 법으로 자유를 주시는 율법이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계명을 주실 때에도,

출 20: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를 말씀의 근거로 그 행위를 보시고 축복하십니다.

신 28: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가령 행동은 목사가 보나 집사가 봐도 옳지 못하는데 복을 받겠다고 기도를 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복을 받겠습니까? 받을 수 없습니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샤머니즘적인 주술적인 기복신앙이 뿌리 깊이 있어서 하나님의 정하신 법은 무시되고 절에 가서 빌고 산에서 들에서 바닷가에서 비는 그런 미신적 종교성 때문에 교회에 나와도 행동 규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무조건 복을 빌면 되는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규모있는 종교입니다. 매우 현실적으로 행동이 수반되는 종교입니다. 도를 닦는 수준이 아닙니다. 교훈을 듣는 종교도 아닙니다. 카톨릭처럼 신비스런 일과 대화와 상식과 정치가 개입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실천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종교입니다.
예수 믿고 축복을 받은 바가 전혀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은총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셨습니다.

초대 한국교회의 부흥은 말씀을 사모하는 일과 진정한 통회에 근거했습니다. 80년대 전후로 성경공부를 보다 조직적으로 제자훈련을 하면서 많은 교육을 해서 유익한 점도 많이 있었지만 오히려 교인들이 순종하는 모습보다 교만한 결과도 많아졌습니다. 알기 때문에 나타나는 교만입니다. 

고전 8:1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실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주의 종들에 대한 존경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보이는 주의 종을 존경하고 따르지도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말씀의 하나님을 순종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는 주장입니다. 말씀의 실행이 시급한 때입니다. 


3. 헛된 경건과 참된 경건 (:26-27)

1) 헛된 경건의 특징(:26) -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합니다. 즉 자신을 바로 성찰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않은 무절제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도 만족시키지 못하며, 다른 사람을 돕지도 못하며, 더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2) 참된 경건 -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27)

①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선행을 합니다. 타인에게 실제적 도움을 주는 믿음입니다. 사랑의 섬김과 실천이 있습니다. 

예) 쉰들러 리스트,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 등

② 또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 세상에 오염되지 않는 것, 즉 도덕 윤리적으로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오염되지 말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세상에게 정복당하지 말고 오히려 정복하며 구별된 삶, 성별의 삶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의 말씀을 하나하나 실행하는 삶을 가짐으로써 주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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