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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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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6)


요즘 중근동의 이슬람 국가들이 민주화 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열기는 리비아와 이집트로 번져갔습니다. 시리아는 지금도 내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집트는 무라바크 대통령이 물러난 후에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했으나 이슬람원리주의를 내세우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바람에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군부가 개입해서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렸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의 대부분이 지금까지 권위주의 통치를 해 왔으나 이제 국민들의 생각이 깨어서 민주적인 정치를 원하고 있습니다. 민주정치의 요점은 국민의 자유입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인류 역사는 자유를 향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것도 알고 보면, 기본적인 자유를 억압당한 국민들의 욕구가 폭발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 정권 역시 지금까지는 인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통제하는데 성공했는지 몰라도 언제까지나 인민을 노예 상태로 묶어 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를 타고 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주국가는 헌법에 국민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우리나라 헌법에 보면, 모든 국민은 정치적인 자유,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주거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종류의 자유가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헌법에 언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자유는 모든 자유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자유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은 여러 차례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 자유를 상실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여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한 적이 있었고, 그 후에는 헬라의 알렉산더와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그리고 애굽의 지배를 받았고, 그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민의식이 강한 그들은 이민족의 지배를 당하는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유는 유대인들이 생각한 정치적인 자유나 종교적인 자유가 아니라, 죄와 마귀로부터의 자유 곧 영적 자유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나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죄를 지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싫든 좋든 죄에 얽매이고 맙니다. 누구나 경험을 통하여 아는 대로, 한번 거짓말을 하면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되고, 또 그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되어 결국 거짓말의 종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죄는 범죄한 사람을 종으로 삼고 놓아주지 않으며 점점 더 깊이 죄 가운데로 빠져들게 합니다. 

처음에는 죄책으로 양심이 고통을 당하지만, 점차적으로 양심이 무뎌져서 죄를 지어도 가책을 모릅니다. 이는 그 사람이 완전히 죄의 종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57장 21절에 이르기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하신 대로 죄의 종이 된 사람은 영적인 자유와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죄의 종이 되면 동시에 마귀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은 누구나 본질상 마귀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마귀는 자기 손아귀에 들어온 사람을 놓아주는 법이 없으며 끝까지 농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도적에 비유하시고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0:10上). 그러므로 마귀의 종이 된 것처럼 치명적인 일은 달리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의 타락상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마귀가 좋아하는 일만 행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비참한 실상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합니다.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오늘날 세상이 점점 사악해져 가는 것은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과 공권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죄와 마귀의 종이 되어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죄의 종이 된 사람은 율법의 종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지켜 영생을 누리라고 하심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탐심이 죄가 되는 까닭은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명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율법에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없다면 탐심을 정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3장 20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사실과,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음을 깨닫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려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 값을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지불해야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 제도가 성행했습니다. 남에게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채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전쟁에 져서 포로가 되어도 종이 되었습니다. 종살이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자연스레 종이 되었습니다. 종은 돈을 주고 사고팔았습니다. 종의 신분을 벗어나려면 그 종의 주인에게 합당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죄의 종 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율법이 정한 죄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하였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이 사망은 육체의 죽음 뿐 아니라 영원한 지옥 형벌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누구나 죽음의 권세에서 놓여날 수 없습니다. 구세주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세주는 인생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을 말합니다. 인류 역사상 구세주로 오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이 증언하는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생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인생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고귀한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인 레위기 17장 11절에 이르기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이유는 그가 자기 생명을 우리의 대속 제물로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구세주로서 죄의 종 된 상태에 있는 인생들을 자유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무슨 과학적 진리나 철학적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진리는 아무리 심오할지라도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못합니다. 현대는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사악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 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점점 더 가공할 무기를 만들어내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합니다. 

이는 철학도 마찬가집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철학이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밝혀주고, 인생의 바른 길을 제시해 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껏 철학은 이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새로운 철학이론이 나오는 것은 철학이 불변하는 진리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형편은 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관하여 신뢰할만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인류가 처한 불행의 원인인 죄를 해결하는 데는 전혀 속수무책이며, 사람들에게 약간의 심리적인 위안을 줄 뿐입니다. 세상 종교들은 죄가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의 심각성을 바로 알고 죄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한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역사상 많은 성현이 출현하였지만, 죄의 문제를 해결해준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법인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인생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마귀와 죽음의 종 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서는 결코 구원의 진리를 알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신 대로,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영생에 이르는 진리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하나님 아버지께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며, 구원의 진리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구세주로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들은 말하기를 “모든 종교는 본질상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종교든지 진실하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불교든, 힌두교든, 이슬람교든, 아니면 무속을 믿든 정성껏 섬기면 그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매우 무지하고 무책임한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하신 잠언 14장 12절 말씀과 같이, 세상 종교들은 그럴듯하게 보여도 실제로는 멸망의 길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자체가 진리임을 증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장사되셨으나 삼일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능력으로 자기가 구세주이며 구원의 진리이신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구세주는 인생들을 구원할만한 능력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구세주의 자격이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편협하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상대방의 기분이나 입장을 배려하거나 존중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진리가 거짓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이 지지한다고 해서 거짓이 진리가 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는 죽느냐, 사느냐, 영생이냐 영벌이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식으로 적당히 타협할 수 없으며, 진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선포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우리와 같은 죄인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으므로 죄가 없으십니다.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므로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는 사람이 되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동네에 들어가셨더니,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문 앞에라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왔으나 도저히 사람들을 비집고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기를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관심은 항상 죄를 해결해 주시는 데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먼저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서기관들이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외람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 게 하려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중풍병자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니, 중풍병자가 곧 힘을 얻고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중풍병자를 성하게 하는 것과 죄를 사하는 것 가운데 어느 편이 더 쉬울까요?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셨을 때, ‘저가 무슨 권세로 그런 말을 하는가?’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으로 당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신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지난날 중풍병자를 죄와 질병에서 자유케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아무리 흉악한 자라도 예수님께 나오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호소했을 때, 이르시기를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강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죄성을 타고 났을 뿐 아니라 매일 죄를 범하므로 본질상 똑같은 죄인입니다.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보다 더 나은 점이 없습니다. 그 강도나 우리나 다 같이 죄 사함의 은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우리 각자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세상에 이처럼 놀라운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때에 벌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주님께서 피를 흘려 율법의 요구를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은 죄사함 받은 성도들을 위한 해방선언입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죄와 사망과 율법의 종 된 상태에서 해방되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해서 보혈을 흘려주심으로 모든 죄를 씻어주셨으므로 성도들은 참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를 해방하였을 적에 졸지에 자유를 얻은 흑인들은 한 동안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갑자기 다가온 자유를 제대로 누릴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흑인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알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차원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죄에게 종노릇하며, 마귀를 두려워하고, 율법의 정죄 아래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영적 무지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깨달아 구원의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하셨습니다. 이 같이 말씀한 것은,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이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기에 충분하지 못하므로 율법대로 할례를 받고 안식일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는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조건을 보태야 한다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효화하는 무서운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율법주의는 다양한 모양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인간적인 공로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자들은 다 율법주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답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선한 일을 힘쓰는 것 역시 구원을 받기 위한 공로를 쌓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만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죄의 종살이하는 우리 가족과 친지와 이웃에게 영생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와 마귀와 죽음에게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영적으로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불신 이웃들을 자유케 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시고, 매일의 삶속에서 이 영적 자유를 풍성히 누리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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