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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 (사 1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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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만 돌아오리라 (사 10:20-23)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구원의 기회는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구원의 성취는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아 홍수심판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지만, 오직 노아가족들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지만, 오직 롯과 두 딸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원리를 마 22:1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기회를 주셨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청하셨지만, 정작 그 많은 사람들이 다 택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택함을 받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원리를 하나의 신학사상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이 원리를 발전시킨 신학사상이 바로 ‘남은 자 사상’입니다.

사 8:18을 보면,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자녀들을 통해서 장차 이스라엘에게 일어날 징조와 예표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3을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첫째 아들의 이름을 ‘스알야숩’이라고 부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첫째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시면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날 일의 징조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알야숩이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자기 첫째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비전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계획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전체를 통해 이 ‘남은 자 사상’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명확하게 이 남은자 사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 사상

그러면 이사야가 마음속에 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던 남은 자 사상이란 무엇일까요?
사 1: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스라엘 백성이 원래는 신실한 백성이었고, 정의가 충만하셨고 공의가 그 가운에 가득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창기처럼 되었고, 살인자들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신 뜻을 저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 1:2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을 저버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원수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셔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마냥 저들을 다 심판하고 끝내실 수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길을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한 선지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남은 자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저들을 심판하시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소수의 남은 자를 택하셨고, 저들을 통해 구원 역사를 계속해 가셨다는 사상을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실 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들을 출애굽하셔서 가나안으로 행군해 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행군 도중 저들은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 1세대는 안타깝게도 가나안 행군 도중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때 성인이 되지 않았던 어린 아이들을 남겨두셨습니다. 또한 40년 광야 생활동안 태어나는 아이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저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저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고, 저들을 통해 가나안 땅에서의 구원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남은 자 사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정화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고소합니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고소합니다. 마치 법정에서 검사가 피고의 죄목을 낱낱이 드러내듯이 고소합니다. 하나님께서 남달리 구별해서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하고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본의 아니가 다른 교회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총회 재심재판국원으로서 다른 교회문제를 재판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에 참여하면서 새삼 놀랐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큰 부흥을 이루었던 옛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참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강북의 한 교회는 8000여명이 모이던 교단 내 대표적으로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사분오열되었습니다. 교회가 셋으로 분열되었고, 교회가 싸우는 사이에 교인들이 대부분 흩어졌습니다. 아무리 해법을 찾아보려고 해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자조 섞인 말로 이렇게 평했습니다. 이 교회문제는 ‘예수님이 오셔도 어쩔 수 없으실 것 같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치십니다. 저들을 정화하십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을 통해서 새롭게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화의 대상이 돼서는 안되겠습니다.

둘째, 파종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남은 자를 비유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중의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사 6:13) 한 마디로 남은 자를 거룩한 씨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화하신 땅에 남은 자를 거룩한 씨로 파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해 저들을 거룩한 씨로 파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역사의 역군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남은 자

그러면 누가 남은 자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남은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믿음을 지킨 사람입니다.

히 11장을 보면 그야말로 성경이 말씀하는 대표적인 남은 자들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아벨에서부터 라합에 이르기까지 10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어떻게 남은 자로 정화의 시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거룩한 씨로 새로운 구원역사의 그루터기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답은 한 마디로 ‘믿음’입니다. 히 11장을 보면 ‘믿음으로’라는 표현이 무려 18번이나 나옵니다. 저들이 행한 모든 행위의 동기가 공통적으로 ‘믿음’이었다는 말입니다.

특히 1-3을 보면 저들이 지켜낸 믿음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리고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러니까 한 마디로 믿음이란 볼 수 없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남은 자들은 바로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히 11:7 이하를 보면 노아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노아는 장차 120년 뒤에 있을 일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고 또 볼 수도 없는 일을 말씀을 통해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준비했습니다.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것도 산 위에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120년 동안이나 지었습니다. 모두가 조롱했습니다. 미쳤다고 했습니다. 자기들은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흔들림 없이 지켜냈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 사이의 3차 중동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인구가 아랍이 1억 6천만이고 이스라엘의 인구는 고작 260여 만이었습니다. 군사력으로나 무엇으로 봐도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전쟁을 이끌었던 모세 다얀이라는 국방장관이 호언장담했습니다. ‘우리는 신무기로 무장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러면서 이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서방 언론이 그 말에 주목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핵무기나 아니면 화학무기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전쟁은 모세 다얀의 장담대로 6일 만에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6일 전쟁’이라는 고유명사가 생길 정도로 이 전쟁은 전쟁사에 길이 남을 전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 그 어떤 신무기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이 모세 다얀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말한 신무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때 모세 다얀이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준비한 신무기는 바로 시 121편 말씀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그렇습니다.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신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남은 자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남은 자가 되려면 이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둘째, 타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왕상을 보면 엘리야 시대 우상숭배가 강요되고 너나 할 것 없이 우상숭배에 타협하던 때 남은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이런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고, 저들과 함께 새로운 구원 역사를 펼칠 것을 명하셨습니다.

왕상 19:1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우상숭배가 극심하던 때에도 우상숭배에 타협하지 않은 사람 7000명이 남아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아합 왕은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한 뒤 본격적으로 우상숭배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당시 북왕국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세라 상도 세웠습니다. 왕실이 앞장서서 우상숭배를 자행했습니다.

왕비 이세벨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상 앞에 절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살기 위해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 7000명이나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생명을 걸고 우상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남은 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새로운 구원 역사의 거룩한 씨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타협’(妥協)이라는 말은 사전을 보면 “어떤 일을 서로 양보하여 협의함”이라고 정의되어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인 우리가 타협을 하려면 우선 우리의 믿음을 양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과 협의하여 서로 합의점을 도출해 가게 됩니다.
이렇게 타협을 하게 되면 한 마디로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는 여전히 믿는 것이라고 자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믿는 것이라고 여기시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이제 비해서 ‘지조’(志操)라는 말은 사전을 보면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 나가는 꿋꿋한 의지 또는 그런 기개”라고 정의되어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인 우리가 믿음의 지조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듯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시험합니다. 이 시험을 잘 이겨야 합니다. 

다음으로 박해를 이겨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는 가운데 핍박도 겪게 되고 또한 박해에도 직면하게 됩니다. 이 때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은 자가 되려면 믿음의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남은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남은 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에 남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교회의 새성전시대에 남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하고, 타협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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