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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믿어라(1) : 주인은 오직 한분! (마 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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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믿어라(1) : 주인은 오직 한분! (마 6:19-24)

구별! - “금한 것과 금하지 않은 것”

마태복음 6장에서는 3개의 주제를 다뤘습니다. 구제, 기도, 금식은 사적인 영역에서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후반부의 19절부터 34절은 세상에 속한 우리 크리스천들이 돈, 소유, 음식, 마실 것, 입을 것, 야망 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금하신 것일까요? 이 부분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존 스토트는 그의 책 [산상수훈]에서, 먼저 예수님께서 금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아주 적절한 분석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첫째로, 소유 자체에 대한 금지는 없다는 것이죠. 성경은 어디에서도 사유재산을 금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만일에 대비한 저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종의 저축인 생명보험 같은 것도 말입니다. 금하기보다는 잠언 6장 6절 이하에 보면 개미가 여름날에 겨울에 필요한 양식을 저장해 놓는 것을 칭찬하고 있죠.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는,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셋째로, 우리는 창조주께서 풍성하게 주신 좋은 것들을 멸시하지 말고 오히려 누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그러므로 재산을 가지는 것도, 미래를 위해 대비하는 것도, 좋으신 창조주의 선물을 누리는 것도 땅에 보물을 쌓아 놓지 말라는 말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금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너희를 위하여” 즉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재물을 쌓아 놓는 것을 금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문제는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따라 늘 논쟁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이기적이라는 기준이 무엇인가?”하는 것이죠.

극단적이 경우에 모든 물질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동기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는 청빈주의가 나왔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축복이기에 그것을 잘 사용하자는 자본주의적 동기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만족할 만한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과연 오늘 이 말씀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물질에 관한 한 어떤 이기적 동기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꿈꾸는 것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죠. 어느 정도의 물질이면 크리스천으로 가장 적절한 것이다! 라고 표시가 되면 좋을 텐데 그런 기준이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죠. 물질의 양에 대한 기준이 아니라 물질의 사용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결국, 우리 인간들은 양적인 욕망에서 만족을 얻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 19~20절 말씀을 보세요.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아무리 물질을 쌓아도 우리의 능력으로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누가복음 12장 20~21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자신의 재산을 쌓아놓고 만족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말씀하십니다.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가장 허무한 것은 아무리 우리가 재물을 쌓아 두어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이 세상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난번에 이집트에 갔을 때 참 인상적인 것이 거대한 피라미드마다 텅텅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기원전 1323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파라오 투탕카멘의 미라와 피라미드만이 1922년 11월 26일에 많은 소장품과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고대의 왕들이 세상을 떠날 때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이 누렸던 것을 무덤으로 가져갔습니다. 힘이 있었던 것만큼 많은 재산을,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살아서부터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금으로 된 의자와 침상, 미라를 싸는 마스크까지 모두 황금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누군가가 도굴해 갔죠.

투탕카멘의 미라는 3개의 관속에 차례로 그리고 마지막 4번째 석관으로 묻혀 있었습니다. 가장 안쪽의 속관은 110.4kg의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투탕카멘은 9세에 왕이 되어 18세에 요절한 사람입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힘과 권력이 약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의 무덤이 그 정도이니 다른 왕들의 무덤이 도굴된 것들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라고 말씀하죠. ‘녹’은 단지 부식시키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해충이나 기생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좀’은 사람들의 옷을 갉아 먹고, 쥐는 저장해 놓은 곡식을 먹으며, 도둑은 집에 들어와 사람들이 보관해 놓은 것을 훔쳐가곤 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안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살충제, 쥐약, 녹 방지, 철저한 보안장치. 그런데 이제는 그 보물이 인플레이션, 평가절하, 경제 불황 등으로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가장 안전하다는 금도 달러도 언제 가치가 없어질지 모르죠. 이제는 전쟁이 일어나면 핵 한 방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 욥은 1장 2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구별된 것에 마음이 간다!

이제 다음 구절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보물을 쌓는 것에 대하여 왜 예수님은 그렇게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셨을까요? 앞부분에서 살펴본 것처럼 물질이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고, 부지런히 일해서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문제는 필요가 욕심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물질은 우리가 필요를 위해서 쓸 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구별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구별’은 ‘거룩’이라는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구별되어야 하는 분이십니다. 구별되어야 우리의 마음이 가고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질을 구별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마음이 물질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라는 말씀은 어느 순간 물질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숭배’가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아주 강력하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돈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삶에서 무언가 중요한 결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삶에서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형성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자녀를 바라보는 시각이 무엇이고, 장래 삶의 비전이 무엇에 근거를 두는지 생각해 보세요.
보물을 구별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은 그것이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죠. 보물을 단순히 물질, 돈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이 가는 것이 보물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지난 번 캐나다 밴쿠버 코스타에서 만난 청년들을 보면 부모의 희생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을 봅니다. 전문직을 가졌던 아버지가 더는 가족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좋은 직장을 버리고 밴쿠버에 와서 트럭을 운전하며 삽니다. 그 가정의 보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예죠.

우리는 보물을 발견하는 순간 덜 가치 있는 것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문제만 그럴까요? 한번 명예욕에 마음이 꽂히면 그것을 이룰 때까지 어떤 일이든지 서슴지 않고 합니다. 세상의 권력뿐 아니라 교회의 교권에서도 말이죠. 평생 쌓아왔던 목회도, 교인들도 그 명예 앞에서 정말 허무하게 무너져 버립니다. 도덕적 가치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명예’라는 보물 앞에서 그 어떤 것도 하찮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나요?
우리가 영원한 것을 발견하는 순간 영원하지 않은 모든 것이 하찮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보물을 안고 영원하지 않은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물질과 명예의 보물을 쌓아온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땅의 첫 순교자였던 토마스 목사는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죽습니다. 그는 20대의 젊은 청춘을 너무도 허무하게 버렸던 사람입니다. 그는 선교사지만, 복음을 한마디도 전하지 못하고 죽은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을 영원한 곳에 쌓았고,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으면서 누군가에게 전한 성경책이, 누군가는 그 성경책을 집을 도배하는 도배지로 썼을지 모르지만, 바로 그 집이 1907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던 교회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인간이란 자신이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모든 것을 걸고, 다른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 본문 20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이 말씀은 “내 손에서 떠나게 하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일종의 절대적인 장소를 말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란 장소가 어디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품 안에’라는 장소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라는 말씀은 “네게 맡겨진 물질을 너의 품을 떠나도록 사용하라.”라는 물질에 대한 주인이 아닌 관리인의 자세를 지니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나에게 맡겨진 것이지, 내가 소유하여 움켜쥘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백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소유는 “내 손을 떠나는 것이다!”라는 것이죠.


진정한 소유!

지난번 밴쿠버 코스타에서 그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손해 본 기쁨]
참 제가 바보같이 손해를 보는 일을 했습니다.
집회가 마치는 날이 토요일 저녁이었기에 한국에 돌아와 주일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주일을 지키는데 어떤 교회에서 저를 초청했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목사님, 그리고 알지 못하는 교회였습니다.
저보다는 젊은 목사님이 참 열심히 목회하는 현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건물이 없어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이제는 극장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였습니다. 교회의 위치도 참 찾기 힘든 곳이라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머리가 나쁜 사람은 교인이 될 수 없는 그런 교회였죠.
사모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정성을 다해서 제자 양육을 시키고 초신자를 세례까지 받게 하면 한국으로 들어가는 그런 교회, 그래서 참 많이 울었답니다.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말이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목회를 하게 된 거죠.
두 번의 설교를 마치고 교회에서 사례비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돈을 제가 받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가 들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목사님의 가정을 위해 쓰라고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오고 가는 동안 저를 안내해준 목사님이 알고 보니 유학생이더군요. 그래서 제가 가진 캐나다 달러를 얼마 되지 않지만 주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이 생각나서 말이죠.
집회를 마치고 며칠을 쉬고 오려는 생각에 돈을 좀 가져갔는데, 코스타를 섬기는 젊은이들이 너무 보기 좋아 가진 돈을 또 털어주고.
그런데 손해 보는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물질은 내가 소유하지 않았어도 내가 소유한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헛되지 않다는 믿음 때문이죠.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소유에 대한 이해와 개념 말입니다.
나 자신이 움켜쥐고 있다고 진정한 소유일까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소유는 내가 사용할 때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재미있죠? 물질이라는 것은 “내가 쓸 때” 내 것이 된다는 것 말입니다. 내가 쓰는 순간 그것이 내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자유라는 관점에서 물질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든 우리에게는 물질을 모으고 쓸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것을 “쓴다.”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만일 우리가 가진 것을 억지로 쓰게 될 경우, 그것은 빼앗기는 것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빼앗기는 것과 주는 것 사이의 구별이 물질에 대한 자유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늘에 쌓아두라!”라는 말은 내 것을 쓰되 자유롭게 그리고 선하게 쓰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헌금을 하라!”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헌금은 그중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나 헌금이 중요한 것은 교회가 그 헌금을 자유로 선하게 쓸 수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함께하고, 선한 곳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물질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교인들에게 헌금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워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건축이나 건물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 받을 때 그 건물을 위해 돈이 들어가는 것은 선한 일이나 교회 건물 자체를 위해 돈이 들어간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이죠.


누가 주인인가?

결론적으로 우리가 결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본문 24절을 보세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적절하게 타협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도 섬기면서 물질을 사랑하는 것이 왜 불가능하냐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종과 종의 주인에 대한 관계를 정확하게 안다면 이 말씀이 이해될 것입니다.

McNeile 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두 고용주를 위해 일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떤 종도 두 주인의 재산이 될 수는 없다. 한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과 전임으로 일하는 것이 종살이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에 나누어 충성을 바치는 사람은 이미 재물에 빠진 것이죠. 하나님은 전적으로 오로지 그만 전념해서만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2장 8절입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니라”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도전은 우리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누구인지 알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우선순위와 해야할 일이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장환 목사님의 예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이 좋고 선정을 베풀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종종 궁궐을 빠져나가서 서민들과 사귀고 대화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한번은 믿음이 좋은 한 과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여왕은 과부와 함께 신앙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에 과부의 믿음에 감동을 한 여왕은 “부인을 찾은 손님 중에 가장 고귀한 분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왕은 과부가 “예수님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을 기대했는데, 전혀 뜻밖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가장 귀한 손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여왕 폐하이십니다. 제 생애 최고의 손님이십니다.” 

그러자 실망한 여왕은 “부인을 찾아 주신 최고의 손님은 예수님이 아닐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과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여왕 폐하, 예수님께서는 결코 손님이 아니십니다. 제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집에 처음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당신의 예수님은 필요할 때 부르는 손님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이십니까?

주인이라는 것은 언제나 주인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누구이냐는 물음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를 키우면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똑똑한 개와 멍청한 개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똑똑한 개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하지만 멍청한 개는 먹을 것을 주면 따라갑니다.
온전한 삶이 아닌, 지금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을 따라갈 때 우리에게는 주인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너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해져야 물질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하여!”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물질을 주신 주님이 보시기에 부끄러움이 없이 물질을 사용해야겠지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물질이 사용되도록 해야겠지요.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하여 누가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물질을 사용할 때, 주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재물’이라는 말은 원어로 ‘돈 신’을 뜻합니다.
돈의 신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돈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고,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지만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또한,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기 전에는 돈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멋진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고,
사람은 ‘나눔의 대상’이고,
물질은 ‘사용의 대상’이라고 말입니다.
행복은 질서가 잘 지켜질 때 찾아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돈을 거의 신처럼 숭배합니다. 돈 따라 직업과 배우자를 선택하고 진로를 결정합니다. 또한, 돈 때문에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강도질합니다. 그처럼 돈만 따라 살면 인간은 질이 나빠집니다.

결국, 신앙은 돈과의 싸움입니다. 즉 내 마음 중심에 “돈을 모실 것인가? 하나님을 모실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기에 돈에서 해방되어야 진짜 신앙이 가능합니다.오늘날 물질 축복을 받았다는 간증은 많지만, 그 물질을 잘 썼다는 간증은 적습니다. 사실 부자가 물질을 잘 쓴다고 입증되기 전에는 그를 존경하기 힘듭니다. 나눔이 없이 많은 소유를 자랑하면 자기가 무엇인가 된 줄 착각하게 해서 오히려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주인이 정해지면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부자가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부자가 되고 나서 우리 삶의 주인이신 그분이 어떻게 쓰기를 원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돈을 다스리는 삶을 살든지, 돈이 주인이 되어 우리가 노예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누구인지가 정해지면, 돈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부자가 되려는 욕망에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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