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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골고다에 이르신 예수님 (막 15: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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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고다에 이르신 예수님 (막 15:21-23)

막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막15: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막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셨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밤새도록 이리저리 끌려 다니셨습니다. 그런 동안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로부터 심한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시는 등 모진 고초도 겪으셨습니다. 

마3:17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가리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 마17:5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예수님이 변화 산에 계실 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은 분명 그의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심한 희롱을 당하시고 모진 고초를 겪으시는데도 가만히 내버려 두셨습니까? 

레24:16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신성 모독하는 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희롱하고 채찍질한 것은 최악의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셨습니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즉시 그들을 멸해야 마땅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당장이라도 땅이 갈라져서, 그들을 삼켜버려야 옳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그와 같이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사53:10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질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속건제물로 드려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상함을 받으시고, 질고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속건제물로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골고다에 이르신 내용입니다. 골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막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관정의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채찍질했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온 군대를 그 곳으로 모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처럼 꾸몄습니다. 왕복으로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왕관으로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엮어 씌웠습니다. 왕의 홀로 갈대를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리게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처럼 꾸민 후에,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희롱하기 위하여, 왕에게 하는 인사를 예수님에게 했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치며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희롱을 다 한 후, 군인들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입혔던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예수님의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예수님을 끌고 나갔습니다. 당시 총독의 관정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었고, 형장인 골고다는 성 밖에 있었습니다. 

히13:11∼12 말씀입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본시 속죄제로 드려지는 제물은 반드시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속죄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곳은 성문 밖이어야 했습니다.  

요19:17 말씀을 보면, 이 때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 나가셨습니다. 이 또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모리아 땅으로 갈 때였습니다.  

창22:6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이삭이 자기의 번제 나무를 졌습니다. 이 때 이삭은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성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via dolorossa”라고 불리는 “고난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신 길을 일컫습니다. 그 길 곳곳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끌려가시다가 걸음을 멈추셨거나, 또는 쓰러지셨다는 표식을 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에, 예수님의 몸은 죄로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에덴 동산에서 살았던 아담의 몸과 같았습니다. 따라서 분명 예수님의 몸은 강건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시기가 벅찼습니다. 

전날 밤 예수님은 단 한숨도 못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면서, 여섯 번이나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시고 가시관에 찔려서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정신적으로 또한 신체적으로 매우 힘드셨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끌려가시다가 때로는 멈추기도 하시며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빌라도의 군인들은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에게만 십자가를 지워서 형장까지 끌고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막15:21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오늘 본문은 “마침”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우연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이 군인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각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유월절이었습니다. 그 날 오후 세 시가 되면, 성전에서는 수많은 유월절 양들이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려질 것입니다. 바로 그 시각에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날 해가 지기 전에 무덤에 장사되셔야 했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금요일, 토요일, 그리고 주일의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죽으신 지 삼 일만에 살아나시리라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표를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한 사람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가 누구였습니까?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그가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성 밖으로 나가고 계셨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21절 하반부 말씀을 읽어봅니다.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당시 로마의 군인들은 식민지 백성을 임의로 동원해서, 그들에게 강제적으로 부역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5:41 말씀입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로마의 군인들은 식민지 백성에게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권한을 빌라도의 군인들이 행사했던 것입니다.  

군인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예수님과 같이 가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웠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눅23:26 말씀을 보면, 그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워서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이삭이 자기의 번제 나무를 졌듯이,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은 앞에서 십자가의 윗부분을 지셨고, 시몬은 뒤에서 십자가의 아랫부분을 졌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함께 졌으니까, 예수님은 한결 힘이 덜 드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강도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백부장의 이름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이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사람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 분명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구레네 사람이라고 불렸습니다. 행2:10 말씀처럼, 구레네는 리비야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구레네는 오늘날 리비야의 수도 트리폴리에 해당합니다. 

시몬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서 리비야의 구레네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잠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빌라도의 군인들에게 붙잡혀서,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졌습니다. 

그 후에 시몬은 자기가 살던 구레네로 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입니다. 행11:20 말씀을 보면, 구레네 교인들 중 몇 사람이 안디옥에 가서 복음 전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행13:1 말씀을 보면, 구레네 사람 루기오가 안디옥 교회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구레네에 교회가 세워지고 또한 그 곳의 많은 사람들이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된 데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역할이 컸다고 여겨집니다.  

뒤에 시몬은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구레네를 떠나 로마로 이주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을 담고 있는 마가복음은 시몬을 가리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는 그와 같은 소개가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알렉산더와 루포를 잘 알았음이 분명합니다. 만일 그들이 시몬의 두 아들을 몰랐다면, 유독 마가복음만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이름을 기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롬16:13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처럼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 시몬의 가족은 로마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 곧 시몬의 아내를 가리켜 자기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시몬의 가족은 헌신적으로 예수님의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졌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 속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압니다.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와 우리의 가족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하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골고다에 이르셨습니다. 

막15: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군인들에게 끌려 가셨습니다. 도중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졌습니다. 눅23:27 말씀을 보면, 이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무리 중에는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에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들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면서 동정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고맙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울어주니, 내가 너희를 잊지 않겠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눅23:28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루살렘의 여자들은 예수님이 불행을 당하셨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실패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골2:15 말씀과 같이,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위하여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13:34에 있는 말씀입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예수님은 몇 번이나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모으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딸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미 은혜의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심판이었습니다. 

눅19:43∼44 말씀입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주후 70년 예수님의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로마의 군인들은 예루살렘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예루살렘의 딸들은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하여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마땅했습니다. 

계속해서 눅23:29 말씀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눈앞에서 자기의 자녀가 무참하게 살육당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녀가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어서 눅23:30 말씀입니다.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고통이 너무도 극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는 것보다 도리어 죽기를 원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로 끌려가시면서, 그를 따라오는 무리에게 마지막으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눅23:31 말씀입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이 때의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마른 나무는 예루살렘을 뜻합니다. 

푸른 나무보다 마른 나무가 불에 더 잘 탑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물며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로마에 반역했습니다. 그러니 로마의 군인들은 그들을 완전히 멸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골고다로 끌려가시면서, 자신을 따라오는 무리에게 마지막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오늘 본문인 막15:22 말씀이 연결됩니다.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쓰던 언어는 아람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로에서 귀한한 후에, 바사 사람들이 쓰던 아람어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아람어로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그 곳의 지형이 사람의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주후 4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을 Vulgate라고 부릅니다. Vulgate는 골고다를 갈보리라고 번역했습니다. 라틴어로는 해골에 해당하는 단어가 갈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람어로는 골고다에서, 라틴어로는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말씀하시지는 않을까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단순히 예수님에게 동정하는 마음을 보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날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와 같이 부르짖을 것입니다. 계6:16 말씀입니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요3:16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와 우리의 가족들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믿어,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모두 다 영생을 얻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막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예수님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몰약은 그 맛이 매우 씁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27:34 말씀을 보면, 그들이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에게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군인들이 죄수들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은 죄수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죄수들을 좀더 용이하게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함이었습니다. 

양손에 못을 박아야 했습니다. 또한 양발을 겹쳐놓고 못을 박아야 했습니다. 철로에 박는 대못과 같이 굵고도 긴 못이었습니다. 이 일을 쉽게 하기 위해서, 군인들은 죄수들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어 그들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마27:34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그것을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군인들이 예수님의 입에 몰약을 탄 포도주를 넣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입 밖으로 뱉어내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막14:25에서 예수님은 다시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18:11 말씀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잔을 온전한 정신으로 마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처음부터 끝까지 몸소 다 겪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곱 마디의 귀중한 말씀을 생생하게 남기실 수 있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골고다에 이르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신 것도, 예수님이 골고다에 이르신 것도, 예수님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지 아니하신 것도 다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만족케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잘 따르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언제나 십자가로 승리하고, 또한 우리와 우리의 가족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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