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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를 위하여 부르신 자들 (레 25:10-12, 갈 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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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하여 부르신 자들 (레 25:10-12, 갈 5:13-15)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휴가의 계절입니다. 이전에는 광복절이 지나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아침저녁으로는 기온이 떨어진다고 했는데 요즘은 더위도 더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바캉스’라는 말은 주로 여름에 피서나 휴양을 위해 떠나는 휴가를 뜻합니다. 몇 날을 노는 날로 보낼 것이 아니라 쉼을 얻고 재충전의 기회가 되어야 진정한 휴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세기에 와서 비로소 놀이가 무엇인가를 알고 여가가 발달하여 본격적으로 바캉스가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고대 전통의 바캉스가 있었습니다. ‘유두절’(流頭節)이란 절기입니다. 복중인 음력 6월 보름이 유두절이었고 ‘소두’(疏頭), ‘수두’(水頭)라고도 하였습니다. ‘소두’란 머리를 감는다는 뜻이고, ‘수두’란 물맞이란 뜻입니다. 일가와 친지가 함께 맑은 시내나 산간폭포로 피서를 가는 날이 유두절입니다. 
  
프랑스인들은 형편없는 요리를 ‘영국요리’라고 부르고, 영국인들은 규모 없이 멋대로 노는 것을 ‘프랑스 휴가’라고 부릅니다. ‘프랑스 휴가’가 되지 않으려면 바캉스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휴가철이 되면 반려동물들을 데려갈 수도 없고, 관리가 힘들므로 버려두고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빈 도시에는 유기동물들이 헤매는 광경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휴가를 위해 은행에서 대출하여 우선 빌린 돈으로 여행을 합니다. 이것을 ‘휴가대출’(vacation loan)이라고 합니다. 휴가를 다녀와서 빌린 돈을 갚느라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이런 휴가 후유증들이 많이 있습니다. 후유증 없는 휴가가 참 마음의 쉼을 주는 것입니다. 
  
바캉스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휴가란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기간이 되어야 하며, 몸과 마음이 쉬는 시간이 되어야 하며, 영혼이 자유를 얻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자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배당하고, 종으로 살고, 억압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급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자유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으로 우리민족에게 해방을 주신 광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해는 광복 68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그런데 남북이 아직도 분단되어 완전한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올해는 한국전쟁 정전 60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반쪽 국가, 세계 유일 분단국가, 구시대의 유물인 이념이 아직도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21세기의 세계 일류국가는 동북아시아의 한국이 분명한데 그 한국은 통일한국일 것입니다. 
  
‘조국찬가’ 1절을 보세요. “동방에 아름다운 대한민국 나의 조국, 반만년 역사 위에 찬란하다 우리문화, 오곡백과 풍성한 금수강산 옥토낙원, 완전통일 이루어 영원한 자유평화, 태극기 휘날리며 벅차게 노래 불러, 자유대한 나의 조국 길이 빛내리라”. 우리나라가 완전 통일을 이루는 자유대한민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1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민족, 우리국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자유자가 되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기를 바랍니다. 

첫째, 자유로 육체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3 상반절에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라고 합니다. 갈라디아교회에 하나님의 특별한 자유의 은혜를 줬더니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사용하였습니다. 자유를 육체를 즐기는데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란 말은 헬라어로 ‘사륵스’인데 이 말은 인간의 부패성과 죄악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육체를 의미하는 다른 단어인 ‘소마’는 거룩하게 변화된 몸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자유를 얻은 다음에 육체를 죄악의 도구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란 버려두면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하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육체로 사는 사람의 가장 큰 잘못은 육체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자신의 것으로 아는 것이 교만입니다. 내 육체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몸을 사용합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자유롭게 사용하고, 심지어 자기 몸을 자살이라고 하는 죽음에 내팽개칩니다. 
  
고린도전서 9:27에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육체를 쳐서 복종하게 하는 자기 단련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인은 어느 정도의 금욕과 절제가 필요합니다. 지난 30년 동안 에이즈로 죽은 성직자가 5백 명이나 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육체를 버려두면 육체의 종이 되는 법입니다. 고행 그 자체는 성경적 성결이나 거룩이 아닙니다. 그러나 육체의 본능을 거룩하게 단련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고행을 필요로 합니다. 
  
사막의 수도사 포에멘에 의하면 수도사는 두 가지만 싫어하면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안락함과 자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수도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거룩함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사회의 성문화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고속열차와 같습니다. 끝없이 제어할 수 속도로 달리고 있습니다. 육체를 너무 헛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고 있고, 스스로 육체의 종의 고랑을 차고 있는 것입니다. 곳곳에서 성추행, 성폭행이 난무하고 있고,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성폭행에 가담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윤리의 위험수위를 이미 넘어 선 듯합니다. 이런 성윤리의 파괴는 사회질서의 붕괴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두 주간 전의 ‘한국남성연대’ 대표의 한강 투신을 보세요. 1억 원을 모으기 위하여 한강에 자기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남자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여성연대’라면 1억 원 정도야 돈도 아닐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보고 있었고, 사진도 찍고 있었고, 심지어 방송 카메라까지 동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사진 찍기에 바빴지 그 사람이 뛰어내리는 것을 막을 시간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현대인들은 자기 몸을 쉽게 던지고 무모한 시도도 서슴치 않습니다. 
  
레위기 19:28에는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고 합니다. 문신은 성경이 금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고이 다루라고 하십니다. 어떤 자료에 보니 전신에 문신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에 완전히 마귀의 모습으로 문신을 하고 혀를 반쪽으로 자른 사람도 있습니다. 몸을 완전히 사탄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인데 사탄의 움막으로 만든 사람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7에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육체의 욕심으로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8에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합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썩어질 것밖에 거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몸을 돌보는 일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일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를 지으시고 지으신 육체를 사람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지으실 때 얼마나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는 고귀한 것입니다.  
  
게리 토마스는 ‘내 몸 사용 안내서’라는 책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몸에 대해서만 청지기로 부름 받았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육체의 청지기입니다. 육체의 관리사입니다. 육체를 잘 관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자유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우리의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전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거룩한 제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와 의지를 줬더니 그 자유를 육체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육체를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유로 사랑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3 하반절에는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합니다. 자유로 종노릇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자유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는 말인데 자유로 종노릇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자유와 종은 서로 상반 됩니다. 어떻게 종이 자유하게 되었는데 또 종노릇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사랑은 서로 종이 되게 하고, 종인 사람을 서로 섬기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이란 말은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라고 번역되어야 옳습니다. 사랑은 서로 섬기게 합니다. 사랑하면 서로 섬기는 사이가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사람을 섬기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섬김이란 기쁜 마음으로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이 되었다는 것은 섬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이 되었다는 것은 맹종하는 것이며, 기쁜 마음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종’이란 억지가 아닌 자유로, 맹종이 아닌 기쁨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종’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당시의 종(doulos)이란 사람이 아닌 물건에 불과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소유권이 있었고,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었으며, 전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종의 신분을 스스로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종’, 나아가 ‘모든 사람의 종’이라고 자처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9:19에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사랑으로 종이 되고, 섬김으로 종이 되고, 화평으로 종이 되고, 이미 자유하였으니 얼마든지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유의지’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이성의 한 기능을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루터는 ‘노예의지’를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로우나 해방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자유롭게 행할 수는 없습니다.

의지는 자유로우나 매여 있어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사람들은 노예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자유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이후에는 자유의지가 상실되고 인간의 의지는 노예의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죄에 매인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선을 행하는 자유를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죄의 종인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자가 되면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자들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상실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의지가 회복됩니다. 인간은 새로운 의지로 기꺼이 사랑의 종이 됩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참 좋은 복음성가의 가사입니다.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정말 영이 자유로워지고 기뻐 노래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매이면 자유로운 사랑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8:6에는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구속당한 것을 풀어주기를 좋아하십니다. 지배당하고 있는 것을 풀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빼앗긴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자유하게 하며”라는 말은 ‘하페쉼’이란 말인데 노예로 팔려간 자가 7년 후에 안식년이 되면 자유를 얻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멍에란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기 위하여 우마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일컫습니다. 그런데 억압이나 혹은 강제적인 노동을 상징할 때도 이 말을 씁니다. 멍에는 매고 있는 자체로 고통입니다. 노예란 신분이 태어날 때부터 벗을 수 없는 것이 멍에입니다. 노예의 신분을 가진 자가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노예의 신분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멍에가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멍에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나와 함께 멍에를 매자”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매므로 멍에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매면 더 이상 멍에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11:29-30에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멍에가 자유로 바뀌는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누구와 묶여 있는가에 따라 자유이기도 하고 멍에이기도 합니다. 마귀와 함께 묶여 있으면 멍에이고, 주님과 함께 묶여 있으면 자유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멍에가 아니라 자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란 자유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멍에를 맨 자가 아니라 종이지만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자입니다. 
  
‘자유’란 말은 헬라어로 ‘엘류테리아’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 40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제법 많이 쓰인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중요한 것은 자유함이 없는 구약과 비교하여 신약에서는 자유함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은 좋은 것이나 자유를 주지 못하고 죄를 알게 하고, 결국 죽게 합니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를 얻게 하고 결국 살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3:17에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하는 자유함이 있는 것이 신약입니다.  
  
어느 무신론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신의 존재를 가정하면 나의 행동이 제한을 받는다. 내가 자유하기 위해서는 신이 죽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다가 자기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함이 있다는 것을 아는 우리가 행복합니다. 이 영혼의 자유함을 늘 소유하고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1년에 ‘4대 자유’를 발표하였습니다. 첫째는 어디서나 말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둘째는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셋째는 어디서나 결핍으로부터 해방 받을 자유입니다. 넷째는 어디서나 공포로부터 보장받을 자유입니다. 이런 자유만 가져도 훌륭한 양질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자유가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어야 비로소 온전한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어야 인간은 온전한 자유함에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를 위하여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이 은혜의 자유를 선포하는 주님 안에서 자유하는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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