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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라(6) : 용서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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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6) : 용서 (마 6:9-13)

: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고 부르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여 지고, 그 나라가 확장되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를 드리는 우리는 천사가 아닙니다. 먹어야 할 양식, 빵이 필요한 인간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술에 취하여 거리에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짓을 넉 자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를 냈습니다. 그리고 친절하게 마지막 글자가 ‘가’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 󰡓 󰡓 가)

선생님이 기대한 답은 ‘고성방가’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답이 제 각각이었습니다. ‘고음불가’, ‘이럴수가’, ‘미친건가’. 그런데 한 아이의 답에 뒤집어졌답니다. 그것은 ‘아빠인가’였습니다.

‘고음불가’는 높은 음을 못내는 것으로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유행하였습니다. 아마도 텔레비전을 많이 본 아이의 답이었을 것입니다. ‘이럴수가’는 이럴 수는 없다는 탄식의 말입니다. 집에서 도덕 교육을 많이 받은 아이의 답이었을 것입니다. ‘미친건가’는 남의 일이라고 좀 심하게 하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아이의 답입니다. 그런데 ‘아빠인가’는 아빠가 그렇게 하는 것을 자주 보고 들은 아이의 답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보고 들은 대로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보다 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역시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누어야 할 내용인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용서받은 기쁨이 있다면 또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용서받은 감격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 또한 자신이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감격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먼저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는 먼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이름’이 중요한데, 우리는 ‘양식’이 필요한 인간이라는 가르침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두 번째로 ‘그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사람을 위해서는 ‘용서’에 대한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우주 전체가 그 나라인데 우리에게는 울고 웃는 서로의 관계가 전부일 수 있다는 가르침도 배우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배워야 할 내용은 용서를 위한 기도입니다.

  
V. 용서
  
일용할 양식이 육체적인 삶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용서는 정신적인 삶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에 대하여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12절 말씀입니다.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우리의 용서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사하다[ajfivhmi/압히에미]’는 말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입니다. 본래 ‘보내다’, ‘쫓아내다’는 말입니다. 죄의 흔적으로써 남은 상처와 죄책감과 벌과 같은 것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것입니다. 

1. 사람에게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람에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죄의 용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말로 우리는 빵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의 친밀감도 필요합니다. 사람과 사람을 가로 막고 있는 담을 헐어버리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제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실수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죄라는 말이 없다면 용서라는 말도 역시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죄를 짓고 실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서 3:2 말씀입니다.

(약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는 자신이 실수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다윗을 비롯하며 실수하였다는 알고 있습니다.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일 터인데, 실수가 없는 온전한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실수할 수 있는 ‘보통 인간’입니다. “보통 인간입니다!”

잘못하는 사람들은 잘못의 결과로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2) 사람들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트라우마(trauma)’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트라우마는 의학용어로 ‘외상성 신경증’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심한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겪은 뒤에 나타나는 정신적 질병을 가리킵니다.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을 겪은 뒤에 드러나는 마음의 상처입니다. 이 트라우마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 나오는 누가복음 10:34 말씀입니다.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제사장과 레위사람이 강도 만난 같은 유대인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원수같이 지내던 사마리아 사람이 오히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여기 상처라는 말이 바로 헬라어로 ‘트라우마’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개나 돼지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 오히려 육체의 상처를 싸매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이웃 사랑의 모습인 용서입니다. 사람은 육체의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 더 나가서는 영적인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처를 그냥 두고 아파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3) 사람에게는 온전한 회복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즐기려는 사람도 있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으로 바람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고통이라면 즐겁게 참고 견디려는 자세가 있어야 할 뿐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상처가 치료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회복도 기다립니다. 베드로후서 3:14 말씀입니다. 

(벧후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장차 하나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땅에서 이뤄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실수할 수 있고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실수로 생긴 상처 때문에 또 아파합니다. 하지만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저 멀리 바다 가운데 외로운 섬에서 혼자서 사는 사람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 얽히고설킨 삶의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상처를 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용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에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12절 말씀입니다.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서 먼저 번역된 것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가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여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사람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합니다.

용서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깊은 상처를 그냥 두면 곪아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배워야 할 당연한 내용이 있습니다.

1)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의 첫 번째 차원은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실수한 것을 내가 용서하여야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여야 할 대상은 바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8:22 말씀입니다.

(마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을 세 번까지 용서하여 주면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 번씩이나 용서하여 주었는데도 또 잘못하면 그 다음에는 용서해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랑스럽게 형제의 죄를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겠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 비하여 갑절이나 더 용서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용서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용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순종하여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용서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용서가 필요합니다. 

2)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용서받아야 합니다.

용서의 두 번째 차원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또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25 말씀입니다.

(마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사화하다[eujnoevw/유노에오]’는 말은 ‘화해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화해는 용서를 비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를 고발하려는 사람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용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면 문제가 심각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완전무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이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자신이 다른 사람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행복은 그만큼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적극적으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존심 굽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일을 점점 더 꼬이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 있고, 그래서 용서를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가족에게 실수하고 가족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나치면 그것은 상처를 키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과 별도로 사람에게 용서 받아야 할 일은 반드시 사람에게 용서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용서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내용은 용서의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3)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합니다.

용서의 세 번째 차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용서받았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한 잘못이 동시에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경우들이 아주 많습니다. 사무엘하 12:13 말씀입니다.

(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다윗의 가장 큰 실수이자,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그의 잘못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일입니다. 이것은 다윗이라는 사람이 우리아라는 사람에게 범한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우리아에게 죄를 지은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께도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한 잘못이 하나님께도 죄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만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헤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족과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때려서 다치게 하는 폭행이 개인 간에 서로 사과하는 것으로 끝나는 민사문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폭행은 국가의 공공질서를 어지럽힌 형사문제가 됩니다. 사람에게 한 잘못이 하나님께도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가 된다면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실수할 수 있고 죄를 짓는 우리는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울러 하나님께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어야 할 것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용서하고 용서하는 사람,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절대조건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12절 말씀입니다.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오늘 말씀에서 매우 예민하고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공동]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반드시 용서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반드시 용서하여야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 핑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여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전제조건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용서라는 행위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은혜에 의한 무조건적인 용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지불할 수 있는 값은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값없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3:24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그 어떤 종교나 철학이나 행위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가 십자가에서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죄의 값을 치르셨기에 우리가 더 치러야 할 값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때문에 다시 찾은 생명이요, 하나님께 받은 선물입니다. 은혜로 받은 용서와 구원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가 용서해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다른 용서입니다.

2) 용서해야 받는 조건적 용서가 있습니다.

성경은 무조건적인 용서뿐만 아니라 조건적인 용서에 대하여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15 말씀입니다.

(마 6: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새번역]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하여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죄가 같은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가 하면 실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죄[aJmartiva/하말티아](마1:21)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갚아야 할 부채와 같은 죄[ojfeivlhma/옵헤일레마](:11)가 있습니다. 

갚아야 할 것을 갚지 못하면 그 짐에 눌려 지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 나도 탕감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가하면 옆으로 미끄러지는 고의가 아닌 실수[paravptwma/파랍토마](6:15,16)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실수도 용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채와 실수에 대한 용서는 조건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하지 않음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용서함으로 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3) 우리는 용서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다고 해서 은혜로 받은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빌립보서 2:4 말씀입니다.

(빌 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돌보고 사랑함으로 자신에게 기쁨을 주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바울을 기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성도들이 충만히 누리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은혜로 받은 구원의 기쁨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인가하는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얻은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용서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쉬운 일이라면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까? 인간의 타락한 양심은 내가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굳센 믿음(?)을 가지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는 용서함으로 용서받은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은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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