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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2) : 고통스런 과거 기억 치유 (시 3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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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2) : 고통스런 과거 기억 치유 (시 32:1-11)

신문을 보다 보면 소설 같은 기사들이 종종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신문에 나온 소설같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1988년 11월 토요일 늦은 밤 서울 영등포 기차역에서 의사인 김모씨가 충북 충주로 갈 표를 못 구했답니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정모 여인이 말을 걸어왔답니다. "택시로 합승해 가는 건 어떠세요?"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택시에 탔다고 합니다. 

김씨는 대학병원 정형외과 레지던트였답니다. 키 180㎝에 영화배우처럼 서구적으로 생겼답니다. 정 여인은 키 164㎝에 이목구비 또렷한 여자로 필리핀 유학을 마친 뒤 1대 1 영어 레슨을 하는 프리랜서였답니다. 

충주에 도착한 둘은 연락처를 주고받은 후 헤어졌답니다. 만남은 서울에서 금세 이어졌고 연락은 매번 정여인이 먼저 했답니다. 두 사람은 만나 교제를 하였고 성적 관계를 갖는 사이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김씨는 이미 결혼을 하여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재회 한 달 만에 이별을 통보했답니다. 

그러자 정 여인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자"고 했답니다. 나가 보니 정여인은 김씨의 주민등록등본을 내밀었답니다. 그러면서 "왜 유부남이라고 밝히지 않았느냐. 불륜 사실을 아내와 가족들뿐 아니라 병원에도 폭로하겠다"고 했답니다. 김씨는 합의금 명목으로 1000만원을 정씨에게 건넸답니다. 당시 1000만원이면 지금의 5000만~60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 후 정여인은 더 이상 김씨를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씨 정형외과 의사로 개인병원을 차려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 생활을 하고 있었답니다. 정여인은 미혼으로 회당 몇십만원에서 100만원까지 받으며 호텔이나 오피스텔에서 1대1 영어 수업을 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자 필리핀에서 배운 영어는 더 이상 인기를 끌지 못했답니다. 정여인은 인터넷 인물 검색으로 손쉽게 김원장의 병원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정여인은 2005년 11월 14일, 김씨에게 17년 만에 전화를 걸었답니다. "오랜만입니다." 

그 목소리를 듣고 김원장은 소름이 쫙 돋았답니다. 병원 근처에서 만나자고 했답니다. 우리 성도님이 과거 이런 사건이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나겠습니까? 만나지 않겠습니까? 미련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미련 없이 떠나야 하겠습니까? 정형외과 원장은 정여인을 만났답니다. 그러자 정여인은 "당신에게 상처받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며 "1000만원만 빌려달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17년 전에 스캔들이 있었잖아요"라고도 했답니다. 

겁먹은 원장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돈을 줬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씨는 김씨를 1년마다 찾았다고 합니다.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협박했답니다. 요구 금액도 점점 높아졌답니다. 원장은 매번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돈을 주었답니다. 각서를 4장이나 받았지만 이미 1억1300만원을 뜯겼다고 합니다. 21년 전에 잘못된 만남이 21년 후에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다시 찾아와 5000만원만 주면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하였답니다. 우리 성도님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부분 누구나 하나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런 과거들이 있습니다. 가슴 깊숙한 곳에 상처 하나쯤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살이 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고통스런 과거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인데 자신만은 그 일을 기억하면 그 고통스런 과거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누구에게 그 사실이 알려질까봐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문제가 드러난다고 해도 문제 삼지 않는데 자신 스스로 속단하며 두려워 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지나간 과거는 실제하는 시간이 아니라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시간일 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치유하고 십자가 붙들고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사상가 존 러스킨에게 값비싼 손수건을 내보이며 말했답니다. "이 손수건은 최고급 실크로 만든 것인데 누군가가 여기에 잉크를 쏟아 버렸어요. 손수건이 얼룩져 쓸모없게 되어 버렸어요." 그러자 러스킨이 부인에게 말했답니다. "부인, 그 손수건을 며칠만 제게 빌려 주십시오."

미술에도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던 러스킨은 손수건의 잉크 자국을 이용해 아름다운 나무와 숲과 새의 모양을 그려 넣은 뒤 그 부인에게 돌려주었답니다. 손수건은 오히려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는 손수건이 되었답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과 상처, 얼룩이 있다면 그것을 지을 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 얼룩들 때문에 더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그 얼룩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면 얼마든지 회복된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치유받고 회복되어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치유되고 회복되려면 하나님께 자복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고통스런 과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아픔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어떤 여인은 젊을 때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그 고통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고통을 가지고 살다가 결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부부생활을 거절합니다. 남편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접근을 하면 자신을 성폭행 사람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 때 일이 선명하게 기억되고 남편이 그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트라우마(trauma)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젊은 날 받은 신체적인 상처는 시간 지나면어 아물었는데 정신적 충격이 심리적으로 깊숙하게 상처를 주어 아직도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개에게 물려 개만 옆에 있으면 불안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얼어붙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동차 사고로 운전대를 잡지 못하고 비행기 사고로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만 되면 불안해 지고 착각 또는 환각현상이 일어나 과민반응하게 됩니다. 

현재와 미래가 과거의 포로가 된 경우입니다. 과거 저지른 실수나 죄로 인하여 늘 우울하게 살고, 기쁨을 잃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며 열등감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 삶의 경력으로 움츠리며 도피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서울 종암동에서 딸을 목졸라 죽인 어머니가 구속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딸이 집을 나가 남자친구와 밤을 보내고 돌아 온 것입니다. 사흘간 가출했다 돌아 왔는데 어머니가 딸에게 “어디서 무얼 했느냐”며 따졌답니다. 그러자 딸이 그동안 남자친구와 밤을 지냈다고 하자 순간적으로 흥분해 넥타이로 딸의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고 합니다. 

경찰에서 왜 그렇게 했냐고 하자 “지금 남편을 만날 때 순결하지 못한 몸으로 만나 항상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오면서 딸만큼은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키웠는데 말을 듣지 않아 순간적으로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순결치 못한 고통스런 자신의 과거의 삶이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를 노예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과거의 죄 때문에, 과거의 아픈 경험 때문에, 이혼이나 가정 파탄, 경제적 실패,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과거의 노예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다윗을 보십시오. 왕이 되어 이웃집 여인 밧세바를 강제로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죄의식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왕이 그 정도 한 것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라며 적당히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는 양심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 과거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살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고통으로 육신의 질병이 찾아 온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크고 부드러운 손인데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손이 아니라 짓누르는 손이 된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압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얼어붙는 것입니다. 요즈음 용어로 하면 교감신경과 부교감 신경에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호르몬 작용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즈음 병원에서는 호르몬 치료를 하지만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운 과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해결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로 나타난다는 것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근심의 불이 되어 심령을 여름 가뭄같이 메마르게 합니다. 양심의 고뇌로 하루 종일 신음하게 합니다. 육체적 질병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상담소를 찾아가는 것보다, 정신병원을 찾아 가는 것보다 하나님을 찾아 갑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무엇을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허물을 주님께 자복합니다. 죄를 주님께 아룁니다. 마음 속 깊이 있는 죄악을 숨기지 않고 다 드러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어떻게 해 주십니까? 곧 죄악을 사하여 주십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과거의 어떤 죄가 있더라도 우리 하나님께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 죄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인간이 과거의 죄로 말미암은 죄의식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는 것뿐입니다. 다른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회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숨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외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포장하고 미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다 털어 놓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통스런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지혜이고, 행복에 이르는 지혜입니다. 

사죄받은 축복에 대하여 다윗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허물을 사함받고 죄가 가리워진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정죄를 당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허물을 사해 주십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해주지 않고 정죄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매장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만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지 않고 가리워 주십니다. 사람은 과거를 드러내며 체면을 손상시키고, 명예를 훼손시키고, 위선자라고 낙인찍어 상종하려하지 않습니다. 

요즈음 어느 트로트 가수의 가정사를 신문들이 다루는 것을 보십시오. 잘 나가던 연애인도 어느날 성추문이 생기면 완전히 매장당합니다. 그 과거를 기억하고 부끄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고 가려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두 번이나 자신의 부인을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을 용서해 주시고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간 야곱을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살인하고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를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을 지라도 우리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 43:25)”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8:12)”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님들은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님과 저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회복되면 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오늘을 축복으로 누리고 미래를 기대를 가지고 희망과 설렘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회복되었으면 지속하기 위해 회복시켜주신 하나님을 간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복하고 용서받았다고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이 완전히 살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기억이 있다고 할지라도 용서받은 사람은 그 과거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과거의 아픔이 현재의 나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고 그것이 올무가 되어 복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이 현재를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문제가 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가 아주 깊습니다.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기억의 창고에서 뛰어 나와 우리를 괴롭히고 올무에 잡으려고 합니다. 사단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전 경찰대 표창원 교수가 국정원 선거 개입과 NLL사건 대하여 쓴 소리를 한 것을 보았습니다. 국정원 사건은 정보를 보호해야 할 기관이 오히려 기밀을 폭로했다며 '21세기형 3․15부정선거이고, 워터게이트 사건을 능가하며, '메카시즘의 광풍'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금방 신문에 표창원원 교수가 논문 표절을 하였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죄많은 네가 그런 말 할 수 있느냐 입 다물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가 루터가 중세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면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였답니다. 어느 날 환상으로 마귀를 보았습니다. 마귀는 루터가 지은 많은 죄들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루터에게 보이며 말했습니다. "네가 이렇게 많은 죄를 짓고도 무슨 성직자며, 또 종교개혁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냐?" 루터는 마귀에게 말했답니다. "그것들은 내가 지은 죄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벌써 다 용서받은 것들이다. 그 따위로 날 공격할 수 없다. 마귀야 물러가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혼한 것이 뭐, 중독자가 뭐, 가난한 것이 뭐, 간음한 것이 뭐, 네 자식도 잘 못 가르치는 것이 뭐, 능력도 없는 것이 뭐, 실패한 것이 뭐, 멍청한 것이 뭐...”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의 과거를 붙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을 보십시오.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다윗이 이제까지 말한 모든 내용을 말합니다. 회개함으로 용서받고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쓰라린 경험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경건한 자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성도를 말합니다. 교훈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간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이 간증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뭐라고 교훈하는 것입니까? 주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 주께 나와 회개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도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고통으로 쓰라린 경험을 하고 있을 때, 회개해야 할 때,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었을 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면 어떠한 재앙이나 환난도 과거의 죄로 인하여 그를 괴롭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겠다고 합니다. 내는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문맥으로 볼 때 다윗입니다. 네는 백성들입니다. 성도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가르쳐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교훈하겠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혹독한 고통과 자백으로 인한 사죄의 은총을 누구보다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닫고 나서 자신의 어린 아이들을 보는 듯한 마음으로 성도들의 삶을 주목하면서 그들이 한 때 자신과 같은 어리석은 길로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겠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노새는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입니다. 길들인 가축임에도 불구하고 고삐나 채찍 같은 강제적인 구속력이 없이는 순순히 끌려가지 않아 미련하고 완고한 짐승으로 비유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회개치 않는 완고한 인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죄를 회개할 줄 모르는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죄를 회개하고 사죄를 받은 의인에게는 은혜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은신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피난처가 되고 방호물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비난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방어해 주시고 숨겨 주십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나의 보호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변에 승리의 환호성을 외칠 수 있는 조건들을 풍성하게 해 주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고통스런 과거가 있다면 숨기지 말고 여호와를 통하여 치유된 것을 간증하는 삶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은신처입니다. 하나님이 환난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노래들로 나를 둘러싸십니다. 

얼마 전 가수 송대관씨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사업하다 망하여 수백 억대 빚을 지고 고소도 당했다고 합니다. 2백억 원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개인회생 신청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내가 불법 해외원정 도박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이일로 자신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치유는 기도 밖에 없다고 당당하게 간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해 연말 찬양앨범을 냈다고 합니다. 3년 전에 주님과 약속을 하였는데 29곡을 3천 번 불러 진정성 있고 은혜롭게 담았다고 합니다. 

그가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교회를 찾아가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말이면 여러 교회에 가서 찬양과 간증을 한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믿음을 전파하는 일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예전에는 찬송가를 입으로만 불렀는데 지금은 가슴으로 불러요.” 

그는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 경험을 간증으로 밝히며 “나는 송대관, 쨍하고 해 뜰 날이 다시 찾아올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진짜 해 뜰 날이 찾아 올 것이라고 기대를 가지고 회복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과거일지라도 그것이 발목을 잡아서는 안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자신의 과거 때문에 인생을 포기했습니까? 과거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생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만나 새로운 삶을 살면서 기독교의 초석을 놓고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쓰라린 과거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고통스런 과거를 숨기고 움추러드는 자가 아니라 그 고통의 현장에서 만나 치유시킨 하나님을 간증하는 자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3.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회복되었으면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통스런 과거, 부끄러운 과거, 억울한 과거, 슬픈 과거가 있는 사람의 대표적인 정서적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웃음이 없는 것입니다. '뒤센의 미소'가 없는 것 입이다. 우울합니다. 다른 사람들 틈에 웃을 때도 썩은 미소를 짓습니다. 웃음의 정서가 메말라 바닥이 나 있습니다. 기쁨이 있어야 삶은 기름지고 풍요롭습니다. 

하커와 켈크너라는 사람이 30년 동안 대학생들 141명을 조사를 해 보았답니다. 이들 중 50명의 사람은 눈꼬리의 근육이 수축되어 눈이 반달 모양이 되는 환한 뒤센의 미소를 짓고 있었답니다. 나머지는 카메라를 보며 인위적 미소를 짓고 있었답니다. 이 사진의 주인공들이 각각 27세, 43세, 52세 되는 해에 조사를 해 보니까 환한 긍정적 미소를 지었던 '뒤센 미소 집단'은 '인위적 미소 집단'에 비해 훨씬 더 건강하였으며 병원에 간 횟수도 적었고 생존률도 높았답니다. 결혼 생활만족도도 높았으며 이혼율은 낮았답니다. 평균 소득수준도 높았답니다. 같은 해에 졸업한 여대생 중에서 뒤센의 미소를 지었던 여성들이 훗날 더 좋은 삶을 살고 있었답니다. 

우리나라 말에 웃어야 복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간증하며 교훈하였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런 과거로부터 해방된 다윗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까?

“의인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그리고 마음이 정직한 너희 모두는 기쁨의 소리를 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고통스런 과거를 치유받고 회복되어야 할 끝점이 어디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으로 우리는 회복되어야 합니다. 돈으로 기뻐하고, 명예로 기뻐하고, 권력으로 기뻐하고, 사업 성공으로, 자식 잘 되는 것으로, 성취로 기뻐하는데서 끝나지 말고 여호와를 기뻐하는 삶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고 수치스럽고, 말하기 싫은 아픔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그 과정이 고통과 슬픔으로 끝나지 않고 그곳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통해 기뻐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처럼 우리도 얼마든지 여호와의 구원만으로도 기뻐하고 살 수 있습니다. 

과거는 실체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과 반응의 문제입니다. 사건보다 중요한 것이 해석이고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반응입니다. 

요셉은 아픈 과거의 기억으로 망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상처를 준 그의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사울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이고 브닌나가 있었기 때문에 한나가 기도의 여인이 된 것입니다. 아우성 치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더욱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고통스런 과거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경, 클라라 바턴(미국 간호사로서 1882년 미국 적십자사 창립), 헬렌 켈러, 마하트마 간디, 테레사 수녀,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위대한 지도자 3백 명을 분석해본 결과 그들 중 25%는 심각한 심리적 장애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 중 50%는 유년 시절에 학대를 받았거나 빈곤한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닐 루덴스타인의 아버지는 교도소 경비원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식당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종업원이었답니다. 그런데 닐 루덴스타인 박사는 하버드 대학의 26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시작했는냐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어디에 서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진정한 기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으로 여호와를 피하고 외면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인자를 베풀어 주시고, 은신처가 되어 주시고, 환난 날에 보호하시는, 범람한 홍수를 미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는 삶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죄의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보호의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도의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문에서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주는 코메디언 정선희 심경고백을 보았습니다. 남편 고 안재환씨의 자살 이후 어떤 사람들은 "'뻔뻔하게 웃고 있네'라고 비난하였답니다. 루머에 시달리면 기자들이 집앞에 서른 명씩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어차피 먹을 욕 나가서 먹자'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기자들과 만나 ‘좋은 세월로 우리가 추억으로 만들면서 덮자'고 말했답니다. 앞으로 만들어나갈 좋은 일로 그 상처를 덮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과거의 상처에 지나치게 얽매여 현재 누릴 수 있는 것을 못 본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당히 신앙적인 말입니다.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기쁨을 가장 먼저 말씀하시면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로 말미암아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입이 웃으면 인생이 웃습니다. 눈이 웃으면 얼굴이 웃습니다. 마음이 웃으면 세포가 춤을 춥니다. 내가 웃어야 거울도 웃는 것입니다. 눈이 웃으면 뇌가 웃고, 뇌가 웃으면 인생이 웃습니다. 웃을 일 없다고 슬프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웃을 일 없어도 웃으면 기뻐할 일이 생깁니다. 내가 웃으면 거울도 웃습니다. 웃으면 인생은 밝아집니다. 웃으면 행복이 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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