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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도고 (창 18: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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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도고 (창 18:20-26)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늘에서 온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분은 예수님이시고 두 분은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여호와라고 부른 이유는 성육신하기 이전에 아직 예수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 사람은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용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때가 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에 관영했던 죄악의 현장을 검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창세기 18장 22절을 보면 세 사람 중에서 두 천사는 소돔으로 가고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두 천사가 소돔으로 간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창 18:20~21). 소돔과 고모라에 죄악이 심히 중한 것을 알고 천사들이 와서 현장을 검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소돔을 심판하려 하신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소돔에는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도고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도고기도(intercession)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중보기도(mediation)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할 때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도고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그 이후로 나오는 모든 도고기도의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도고기도를 살펴봄으로 우리의 도고기도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Ⅰ. 도고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자는 누구인가? 
  
도고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고기도는 하나님의 친구가 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7). 

하나님은 성경에서 세 번이나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벗 아브라함” (대하 20:7). 

“나의 벗 아브라함” (사 41:8).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 2:2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친구의 특징은 서로 친하게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하시고자 하는 일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돔을 심판하려고 하신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을 건져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친구가 되었을 때 교제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진정한 영적 교제의 두 가지 필수 요소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기 원하는 사람은 말씀과 기도에 점점 더 헌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더 가까이 해야 되고 기도를 더 친밀하게 해야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 18:1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친구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로 택하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만 택하여 친구로 삼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5).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들은 진리를 제자들이 다 알게 하시고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친구이자 하나님의 친구인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가 없다고 해서 외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과 친구여도 얼마나 자랑하고 다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친구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였고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 1:21~22). 

성부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죗값을 대신 갚아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우리는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과 친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 가지의 복을 받습니다. 사죄, 칭의, 화친, 즉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얻으며 하나님과 친구가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짖고 덤비는 개는 어떻게 됩니까? 가죽으로 끈을 만들어 쇠기둥에 묶어놓고 그것도 부족해서 쇠창살로 만들어진 집에 가둬놓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물거나 짖지 못하게 입을 묶어놓고 밥 먹을 때만 풀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오면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개는 사랑을 받으며 사람과 함께 집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여동생 집에 개가 있었습니다. 저는 개털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 개를 싫어했는데 여동생의 집에서는 그 개가 아들처럼 대접을 받았습니다. 개가 학교도 다니고 주인이 휴가를 가면 호텔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암에 걸리니까 몇천 달러가 드는 수술도 받고 죽고 나서는 비싸게 장례도 치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개 팔자가 저보다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대적하는 개는 가둬놓지만 반기는 개는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과 하나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욕하면 죄와 형벌과 심판이라는 감옥에 영영토록 갇혀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로 보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간구하는 도고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 믿지 않는 친척들 그리고 믿지 않는 동족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이 사실을 미리 알려주신 줄로 믿습니다. 도고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가 하는 것입니다. 


Ⅱ. 소돔은 왜 아브라함의 도고기도가 필요했는가? 

소돔에 특별한 도고기도가 필요했던 이유는 소돔에 유명한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동성연애입니다. 다른 죄도 많았지만 동성연애로 인해 하나님이 유황불비의 심판을 내리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셔서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도고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창 18:20).

 죄는 은밀하게 지어도 숨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우인 아벨을 죽이자 하나님이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모른 척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 4:10). 

아벨의 핏소리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를 은밀하게 숨기려고 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하나님께 소리를 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소리를 지를 때 그 소리를 덮을 수 있는 소리를 원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죄의 소리를 덮어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2:24). 

예수 그리스도의 피도 말하는 소리를 가졌습니다. “하나님, 나를 믿는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소서. 내가 그를 위하여 대신 몸을 버리고 피를 흘렸으니 이 사람의 죄를 묻지 말아 주시옵소서.” 아벨의 피는 심판을 요구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더 낫게 말하는 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핏소리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죄의 소리를 덮어버릴 수 있는 소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는 죄의 소리가 올라갑니까? 용서의 소리가 올라갑니까? 죄의 소리가 올라가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실 때 이런 선고를 듣게 될 것입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 

죄의 소리가 계속 올라가고 있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영히 타는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4).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는 죄의 소리를 잠잠케 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는 인간이 자기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는 인간이 의를 얻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길이 결코 없습니다. 여러분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내가 무슨 복을 받았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영생의 복 이상 무슨 복을 더 주셔야 됩니까? 


Ⅲ. 아브라함의 도고기도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아브라함의 기도는 첫째, 담대한 기도였습니다. 여호와의 앞에 서서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창 18:22~23).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서서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얼굴 앞에 서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이 친절해 보여야 됩니다. 불친절해 보이고 험악해 보이는 사람 앞에는 서거나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서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고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이렇게 담대히 기도한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기도는 논리적인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을 거의 꾸짖듯이 기도합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5). 

하나님이 소돔에 있는 악인을 심판하는 것은 말릴 수도 없고 말릴 권리도 없지만 악인들 사이에 끼어있는 의인을 고려하지 않고 같이 죽여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논리적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강하게 나온 이유는 소돔에 자신의 조카 롯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도 인정한 것처럼 롯은 의인이었습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벧후 2:7). 

그러니까 소돔이 망하면 자신의 조카도 죽을 것인데 악인과 의인을 함께 멸하심이 가하냐고 논리적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기도는 아무리 오래 해도 소용없습니다. 말씀의 약속이 있는 논리적인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른이라도 아이들이 논리적으로 나오면 꼼짝 못합니다. 할아버지라도 다섯 살 된 손자가 지난주에 고기 사준다고 약속해놓고 왜 안 사주냐고 물어보면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옳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논리적이면서도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창 18:27). 

자신을 티끌이라고 하면서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기도는 끈질긴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의인 50명이 있으면 온 지경을 다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요단들에는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 이렇게 다섯 개의 도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인 50명이 있으면 다섯 개의 성 모두를 용서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50명은 많으니까 45명으로 줄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45명으로 줄여주시니까 이번엔 또 40명으로 줄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30명, 20명 결국 10명까지로 줄였습니다. 하나님과 여섯 번이나 협상을 한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장사를 했으면 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끈질긴 기도를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을 야단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눅 18:1).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 중에 돈도 없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과부가 어떤 사건 때문에 억울해하며 판사에게 가서 원한을 갚아달라고 하는데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계속해서 찾아가 하소연하니까 그 판사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도 모르고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지 않지만 저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내가 귀찮아서 못살겠다.” 그래서 과부의 간구를 들어주었다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되 끈질기게 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또한 조그만 것이 아니라 큰 것을 구하는 기도를 좋아합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엡 3:20). 

넷째, 아브라함의 기도는 열매 맺는 기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롯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롯의 두 딸도 구원받았습니다. 롯의 부인만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섯 성을 멸하시는 중에 소알은 멸하지 않았습니다. 소돔으로부터 빠져나온 롯과 두 딸들을 소알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창 19:29). 

아브라함의 기도는 롯을 살리는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아브라함의 기도는 사실상 하나님이 인도하신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신다는 것도 미리 알게 하셨고 아브라함 앞에 서서 기도하는 것도 다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들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응답하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 

오늘 하나님 말씀은 의인 50명이 아닌 10명만 있어도 온 지경을 용서하시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부패하고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기에 합당한 나라라 할지라도 대한민국에는 새벽마다 기도하는 수백만의 성도들이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은 나라를 위해서 도고기도하고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중에서도 발전하는 줄로 믿습니다. 

나라를 살리는 사람들은 실제로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롯은 소돔에 들어가서 정치를 한 사람입니다.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창 19:1). 

소돔에서 그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돔이 망할 때 롯이 기여한 것은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소돔에 살거나 정치를 하지도 않았지만 롯보다 훨씬 더 공헌한 것이 많았습니다. 정치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를 한 롯의 공헌보다 기도를 했던 아브라함의 공헌이 훨씬 많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올바른 정치가도 있고 이상한 정치가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결국 이 세상을 밝게 하고 나라를 건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도고기도하는 성도들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고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자들입니다. 우리의 가족들 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도고해야 되겠고 나라를 위해서도 도고해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저 북한 땅에 예배드릴 자유도 없는 우리의 동족들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들에게도 예배할 수 있는 자유의 때가 속히 오게 하여 주시고 남북한이 복음으로 통일되어 남북한 성도들이 합력하여 세계를 향해 선교하는 선교의 대국이 되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나라가 잘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가정과 나라를 위해서 도고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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