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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롯이 잃은 것과 남긴 것 (창 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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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이 잃은 것과 남긴 것 (창 19:12-17)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70세에 아들 셋을 어떻게 다 낳습니까? 70세부터 낳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고 아브라함이 제일 처음 나와서 그가 장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데라의 장남은 하란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둘째이고 나홀이 막내입니다. 데라의 장남인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죽었는데 그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롯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롯의 작은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하란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데라가 죽고 나홀은 그곳에 정착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떠나는데 이때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도 아브라함과 함께 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까지 롯은 아브라함과 동행하였고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피신할 때도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애굽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미모를 보고 탐하여 사라를 취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빼앗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은금과 종과 육축들을 주며 사라를 취한 것입니다. 하지만 애굽 왕 바로가 사라를 취하려 하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막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보호해주셔서 아브라함은 사라도 돌려받게 되었고 바로가 준 재물들도 함께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부자가 되었는데 아브라함만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롯도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따라다니다가 롯도 부자가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창 13:1~2). 

얼마나 부자가 되었으면 가나안 땅이 그 두 가족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라고 나오겠습니까?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창 13:5~6). 

양과 소를 많이 갖고 있다 보니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물을 얻기 위해서 다투고 꼴을 얻기 위해서 다투니까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땅의 약속도 주시고 자손의 약속도 주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언약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주셨고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현재도 복 받고 내세도 복 받고 영원히 복 받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롯도 아브라함을 계속 따라다녔으면 믿음의 조상의 조카로 복을 받았을 것인데 아브라함과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Ⅰ. 롯이 걸은 인생길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창 13:8~11).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선택권을 주자 롯은 눈을 들어 봅니다. 그런데 롯의 눈에 요단 온 들이 보였습니다. 요단 온 들에는 당시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 이렇게 다섯 개의 성이 있었는데 물도 많이 흐르고 목초도 많아 보여서 그곳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하지만 소돔에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창 13:13). 

물론 다른 도시 사람들도 악했겠지만 큰 죄인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소돔 사람들에게만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창세기 19장 1~11절을 보면 두 천사가 남자의 모습으로 소돔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롯이 성문에 앉아 있다가 보통 분들이 아닌 것을 알고 자신의 집으로 초청합니다. 두 천사가 거절을 하지만 롯이 간청하여 결국 롯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날 저녁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창 19:4~5). 

저는 4절에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를 보고 놀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성연애자라는 것도 놀라운데 그중에 어른만이 아니라 아이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동성연애자들이 모두 몰려와서 롯에게 요구하기를 너희 집에 있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남자 둘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롯이 밖으로 나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창 19:8). 

하지만 사람들은 롯의 말은 듣지도 않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천사가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은 뒤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밤새도록 문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돌아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동성연애가 선천적인 장애라고 말합니다. 저는 연구를 많이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선천적인 장애라고 한다면 어떻게 소돔에는 그렇게 많은 동성연애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선천적인 장애자가 어떻게 그 성에만 다 몰려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돔의 경우를 봤을 때 동성연애라는 것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만들어낸 악한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동성연애가 괜찮다고 하면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멀쩡하던 사람도 동성연애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대한민국 중‧고등학생이 보는 도덕교과서를 보았는데 문제가 심각합니다. 동성연애자들을 성적 소수자라는 아주 교묘한 말로 표현해서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동성연애자들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살펴보고 느낀 점을 써오라고 숙제를 내줍니다. 이렇게 사회에 동성연애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라는 오명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롯은 이런 소돔을 좋아했습니다. 거기에 정착해 살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었고 기도도 중단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인정했듯이 롯은 의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을 죄인들에게 내어주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자신이 죽더라도 딸들을 보호해야 마땅한데 죄인들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악한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뜻도 구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 당대뿐만이 아니라 후대에도 엄청나게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Ⅱ. 롯이 잃어버린 것 

롯은 소돔에 살면서 부자가 되었고 성문에 앉아있었다는 것을 보니까 출세도 했습니다. 하지만 롯은 성공하기 위해서 너무 귀한 것들을 많이 희생했습니다. 롯은 네 가지 귀중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첫째, 성도의 기쁨을 상실했습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벧후 2:7~8). 

롯은 날마다 고문당하는 심령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간접 살인했을 때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시 32:4). 

영혼이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2). 

롯이 구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원의 기쁨을 상실했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그 영혼은 불행했습니다.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기쁨이 없는 것이 낫습니까? 조금 가난해도 기쁜 것이 낫습니까? 물론 출세하고 돈도 벌고 기쁨도 있으면 좋겠지만 기쁨을 희생하면서 얻는 돈은 별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성도로서 증거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롯이 말을 해도 자식들이 듣질 않습니다. 롯이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창 19:14). 

하지만 사위들은 그것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롯이 아무리 말을 해도 증거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롯이 말하면 농담으로 들릴 뿐이었습니다. 왜 롯은 증거능력을 갖지 못했습니까? 그의 삶이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롯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롯이 기도하는 모습은 딱 한 번 나옵니다.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창 19:19~20). 

천사들이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니까 평소에 등산도 하지 않았고 다리도 약해서 산으로 갈 수 없으니까 근처에 있는 작은 성은 멸하지 말고 그곳으로 도망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롯의 기도의 전부였습니다. 천사들이 듣고 한심하게 여겼겠지만 그런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어쨌든 소돔과 가까이 있던 소알은 살려두었습니다. 소알은 ‘작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성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모 된 우리가 자식들에게조차 증거능력을 갖지 못하는 것은 이 시대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자식들에게 기도하라고 해도 하지 않고 교회 나오라고 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에게 영적 유익을 준 적도 없고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하지도 않고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명은 돈 벌어서 주는 것이고 어머니의 책임은 밥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세상의 유익을 추구하며 삶의 모범을 보이지 않으니까 자식들에게 말을 해도 통하질 않는 것입니다. 

셋째, 벌어놓은 재산도 모두 상실했습니다. 믿을 것은 돈밖에 없었는데 돈이 다 날아간 것입니다. 소돔에 사업장도 있고 집도 있고 땅도 있고 돈도 있었는데 유황불비가 내려 하룻밤 사이에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롯은 땅에서 부자였지만 하늘에서는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땅의 것이 다 사라지니까 땅의 것도 없고 하늘의 것도 없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땅의 것을 다 놓고 가야 됩니다. 그런데 하늘에 쌓아둔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하늘에 쌓아두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20). 

우리는 이 땅에 살다가 이생이 다하면 부활하여 영원히 천국에서 살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좀과 동록이 해하지 못하는 곳에 보물을 쌓아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도 하시고 헌금도 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좋은 일만 한다면 하늘의 상이 있겠습니까? 롯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위한 일에만 에너지를 다 쏟고 하늘에 상을 쌓는 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땅의 것이 다 사라지고 나니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넷째, 가족의 일부분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 (창 19:12). 

자녀는 아들, 딸 모두를 가리키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롯에게 아들과 결혼한 딸들도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들 모두 다 죽었습니다. 롯의 아내도 천사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을 다 잃고 두 딸만 살아남은 롯의 마음이 얼마나 쓸쓸했겠습니까? 

롯의 길은 행복한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신하는 길이 남들이 볼 때는 어리석은 길 같아 보여도 진실로 복된 길이고 영원한 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롯이 남긴 유산 

창세기 19장 후반부는 수치스럽고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롯은 두 딸과 소알에서 살고 있다가 거기에도 유황불비가 내릴까 무서워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에 집도 없고 하니까 동굴에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롯의 두 딸이 이제 남자라고는 아버지밖에 없고 자식은 낳아야겠으니까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근친상간을 통해 큰딸은 모압을 낳고 작은딸은 벤암미를 낳은 것입니다. 

이 두 딸들은 소돔에서 자라면서 동성연애가 괜찮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큰 죄라고 알았던 동성연애가 괜찮다고 하니까 근친상간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교육은 매우 중요합니다. 결국 큰딸은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었고 작은딸은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압과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의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핍박하며 괴롭게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스라엘과 원수가 되어서 계속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롯의 배역은 단순히 그 시대의 피해로 그친 것이 아니라 후손 대대로 악한 영향을 끼치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이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롯이 역사에 남긴 유산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며 남긴 것이라고는 악한 것들만 남게 된 것입니다. 


결론 

창세기 19장은 우리 성도들을 향한 대단히 엄중한 경고입니다. 성도이면서 세상의 재물과 쾌락 그리고 죄악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심각한 경고인 것입니다.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이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소돔이란 동네를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죄악에서 떠나라는 말입니다. 죄악에 빠져 사는 인생은 롯의 길입니다. 죄악에서 떠나라는 말은 슬슬 걸어서 뒤를 돌아보며 나오라는 말이 아니라 뛰어서 나오라는 말입니다. 

돈을 위해서 나오라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위해서 나오라는 것도 아닙니다. 살려면 나오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해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예배하고 있는 여러분 중에 혹시 동성연애와 같은 죄는 아니더라도 다른 죄에 빠져 하나님과 교제를 게을리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는 분이 계십니까? 심령이 괴롭지만 그래도 세상이 주는 쾌락과 만족 때문에 괴로운 것을 감수하고 계신 분들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롯의 길에서 돌이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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