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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냉정한 판단이 필요할 때 (눅 14: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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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판단이 필요할 때 (눅 14:25-33)

여름 휴가철을 맞아 이코노미스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유럽인들은 미국이나 중국인들보다 더 많이 노느냐? 미국이나 중국인들이 유럽인들보다 더 일을 많이 하느냐?’ 

왜 한국 사람은 빼놓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물어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당연하지요. 유럽인들처럼 놀기를 좋아하고 여름에 두 달씩 휴가를 가는 민족이 없습니다. 여름에 파리에 가면 파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관광객이라는 사실이에요. 헛된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놀기를 좋아하면서 왜 경쟁에 뒤지는지 궁금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본인들이 놀고 싶어서 노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럽인들의 과다한 휴가 문화가 교회의 쇠퇴의 원인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여름에 두 달씩 교회를 쉬었다가 다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한결같이 하는 데에 비결이 있는데, 한번 쉬게 되면 계속해서 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일반 교인들뿐만이 아니고 성직자들도 여름에는 아예 교회 문을 닫고 휴가를 갑니다. 한 동네에 교회가 세 개가 있다고 하면, 두 개 교회가 문을 닫고 성도들을 나머지 한 교회에 보내고 두 교회 목사는 휴가를 가 버립니다. 그러면서 왜 교회 출석률이 줄어드는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성령은 피서를 가시지 않습니다. 교회의 부흥이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영적으로 불침번을 서야 됩니다. 누군가는 깨어서 기도해야 됩니다. 신앙은 쉴 수 없고, 기도는 쉴 수 없고, 믿음의 수고를 쉴 수 없습니다. 

외국에 살던 어느 한국인 부부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너무 마음이 허전해서 평소에 가지 않던 한국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만일 그날 교회가 열려 있고 크리스마스이브 예배가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처럼 놀다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은 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글로벌 경쟁이 특정 국가에 손해가 되고 특정 국가에 득이 되는 게 아니에요. 세계 모든 나라에 동일한 원칙이 적용됩니다. 마침내 글로벌 차원에서 공정한 시대가 왔습니다. 

막스 웨버가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책을 썼지만 이제는 개신교인들만 근면해야 되는 것뿐만이 아니고 모든 나라가 근면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중국이나 인도의 임금이 싸서 공장을 거기로 옮기는 것을 가지고 반드시 불평할 이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저렴한 노동력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입니다. 그것이 자본가나 소비자 모두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이득이 인도나 중국 같은 나라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들의 소득이 늘어야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명품을 사줄 것이 아닙니까? 그들의 소득이 늘어야 중동에서 석유를 사줄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라도 해야 가난한 나라가 잘 살 수 있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가난한 나라는 영원히 가난할 줄로 생각했다는 얘기입니까?

글로벌 시대는 모든 나라가 공정한 잣대로 경쟁을 하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학생들에게 공부를 너무 많이 시킨다고 불평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유능한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대학들은 벌써 옛날부터 경쟁을 배제했는데 그 결과로 독일 대학의 질이 떨어졌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요즘 시대 독일 대학에 유학가려는 외국 학생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미국의 오바마는 한국을 말할 때마다 한국의 교육을 칭찬하는데 우리만이 한국의 교육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놀자는 얘기입니까?

우리는 언제까지 열심히 일을 해야 됩니까? 쉴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일할 때에요. 지금 쉬려고 하게 되면 죽도 밥도 되지 않습니다.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대한민국 사회도 그렇고 대한민국의 교회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고 쉴 때가 올 것이지만 아직은 일할 때입니다. 지금 쉬려고 하게 되면 죽도 밥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뿐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냉정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요행이 아니고 신앙이 인간의 게으름이나 무책임을 덮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최권능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분입니다. 이 분이 신학교를 다닐 때, 내일이 헬라어 시험인데 시험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고 헬라어 시험을 봤는데 낙제했습니다. 

그때 그분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령도 헬라어 시험은 감당하시지 못하신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믿음의 인물이었지만 자기의 실력을 성실하게 키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적재적소에 쓰실 수 있었습니다. 준비되지 않고 실력을 키우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은 요행이 아니고 자기 실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물맷돌을 던지는 실력을 키우고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만민이 보는 앞에서 거인을 쓰러뜨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삭이 가는 데마다 우물을 팔 수 있었던 것도 요행이 아니고 운이 아니고 그에게는 우물을 파는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가나안 백성들은 우물을 파지 못했기 때문에 이삭이 판 우물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이삭은 어디를 가든지 우물을 파는데 성공할 수가 있었고 그것이 이삭이 형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있다고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나의 게으름이든 나의 무지함을 신앙으로 커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부지런히 자기 실력을 키워야 되고 그 실력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불타는 열망이 있더라도 묵묵히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실력을 키워야 됩니다. 영화 <장군의 아들>을 보면 젊은 김두한에게 어느 조폭 두목이 이런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 싸우는 거 어디서 배웠어?’ 김두한이 대답하기를 ‘예, 다리 아래에서 돌을 들었다 놨다 했습니다.’ 다리 아래. 그 말은 가난할 때, 거지처럼 살 때 그럼에도 돌을 들었다 놨다하면서 자기 몸을 단련했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지금의 김두한을 가능하게 했다는 얘기에요. 

제가 처음 신학교에 입학하고 전도사가 됐을 때 저에게는 불타는 열의가 있었습니다. 그런 열의가 없으면 신학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 부딪혔을 때 제가 발견한 것은 저는 모든 면에 부족했다는 사실이에요. 성경 지식도 부족하고 목회 경험도 부족하고 지혜도 부족하고 모든 면에 부족했는데 이것이 하루아침에 훈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 시간동안 묵묵히 배우고 경험을 쌓고 겨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에요. ‘로마는 하루에 세워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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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합리적이고 냉철한 기준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 때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먼저 앉아’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을 저지르기 전에, 공사를 강행하기 전에, 먼저 앉아 무엇을 예산하라는 얘기입니까? ‘자기의 가진 것이 족할지 먼저 앉아 비용을 예산하지 않겠느냐’ 남의 가진 것을 세지 말고 내가 가진 것이 족할지를 먼저 앉아 계산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부족한 데 누가 대신 채워주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가 그것입니다. ‘내가 부족하지만 누가 도와주겠지, 내가 없지만 누가 있겠지.’ 천만의 말씀이에요. 누가 줍니까? 누가 빌려줍니까? 내가 가진 게 충분해야 남들도 돕지, 내가 가진 게 부족하면 남들이 빌려준 것까지도 회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오래전에 저희 아버님이 은퇴를 앞두시고 하루는 저에게 종이 한 장을 내미셨습니다. 제 아버님은 그런 것을 잘 하셨어요. 그 종이를 보니까 당시 우리 집 자산이 얼마고, 부채가 얼마고, 앞으로 필요한 돈이 얼마고, 앞으로 전망되는 소득이 얼만지를 적어 놓으셨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마음이 탁 막히는 것 같았어요. ‘아~ 이것이 인생의 현실이구나! 사람이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준비를 해야 되는구나!’ 

예수께서 ‘너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은 그렇다고 무턱대고 살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턱대고 살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전기를 무턱대고 쓰다가는 정전되는 날이 옵니다. 지금처럼 석유를 무턱대고 쓰다가는 고갈되는 날이 옵니다. 그것을 알고 절제하는 법을 배우고 내일 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국가가 위기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UAE가 산유국이지만 왜 원전을 지으려고 합니까? 그건 석유가 떨어지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산유국이지만 원전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미래를 준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우리의 삶의 질을 영원히 유지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너희가 망대를 지으려고 할 때 먼저 앉아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 족할는지 비용을 예산하지 않겠느냐’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대가가 무엇인지를 미리 알고 뛰어들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도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에게 요구되는 것에 대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려고 갈 때에 먼저 앉아’ 여기에도 ‘먼저 앉아’라는 말이 나옵니다. ‘먼저 앉아 일만으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않겠느냐’ 이기지 못할 전쟁은 하면 안 됩니다. 섣불리 무엇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앉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옵션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적군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할 수 있는 것이지, 가까이 다가왔을 때는 너무 늦습니다. 사람이 냉정하게 판단해야 자신에게 어떤 옵션이 있는지를 알고 그 옵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 냉정한 현실을 접합니까? 저울에 올라갈 때. 저울에 올라가면 에누리가 없어요. 저울은 봐주지 않습니다. 내 참모습보다 더 가벼운 숫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 냉정합니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 아무리 기도를 해도 성적표 상의 숫자가 달라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냉정하고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회개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옵션을 알 수도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느냐? 자기 자신을 냉정하고 진지하게 바라볼 기회를 얻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쁘게 살다보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심리학자 융은 말하기를 ‘마귀가 우리를 바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바쁨 자체가 마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이냐? 믿음이 있어도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정직한 자기파악을 가능하게 합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지, 과대평가하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자기의 은사가 아닌 것을 할 수가 없고 자기의 믿음의 분량을 넘어가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어느 나라에 비해서 신학교가 많고 신학생이 많고 목사 지망생이 많고 목회자도 많고 교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예수님 믿는 것을 더 쉽게 만드는 것은 아니에요. 대한민국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신학교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이 유행이 됐다고 예수님 믿고 따라가는 것이 더 쉬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을 냉정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이 거품일수도 있고 그리고 준공하기에 필요한 예산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강행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에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모르고 무턱대고 남들이 가니까 나도 교회가고 남들이 신학을 하니까 나도 신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은 냉정하게 과연 내가 필요한 것을 갖고 있는지를 계산을 해야 됩니다. ‘먼저 앉아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부지런히 키워야 됩니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을 투자해야 되고, 남들이 잘 때, 남들이 놀 때, 남들이 무관심할 때 누군가가 묵묵히 자기의 일을 하고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소원이 있는 사람은 남들이 잘 때 더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고,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를 알고, 거기에 대한 답변이 무엇인지를 공부하고, 성경말씀에 있어서는 달인이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면 결코 이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현대인들이 신앙과 성경에 대해서 갖고 있는 그 많은 질문들, 그것을 우리가 깊이 숙고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려 하다가 실족하고 실망하느냐? 하나님에게 실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턱대고 믿는 모습, 덮어놓고 믿는 모습, 설명할 수 없는 신앙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내 자신이 그런 질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얘기에요. 

2차 세계대전의 판세를 바꾼 것이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인데 그게 1944년 여름에 일어난 일입니다. 2차 대전이 언제 발발했느냐면 1939년에 발발했고 미국이 참전한 것이 1941년이었는데 어떻게 1944년에 비로소 노르망디에 상륙할 수 있었다는 얘기냐? 왜 그 많은 시간이 필요했냐? 준비하는데 그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충분한 준비하려고 하니까 3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를 해서 1944년 여름에 프랑스에 상륙하니까 일 년도 되지 않아서 독일을 이기고 승리한 것입니다. 전쟁이든 사업이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든 무엇이든 거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충분히 준비해야 되고 거기에 필요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는 호기심을 이런저런 것을 할 수 있지만 어른이 돼서는 이루지 못할 것은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시작만 하고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일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시작만 하고 이루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에요. 내가 예수를 믿은 일은 깊은 생각이 없이 했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진지해져야 되고 뒤돌아서서는 안 되고 예수님 말씀대로 기초만 쌓고 이루지 못하게 되면 보는 사람들이 다 비웃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 희생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지셨지만 우리 각 사람에게는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환상 중에 많은 십자가가 놓여있는 것을 봤어요. 

그런데 주님이 ‘네가 질 수 있을만한 십자가를 고르라.’고 말씀하시더래요. 그래서 제일 작아 보이고 가벼워 보이는 십자가를 집었어요. 그랬더니 주님이 ‘그 뒤에 임자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뒤집어 보라.’고 하시더래요. 뒤집어 보니까 자기 이름이 쓰여 있더래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주님이 왜 나에게 무거운 짐을 맡기느냐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도를 믿어야 됩니다. 내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내게 어떤 짐을 주신 이유는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 견디기 어려운 사람을 주신 이유는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어야 됩니다. 

우리는 되돌아 설 수 없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뒤돌아서면 안 됩니다. 롯의 아내가 뒤돌아섰다가 소금기둥이 됐어요. 왜 뒤돌아섭니까? 앞으로 가기로 작정했으면 앞만 보고 가면 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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