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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 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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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 3:7-19)


세상 사회에서 무슨 청구서가 나오거나 지시가 내려질 때에는 대부분 '기한'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매달 받게 되는 각종 공과금 청구서에는 '몇 월 몇 일까지' 납부해야만 한다는 기한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넘기게 되면 연체료가 부과됩니다. 
법원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이 올 때에도 거기에는 반드시 그 출두 날짜가 있기 마련이며, 그 지정된 날에서 하루라도 지나면 소환에 응해 보았자 아무 필요 없을 뿐 아니라 그 날을 어긴 데 대한 법적 처벌까지 받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런 '마감일자'가 바로 당일이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휴대폰 전화 요금 지불이 은행에서 자동적으로 이체되지 않는다든지 하면 "오늘까지 미납금을 지불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독촉 문자 메시지가 날아옵니다. 
혹 학생들의 경우에는 "오늘까지 리포트를 제출해야 하는데..."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원들은 "오늘 안으로 이 거래를 반드시 성사시켜라." 하는 상사의 지시를 받고 초긴장 상태로 근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본문에도 바로 그와 같은 내용이 나타납니다. 
여기에 보면 각 문단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라는 표현들이 도합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말씀에도 어떤 '마감일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이라고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내일에 가서는 순종하려 해도 아무 소용없게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재삼재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바로 '오늘'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에 그 '유효 일자'를 넘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신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듣게' 될 때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거나 미루지 말고 '오늘'이라는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즉시 반응해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오늘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에 성도는 '자기 속의 반항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7절부터 11절에 기록하기를 "7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첫 구절에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시편 95편 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양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그 양을 부르시는 목자로 비유하는 문맥과 연관시키고 있는 인용입니다. 
즉 양이라면 목자가 부르는 음성을 들어야만 살 수 있는 것인데, 이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고 함으로써 그 목자의 음성을 바로 본문 6절 이전까지에서 증거하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히브리서의 수신자와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이제 화육강세까지 해 주셨던 목자장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육성을 듣게 된 '오늘날'이라는 현재에 살게 되었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실로 특권적인 계시의 축복을 누리는 시대에 살게 되었음을 자각하는 성도는 그런 까닭에 더욱 조심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어지는 8절 이하에 나오는 대로 과거 이스라엘의 열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저질렀던 실패를 되새기면서 결코 같은 잘못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어처구니없게도 "노하심을 격동하는" 반사작용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채질하는 반응을 보였다는 뜻으로서, 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반항심이 불쑥 솟아올랐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노하심을 격동하여'라는 말을 다른 성경에서는 그냥 '반역'(rebellion)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라고 번역된 말은 '광야에서 시험 중에 있을 때' 혹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시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테스트하신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체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시험을 받을 때에 그 하나님께 오히려 반역했던 것을 오늘날 너희들은 따라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과연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노하심을 격동케 하는 반역'까지 저지르게 되었습니까?
그 출발은 바로 "마음을 강퍅케" 한 데에 있었습니다. 
여기 '강퍅케 하다'라는 단어는 '말라서 단단해지다'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완전히 닫힌 상태를 가리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심령이 바로 그처럼 영적인 고집불통, 선입견, 반항심 등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음을 비유할 때에 이 '강퍅한 마음'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딱딱하게 굳은 마음으로 반응했을 때 그 이스라엘의 "열조"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는커녕 "사십 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행사를 보고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여 증험"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아닌가?'를 테스트했다는 뜻으로서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지 않는 불신앙'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증험했다'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하나님을 조사하다, 확인해 보다.'라는 뜻으로서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감히 '떠보려' 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말씀 앞에 '강퍅한 심령'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도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떠보려 하는 극단적인 교만과 불신앙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에 이어지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노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목상이나 석상처럼 '무반응의 우상'이 아니라 살아 계신 인격적 신이신 까닭에 그처럼 당신께 대하여 무례하기 짝이 없도록 반역하는 자들에 대하여 '공의로우신 진노'를 발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신 대로 그야말로 '금강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은 그 자체가 '미혹되어' 즉 '길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내 길" 즉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따라갈 수가 없게 되어 버렸으며, 그것은 곧 그들의 앞에 남은 길은 오직 '멸망에 이르는 길'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식'이라고 1인칭을 강조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얻게 되는 모든 안식은 오직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는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 허락 역시 오직 하나님께서만 발휘하실 수 있는 권한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의 가나안 안식에 대한 전권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니 당신께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자에게 그것을 허락해 주실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을 들려주실 때에 버릇처럼 반역하는 자는 결국에 가서는 이처럼 '가나안'으로 예표된 '영원한 안식' 즉 구원의 완성에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아예 '최종선고'를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그의 음성을 들려' 주실 때에 자기 속에서 거의 반사적으로 '강퍅한 마음'이 불쑥 솟아오르는 것을 정말이지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보낸 구세주다.'라고 말씀을 들려주시는데도 '정말 그럴까?'하고 제일 먼저 '의심'부터 올라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영벌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라고 미리 경고해 주실 때에 '아니, 선하신 하나님이라면서 어떻게 사람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발심'이 당장 솟아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나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계명을 선포해 주시면 '하나님이 나한테 복은 주시지 않으시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요구를 하신다는 말인가?'하고 '대꾸'를 하고 '불평'을 하며 '항의'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바로 '강퍅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아예 버릇처럼 '따지는' 마음이야말로 정말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과 훈계와 교훈 앞에서 반사작용처럼 '대드는' 것이야말로 살아 계신 절대주권자를 감히 '시험'하고 '증험'하려는 교만과 불신앙의 극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이미 '마음이 미혹된 자'의 결말은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리 겉으로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어도 사실은 이미 '하나님의 길을 떠난' 자이며, 그런 '외면적인 종교생활'의 끝은 불신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멸망의 저주'일 뿐인 것입니다. 
'오늘날 그의 음성'이 성경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자신의 심령에 들릴 때마다 바로 그런 '강퍅한 덩어리'가 불쑥 솟아오르지 않도록 정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조심하면서 그 대신 오직 '아멘'이라고 믿음과 순종으로만 반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오늘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에 성도는 그것을 '자기 신앙의 회복'을 위한 기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12절부터 14절의 말씀에 "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히브리서의 기자는 앞의 11절까지에서 과거 '이스라엘 열조'들의 실패를 상기시켜 준 후에 이제 "형제들아"라고 지금 이 히브리서를 받아보고 있는 제1차 수신자 즉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직접 그 교훈을 적용시켜 주기 시작합니다. 
"삼가"라는 말은 '조심하여'라는 뜻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란 바로 '이미 교회 안에 있는 형제 교인들 중에 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처럼 조심해야 할 상태는 바로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믿지 아니하는 악심"(evil heart of unbelief), 다른 말로 '불신앙의 악한 마음'은 바로 앞에 나온 '강퍅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하고 거부하고 반역하는 마음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양심선언'이 될 수 없으며 '건전한 비판 정신의 발로'도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백이면 백 다 '악한 불신앙'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심령이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는 자동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떨어지다'라는 말은 '거리가 멀어지다'라는 뜻이 아니라 '본체에서 떨어져 나가다'(fall away)라는 뜻입니다. 
즉 설교 말씀에 의구심이 생기고 교역자의 권면에 반항심부터 솟아오르는 사람은 바로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만큼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말해서, 교인 가운데서도 '말씀에 대하여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은연 중에 품고 있는 사람은 끝내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고 마는' 끝장이 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염려'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는 "너희 중에" 혹시 그런 교인이 생기지 않도록 "염려하라"고 하면서, 그런 까닭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는 '성령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이 여기서는 바로 성도가 서로를 "피차 권면"하는 말을 통하여 들리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강단을 통해 듣게 되는 설교 말씀, 교역자가 심방을 와서 권면해 주는 말씀, 혹은 같은 교인들끼리 서로를 '일깨워 주는 영적 조언'들 역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그의 음성'인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권면은 아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서로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일깨워 주고 격려해 주고 때로는 경고와 책망까지 해 주는 것은 그 상대방 교우로 하여금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신앙고백을 하고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단은 할 수만 있다면 택자까지도 미혹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죄의 유혹'에 빠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단의 유혹을 미리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비책이 바로 '교회를 통한 성도끼리의 권면'입니다. 
  
이미 죄의 유혹에 완전히 빠져 버린 후에 교역자가 알게 되면 그때는 늦어 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교역자보다 평소에 훨씬 더 자주 만나고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교인들 사이에서는 누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에도 그것을 제일 먼저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즉시 상대방을 향하여 "아무개 교우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죄의 길에 빠지는 것입니다. 
"라고 바로잡아 주고, "당신이 지금 우리 교회에 대하여 그런 식으로 불만을 가지고 우리 목사님의 설교에 대하여 그런 식으로 반발심이 드는 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간곡히 권면해 주면, 그와 같은 마귀의 유혹들을 초전에 물리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처럼 성도끼리 권면해야 할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어지는 14절에 보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으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란 바로 '처음 믿을 때'란 뜻입니다. 
"확실한 것"이란 기초적이면서도 불변하는 복음의 진리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서로 권면을 할 때 무슨 '신학적으로 차원 높고 깊은 지식' 같은 것으로 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에 배웠던 '기본 교리와 기초적인 신앙생활'만 가지고서도 충분합니다. 
인생이 힘들다고 신앙생활 포기하려는 교인이 있으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천당영생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는 것인데, 세상살이 좀 힘들다고 이 좋은 것을 놓쳐서야 되겠습니까?"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교역자들이 심방을 가서 교인들을 권면할 때 역시 무슨 '심오한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저 "주일예배에 빠지지 말고 참석해서 은혜를 받으세요. 십일조를 바쳐야 물질의 축복을 받습니다. 
기도생활을 꾸준히 하면 놀라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라는, 아주 쉽고도 기본적인 권면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처럼 간단하지만 '확실한 것', 교회에 나오면 정말 흔히 듣는 말이지만 사실상 '제일 중요한 것'들만 "끝까지 잡으면" 그 결과는 정말 엄청납니다.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속받게 되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금세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의 기쁨과 축복을 누리고 내세에서 구원과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피차 권면'해 주는 간단한 말 한마디를 통해서 바로 이런 엄청난 축복을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 중 낙심하거나 실족한 교우로 하여금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서로 권면하는 것은 그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어떤 교인이 죄의 유혹에 빠지고 마음이 강퍅해지는 시험에 빠질 때 곁의 교인이 그것을 보고도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으면, 그 교인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자리에까지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피차 열심히 서로 권면함으로써 내 이웃에 있는 교인이, 우리 구역의 구역원이, 같은 전도회에 속한 회원이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마찬가지로, 그처럼 자신의 죄에 대하여 따끔한 권면의 말을 해 주는 교인이나 교역자들은, 실상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진짜 무서운 진노로부터 막아 주는 정말 고마운 '형제'인 줄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가 피차 권면하는 것은 세상사회에서 서로 듣기 싫어할 수밖에 없는 '잔소리'가 결코 아닙니다. 
성도가 서로의 죄를 지적해 주고 경고해 주는 것은 결코 '사생활 간섭'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고 그분의 진노를 받게 되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막아주는, 진정한 사랑의 발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된 성도의 교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냥 인사만 나누고 가끔 같이 모여 노는 것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진짜 성도의 교통은 서로의 약한 것을 북돋아 주고 서로의 실족을 일깨워 주며 서로의 신앙을 지켜 주는 '권면'에 있음을 깨닫고, 이처럼 '오늘'이라는 기회가 아직 있을 때에 교회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그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떨어진 것을 회복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하는' 구원의 완성에까지 다 같이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15절 이하 19절에 "15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의 음성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을 때에 그 필연적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다시 한 번 최종적으로 강조하면서 설의법적인 자문자답으로 경고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불순종한 자들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한 것'일 뿐이었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사실에 대하여 최종 결론을 내리기를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불신앙이야말로 영벌의 저주를 받게 된 이유'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불신앙', 즉 '믿지 아니하는 악심'은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강퍅한 마음' 즉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다시 거꾸로 돌려서 그 진행과정을 요약해 본다면, '오늘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는 결국에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그 대신에 지옥 영벌에 떨어지고야 만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아직은 '하나님께서 그의 음성을 들려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하고도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그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곧 '심판날'이 될 수 있는 것이니, 그처럼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 주시는 오늘이 그야말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는 했지만 뭐 꼭 순종하지 않아도 다음 주일에 또다시 들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교인에게는 그 '다음 주일'이라는 것이 꼭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심방을 온 전도사님이 권면해 주는 말씀, 바로 '그 음성'을 듣지 않으면 '내일'은 아주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실 때에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자기 속에서 올라오려 하는 반항심을 물리쳐야만 합니다. 
  
교회를 통해, 목사의 설교와 성도의 권면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 올 때에, '주님께서 아직도 나를 버리지 않고 계시는구나.'라고 깨달으면서 바로 그 '오늘'이야말로 회개하고 돌아서서 '성화의 진보'를 이루고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의 음성이 아직은 내게 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당신의 택자를 결코 놓지 않고 계신다는 증거인 줄로 알고, 성경과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늘 '마음을 활짝 열고' 순종함으로써 '처음 믿을 때의 확실한 것'을 더욱 견고히 붙잡는 가운데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영광에 꼭 함께 참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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