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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하나 되는 민족의 아름다움 (시 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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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는 민족의 아름다움 (시 133:1-3)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본문 1절) 하는 말로 시작되는 시편 133편은 많은 사랑을 받는 시편의 하나입니다. 특히 모처럼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나 여러 곳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모인 친교의 자리에서 예배드릴 때 종종 인용되는 시편입니다. “야, 이렇게 다 모이니 좋은데!”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반갑고 즐거운 자리에서 의례 머리에 떠오르곤 하는 성경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이 크고 작은 모임에서 편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말씀이긴 하지만 본래 어떤 배경에서 지어졌고 특히 어떤 때 사용되는 시편이었는지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그 의미는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시편 133편에는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시편 133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15편의 시편 중 하나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제목이 붙은 시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연례적으로 큰 명절 때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순례를 행하며 시온 산을 향해 부르던 노래였다고 봅니다. 즉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예루살렘을 오가는 순례자들이 순례의 길을 가며 암송하는 시이기도 했고,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해서부터 성전에 올라가고 예배드리고 나오고 돌아오는 모든 과정에서 드려지는 의식에 사용되기도 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그렇다고 반드시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길에서만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데서나 어느 때나 묵상집으로서도 사용될 수 있는 시편들이었습니다. 특히 성전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할 때 성전을 그리워하며 부르기도 하고 환난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의 구원에 대한 믿음을 재확인하기 위한 신앙집으로 쓰이기도 했던 것으로 봅니다. 

본문 1절에서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할 때의 “형제”는 가족을 가리킬 수도 있고 같은 신앙으로 예루살렘에 모여와 함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연합하여 동거함”이란 말은 예루살렘에서 명절을 지키기 위해 일정 기간 함께 지내게 되었음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여 어디에 살든지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매년 몇 차례 함께 예배하기 위하여 거기에 구름처럼 모여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기뻐하는 마음을 묘사한 것이 이 첫 절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했는데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다운 첫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편의 기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다”고 비유적으로 말합니다. 모든 대제사장의 원조이며 대표인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를 연상하며 그 때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묘사한 것입니다. 

특별히 귀한 향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 향유가 그의 머리에서부터 흘러서 긴 수염을 타고 그의 옷깃까지 흘러내리며 향기로운 냄새가 사방에 퍼질 때 그것은 그 누구에게보다 먼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당신의 종으로 세우시는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한 데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기름부으실 때의 기쁨 같은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향유가 대제사장의 머리에서부터 수염을 거쳐 옷깃까지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께만 기쁨이 되는 것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크나큰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거룩함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에 대한 확신이 함께하는 즐거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며 레위인들, 제사장들, 특히 대제사장을 보는 것은 순례객들이 왜 예루살렘에 왔는지를 상기시켜주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거룩함과 하나님의 임재와 복 주심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대제사장에게서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값진 향기로운 기름을 머리에 잘 바른 단정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며, 머리카락뿐 아니라 수염까지도 덥수룩하거나 부시시하지 않고 윤기가 흐르는 품격을 발하는 모습이 그랬을 것입니다. “아론의 수염”이라 했는데 여기서 아론은 대제사장을 위시해서 제사장 전체를 집단적으로 상징하여 지칭한 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름이 수염에 흘러서 옷깃까지 내림 같다”는 것은 기름을 머리에 너무나 많이 부어 발라서 수염을 타고 줄줄 흘러서 옷깃까지 다 적셨다는 말이라기보다 대제사장의 머리와 수염의 기품 있는 윤기가 그의 빛나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의상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순례자들은 그런 모습의 대제사장들만 보아도 예루살렘에 찾아온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복 주심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에 와서 느끼는 그 복됨을 3절에서는 헐몬산에 비유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한 것입니다. 헐몬 산은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있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산으로서 연중 푸르고 이슬이 많이 맺히기로 유명합니다. 유다 광야와는 달리 그 산에는 비도 때때로 옵니다. 헐몬 산에는 눈이 덮힐 때도 있습니다. 그 눈이 녹은 물과 빗물과 이슬이 흘러내려 생긴 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어 유다 땅에까지 수분을 공급합니다. 

그 헐몬 산이 없다면 유다 광야는 그야말로 생명이 보존될 수 없는 사막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헐몬 산은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땅과 시온 산을 위해서는 복의 근원이 아닐 수 없으며 생명의 젖줄과 같은 산인 것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한 것은 바로 헐몬 산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헐몬 산을 오르거나 또는 바라보거나 생각하기만 해도 시원함을 느끼며 더위와 갈증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 순례는 거룩하고 복되기 그지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순례의 길을 떠나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순례객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절기행사에 참석하는 기쁨과 감격과 보람은 고된 삶에 지친 백성에게 있어서 마치 헐몬 산의 이슬 같은 청량제 역할을 하곤 했던 것입니다. 헐몬 산이 주는 그 시원함과 같은 기쁨과 감격과 보람을 순례의 길을 행한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백성은 맛볼 수 있음을 표현한 말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한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은 먼저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또한 사람들에게도 큰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당신 앞에서 한 데 모여 예배하는 백성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영생의 복을 주시기 때문에 그 기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133편의 부제에는 <다윗의 시>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다윗이 시편 133편의 실제 저자라면 이 시편이 지어진 역사적 배경은 사울이 죽고 한때 다윗이 자기 출신 지파인 유다지파만의 왕이 되고 나머지 이스라엘은 왕실과 정세가 불안하고 혼미했었다가 열한 지파의 대표들이 다윗을 찾아와 그들의 왕도 되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이스라엘이 통일왕국이 다윗이 그 왕이 된 후 온 지파가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었을 때의 감격을 노래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할 때의 “형제”는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지파의 백성을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연합하여 동거함”이란 말 속에는 유다 지파와 나머지 지파들로 나뉘었던 백성이 다윗을 왕으로 옹립하며 다시 하나가 되었음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리고 “동거함”이란 열두 지파의 백성이 다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모여 함께 지내게 되었음을 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 133편이 남다른 감회와 감격 가운데 읊조려 진 것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서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에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뉘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에 망해버렸습니다. 그 후에 남왕국 유다 또한 바벨론에 망하고 많은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불타 없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 갈수도 없고 가도 예배드리기 위해 찾아갈 성전도 없어진 유다 백성의 회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놀랍게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도 다시 세울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고국으로 돌아오고 성전을 다시 세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그들의 감격과 기쁨은 가슴이 터질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불렀을 시편 133편의 감동이 어떠했을지 족히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8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혔던 일제의 강점과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독립을 얻은 우리 민족의 기쁨과 감격도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유다 민족의 그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특히 심한 박해의 대상이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생활의 자유를 얻은 기쁨과 감격은 더더욱 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흩어졌던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모여 교회를 되찾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은 시편 133편을 부르던 이스라엘 백성의 그것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주시고 그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우리에게서 결코 잊어지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다시는 나라를 잃고 신앙의 자유와 예배의 기쁨을 박탈당하는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요즈음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이 미쳐가고 있습니다. 옛 군국주의 일본의 망령을 되살리려 하고 있습니다. 군국주의 침략시대의 후안무치한 일본이 다시 우리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국민에 대한 도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극악했던 그들의 과거사를 부인하며 애써 잊으려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과거사를 잊으려 한다고 과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럴수록 오히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를 없애고 있을 뿐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지나간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용서는 하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우리와 그들 사이의 역사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것은 우리가 일본인들에게 말하기 전에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할 말입니다. 극악무도했던 일본에게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바른 믿음으로 이 나라를 지키며 교회를 튼튼히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그것만이 일본의 새로운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고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신실하고 충성하면 우리를 탐하거나 노리는 그 어떤 나라나 세력의 도발과 획책도 하나님께서 친히 다 분쇄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 133편을 부를 때마다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직도 하나 되지 못하고 갈라져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입니다. 남북이 통일되고 무너진 북한의 교회들이 다시 서며 북한의 지하 성도들이 자유롭게 남한의 성도들과 한데 모여 예배드리는 가운데 이 시편 133편을 노래할 수 있기 위하여 더욱 더 뜨겁게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소리 높여 노래할 수 있는 그날이 하루 속히 임하기를 위하여 더욱 더 깨어있는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편 133편을 늘 가슴에 되뇌며 통일을 위해서, 박해 아래 있는 북한의 성도들을 위해, 북녘 땅에서의 신앙과 예배와 선교의 자유를 위해, 온 민족이 다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그 복된 날을 위해. 하나 되는 민족의 아름다움이 빛나는 그날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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