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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움이 없는 확신에 이르기까지 (시 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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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없는 확신에 이르기까지 (시 54:1-7)
 
인도 콜카타에서 행려자들을 보살펴온 테레사 수녀가 함께 일할 사람을 선발하는 기준은‘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시편 54편에서 보는 다윗은 믿음이 참 인상적입니다.
사무엘상 23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은거 생활을 할 때, 그일라에 블레셋이 쳐들어 와서 추수한 것들을 다 빼앗길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그일라로 가서 그들을 구해주었습니다. 부하들은 한결같이 반대했었습니다. 도울 입장도 도울 힘도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일라 거민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넘길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것부터 다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안목과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그일라를 도울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즉시 모든 지파에 명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그일라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군대를 일으켜 그일라로 내려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내어 주었습니다. 다윗은 생명을 걸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해 주었는데,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은 하나님께 이 일에 대하여 의논하고 아무 소리하지 않고 그일라에서 피하여 나옵니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블레셋의 손에서 그일라를 구원한 다윗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꺽었을 때 보다 이처럼 그일라에서 피해 나올 때가 진정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일라 지역에서 도망하여 십 사람들이 사는 광야로 피신합니다. 십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유다지파인데다 역시 다윗이 블레셋으로부터 구해준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긴 안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사울 왕에게 다윗이 있는 곳을 고자질하였고, 사울 왕과 함께 다윗을 잡으려고 수색 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젠 정말 도망갈 데도 없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배신의 아픔도 컸을 것이고, 사람들이 다 무서운 처지에 빠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쓴 시가 시편 54편입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시편 54편을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시 54:1 하나님, 주님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님의 권세로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2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입으로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3 무법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며, 폭력배들이 내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셀라) 
한 구절 한 구절이 절박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두려운 상황에서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한 것을 봅니다

4-5절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며, 주님은 내게 힘을 북돋우어 주는 분이시다. 원수가 나에게 악한 짓을 하였으니, 주님이 내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진실하심을 다하여 그들을 전멸시켜 주시기를 빈다. 

이런 태도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너무나 두려운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고 마음이 평안한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 등에 대하여 들어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믿고 평안한 것입니다. 들어 본 적이 있거나 아는 것과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믿음이 없음을 늘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런데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6절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주님, 내가 주님의 선하신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근심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믿음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성격이 천하태평인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이 모라라서 겁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주먹을 믿어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히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두려움 없는 확신이 감사로 되어야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니 캄폴로(Tony Campolo)교수가 책에서 친구의 딸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폭풍우치고 무섭게 번개 치던 밤 갑자기 2층 방에서 혼자 자던 4살 된 딸이 큰 소리지르기에 아빠가 급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답니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 보니 딸이 창문 앞에 양 팔을 벌리고 선 채로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진 찍어 주시는 거예요? 예쁘게 찍어주셔요!”

진정한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7절을 주목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7절 주님이 나를 모든 재난에서 건져 주셨으며, 나의 이 눈으로, 원수들의 멸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재난에서 건져 주시고,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이 십 광야에서 사울 왕에게 거의 잡힐 뻔 했었는데, 갑자기 블레셋이 침공을 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는 일을 중단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런 결과를 본 다음에 이 시편을 쓴 것일까요? 그러면 ‘확신한다, 즐거워한다, 감사한다’는 고백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1-3절 기도는 설명이 안됩니다. 어떻게 이미 다 해결되었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님의 권세로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입으로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7절의 고백은 사울 왕이 물러가기 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7절을 자세히 보면 “주님이 나를 모든 재난에서 건져 주셨으며” 라고 했습니다. ‘이번 재난’이 아니라 ‘모든 재난’에서 건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은 비록 막다른 길에 몰린 것 같은 다급한 상황을 만났지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모든 재난에서 건져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고 재난에서 건져주실 줄 믿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믿으려고 애를 쓰는 것과 믿어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믿어져야 합니다. 믿어져야 묵묵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결과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두려움 상황이 왔을 때라도, 어려운 형편을 보지 않고 자신이 올바르게 행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였습니다. 그 점에 문제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었습니다. 

1절 ... 주님의 권세로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사울이 자신을 억울하게 죽이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배반하지만, 자신은 정당하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시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3절 무법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며, 폭력배들이 내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 말은 다윗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두려운 일이 많은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를 환란에서 건지시는 것보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이랜드의 박성수 회장이 코스타에 강연하실 때, 회사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회사 내에 있는 기도실에 가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박성수 회장은 기도실에 가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응답하셨더라는 말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끝까지 하나님의 방법대로 기업을 이끌어 갈 믿음을 주셨고 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믿음입니다.

다윗은 한순간에 이런 믿음을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7절에서 “주님이 나를 모든 재난에서 건져 주셨으며” 라고 한 고백을 보니 그동안 수많은 재난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다윗을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들 때문에 지금 하나님의 구원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의 모든 삶이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이는 분처럼 믿고 사는 훈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밤에 보는 별들 중에 상당수가 이미 사라진 별이라고 합니다. 별에서 떠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기 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려 그 사이에 이미 사라져 버린 별이 많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고 다 실재는 아닙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은 너무나 분명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24 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에 소극적이서는 안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완벽주의 성향이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잘 배우지 못합니다.
목사 아들에 동생들 항상 모범이 되어야 하기에 실수나 실패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어릴 때, 체육시간에 축구를 처음 했을 때, 공을 잘 다루는 친구를 보니 위축이 되었습니다. 한번 제게 공이 오기에 힘껏 찼더니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습니다. 너무나 창피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축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미국 목사님이 어린 시절 야구하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타석에 처음 섰던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삼진 아웃이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안타를 치지 않고도 출루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포볼로 나가는 것이다. 간혹 후속 타순의 훌륭한 타자 덕에 홈으로 뛰면서 박수 갈채의 감격을 누리기도 했다. 

투수들이 어차피 수준급이 아니니 항상 스트라이크만 던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하였고, 남은 시즌 동안 다시는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스트라이크 아웃도 많았지만 나는 이따금씩 베이스를 밟았다. 홈까지 들어올 때도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오랜 세월 나는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는다는 굳은 결심으로 살았다. 스윙이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다. 스윙으로 공을 놓쳐 버리면 무능함이 탄로 나고 설사 방망이를 휘둘러 안타를 치더라도 더 잘해야 하는 압박감이 따른다. 
그러나 지금, 어쩔 수 없는 것인 양 일부러 무능을 택해 그 속에서 살아온 세월이 후회된다. 나를 위해 하나님의 설계를 떠나 살아온 것이 슬프다.” 
 
저는 ‘시도하지 않으면 창피를 당하지는 않는다.’ 것이 지혜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못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운동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춤도 못추고 영어도 못하고 수영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돌아보니 너무나 바보같이 살았습니다. 어릴 때 실수나 초보자 때 실패를 누가 기억이나 하겠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기억한 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서 지금 잘한다면, 적어도 즐기며 산다면 오히려 자랑스런 일이지 않겠습니까?

부끄러워하고 소극적이어서 놓친 소중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뼈아픈 교훈 때문에 가장 소중한 한 가지를 놓치지 않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훈련입니다.

저는 지금 보이지 않지만 내 안에 계시고 들리지 않지만 분명히 말씀하시는 주님을 24 시간 바라보며 하루 하루를 살아 갑니다. 그것을 매일 매일 기록합니다. 영성일기라고 이름지었습니다. 또 영성일기를 공개하였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일을 계속 지켜가기 위해서입니다. 
실제 이런 시도는 저답지 않은 일입니다.

여전히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낙심하고 좌절할 될 때도 있습니다. 영성일기를 공개하기가 부끄럽고, 실수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이상한 것 한다고 오해받기도 하고 별의 별 말을 듣기도 합니다. 완벽주의 적인 성향인 제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저는 누군가가 정말 주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따라 살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은 너무 많이 흘러갔습니다. 이젠 더 이상 어떤 사람을 기다릴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젠 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야만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만큼은 실수할까, 실패할까 두려워하거나 사람들이 뭐라 할까 봐 움츠리고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 만큼은 결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목회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목사이면서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저 자신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친밀함에 눈이 뜨이게 하시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지금도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울 때면 잠잠히 예수님을 바라 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해 주실 일들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회개하지 않고 있는 죄 외에는 두려워 할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속회 방학 중인데 영성일기 꾸준히 쓰고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두려움이 없고 도전적이고 모험심이 많아 이것도 잘 하고 저것도 잘하여 팔방미인 소리를 듣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친밀하지 못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복근만들기 열풍인데, 죽을 때 복근 아까와서 어떻게 죽을까 괜한 걱정이 듭니다.
다른 것은 다 잘하는데 주님과 친밀하지 않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주님이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믿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가을이 오는 것을 믿으려고 애를 씁니까? 하나님의 나라, 영생도 이렇게 믿어져야 정상입니다. 믿어져야 선택을 올바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이나 금요일, 주님 면회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낳아준 부모도 떨어져 살고 이따금 만나다 보면 사랑을 느끼기 어렵게 됩니다
예수님과 실제 사랑을 나누며 살기 원한다면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동행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100만 명의 영혼을 구원했다는 드와이트 무디, 그는 처음에 믿음이 번개처럼 위로부터 임할 줄로 여기고 막연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0장 17절을 읽고, 믿음은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읽고, 또 기도하고, 또 성경 읽기를 계속하면서, 자신의 믿음이 자라남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자리에 저처럼 소심하고 용기없고 그래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다 못해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믿음으로 사는 훈련 만큼은 놓지면 안됩니다.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24 시간 주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이 두렵지 않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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