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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깝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기꺼이 내십시오 (마 23:23-24) - 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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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기꺼이 내십시오 (마 23:23-24)

교회 내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있다면 헌금에 관한 문제일 것입니다. 헌금 가운데서도 당연 십일조에 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새로 부임하는 교회의 직분자들로부터 이런 요구를 듣는다고 합니다. 헌금에 대한 설교는 하지 말라 혹은 초신자들이 있으니 십일조에 대해서는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헌금이나 물질에 관한 설교를 몇 번이나 들어 보셨는지요? 저도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섬겨 오면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물질에 관한 말씀은 자의든 타의든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동안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38번의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그 가운데 무려 16번이나 물질에 관련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과연 우리는 물질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혹여나 내가 주일마다 내고 있는 헌금생활이 과연 바른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교회에서 직분자로 섬기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욱이 물질과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이신 존 웨슬리 목사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공공연하게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머니 속의 지갑이 회개하진 않은 신앙인은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이 아니다." 웨슬리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이 결코 허튼 소리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수입의 십 분의 일을 헌금으로 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부자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부자들의 입장은 잘 모르지만 요즘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특히 수입이 넉넉하지 않아 늘 쪼들리는 사람들이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헌금이 십일조입니다. 

그런 점에서 십일조 헌금은 분명히 믿음의 결단이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임이 틀림없습니다. 제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말해도 십일조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청년부를 담당할 때마다 제일 먼저 청년들에게 가르쳤던 것이 바로 이 십일조의 문제였습니다. 앞으로 자신의 미래를 건설하고 가정을 꾸려 나가는 데 있어서 바로 헌금생활, 십일조 생활이 그들의 신앙의 큰 길라잡이를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아이들에게도 다른 것은 몰라도 헌금 드리는 훈련만큼은 꼭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이 얻게 된 돈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주지시켜 주고 있습니다.

십일조 헌금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 성경 레위기 27장에 나옵니다. 30-33절을 읽겠습니다.

30 그리고 그 땅의 십 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 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31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 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32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33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방금 읽었던 성경말씀에 의하면 십일조 헌금으로 바쳐야 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땅에서 난 것의 십 분의 일인데, 곡식이나 과일이나 다 수확한 것의 십 분의 일은 주님께 바쳐야 할 거룩한 것입니다. 또한 소 떼와 양 떼에서도 열 마리마다 한 마리씩은 주님께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레위기 27장 마지막 절인 34절에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

그런데 신명기 14장에 가면 십일조를 내야 하는 것의 범위가 좀 더 확대됩니다.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십일조로 바쳐야 하는 것은 곡식과 짐승의 십일조뿐만 아니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까지 드려야 하는 것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구절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농경사회에서 모든 수입의 십 분의 일은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즉 십일조는 어디에 쓰시려고 바치라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민수기 18장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8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거제물 곧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한 모든 헌물을 네가 주관하게 하고 네가 기름 부음을 받았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너와 네 아들들에게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주노라
9 지성물 중에 불사르지 아니한 것은 네 것이라 그들이 내게 드리는 모든 헌물의 모든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물은 다 지극히 거룩한즉 너와 네 아들들에게 돌리리니
10 지극히 거룩하게 여김으로 먹으라 이는 네게 성물인즉 남자들이 다 먹을지니라
11 네게 돌릴 것은 이것이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거제물과 모든 요제물이라 내가 그것을 너와 네 자녀에게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주었은즉 네 집의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니라
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1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의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서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14 이스라엘 중에서 특별히 드린 모든 것은 네 것이 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론이 누구입니까? 모세의 형으로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제사장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리고 그들이 속한 레위 지파는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땅을 나누어 가졌을 때 그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따로 몫을 떼어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제물로 들어오는 것들입니다. 열두 지파가 바친 것 중 불로 태워 바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 제사장들이 먹고 사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8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8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거제물 곧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한 모든 헌물을 네가 주관하게 하고 네가 기름 부음을 받았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너와 네 아들들에게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주노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12-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1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의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서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14 이스라엘 중에서 특별히 드린 모든 것은 네 것이 되리라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못 오해하면 오늘 날 목회자가 교회 헌금을 마음대로 써도 되는 것으로 잘 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구약의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를 자신들이 먹고 살기 위해 다 사용한 것처럼 오해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십일조의 참된 정신을 말해 줍니다. 바로 신명기 14:28-29절입니다.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 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매 삼 년 끝에, 그러니까 삼 년에 한 번씩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는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해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 성 안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 년에 한 번씩은 십일조를 모아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데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는 마땅히 믿음의 고백으로 내는 것이며, 그것으로 제사장은 물론이요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와 같이 살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썼던 것입니다. 즉 십일조 헌금을 통해 교회와 사역자들의 삶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지키는데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오늘의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십일조 헌금을 정확히 바쳤습니다. 그들은 곡식, 포도주, 기름, 소나 양의 십일조를 분명히 바쳤습니다. 그들은 심지어는 그것들뿐만 아니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구약성경에 바치라고 나와 있지 않은 향료들의 십일조까지 또박또박 바쳤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일조의 근본정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신명기 14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신명기 14장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 정리하면 바로 이것입니다. 정의와 자비와 신의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이 말씀은 진짜 중요한 십일조의 정신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바친다고 큰소리치면서 정작 중요한 정의도 버리고, 자비도 없고, 신의도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큰소리칠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정의, 자비, 신의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선 정의란 엄밀히 말하면 ‘공정한 재판’을 뜻합니다. 아모스 5장에 가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제가 이것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21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22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23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24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정의가 없는 헌금생활과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역겹다고 하십니다. 참으로 놀랄 말씀입니다.

자비 역시 고아와 과부, 떠돌이 그리고 차지할 몫이 없는 제사장들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는 것이며, 신의란 하나님께 대한 변치 않는 신앙과 주위 사람들에게 변치 않는 성실성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십일조 헌금을 바치고, 그것은 다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가장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는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바친다고 큰소리칠 것도 없고, 적게 바친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십일조를 드리면 됩니다. 단, 정의를 이루기 위한 마음, 부족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는 자비, 모든 관계에 충실한 신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정의, 자비, 신의가 없다면 그래서 십일조 많이 바쳐서 내가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야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단순한 소경놀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분명 철저한 십일조를 바쳤지만 거기에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가 빠졌기에 그들은 눈 먼 인도자들이었으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 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심지어 모든 음료수를 마실 때마다 천으로 걸러 내어 마셨는데, 그 이유는 음료수에 벌레가 빠져 있을 수 있고 그 벌레들 가운데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불결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저버렸기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1장 4절에 나오는 대로 낙타는 불결한 짐승이기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십일조를 바친다고 큰소리치면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탐욕스럽고, 불결하고, 죄악으로 가득 찬 자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위선자들이요, 저주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일조의 참된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기길 바랍니다. 우리의 정성스러운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내는 십일조가 아깝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겠다고 고백하면서 우리가 드리는 물질과 우리의 삶은 어떤지 뒤돌아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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