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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도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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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눅 19:1-10)


지나온 삶의 시간들 속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제가 붙잡았던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따라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합력하여 풀리는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꼬여갑니까?  무엇이 잘 안됩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장래에 대한 것이 불확실합니까?  무엇인가 아무리 봐도 내 생각대로 잘 안되고 있습니까?  도저히 내 힘으로는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살아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점점 더 늪에 빠진 것처럼 빠져 들어갑니까?

일을 이루시는 여호와, 그 일을 성취하는 여호와, 그 하나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제가 살아오면서 깨닫는 것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가짜 믿음들은 어려울 때 떠나고 맙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제비는 인간이 뽑아도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눈에 나타난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세계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눈에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일희일비해서는 안됩니다.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세계, 하나님이 준비하신 더 놀라운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위대한 신앙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을 성경은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믿고서도 할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을 교인이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교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증인이 필요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인된 삶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증인된 삶을 원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믿었더니 고비 고비마다 어려움을 넘기면서 이겼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믿음으로 만든 부모의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가 있어야 합니다.

동양의 유교권만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문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무난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무던하다, 원만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 튀지 말라는 것입니다.  뭔가를 해 보려는 사람들을 무난한 사람들이 잡아 내립니다.  그리고 죽여버립니다.  그래서는 기관장을 세울 때에도 "무난하니까 저 사람을 시켜라"는 말들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의 조직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무난은 최상의 적입니다.  결코 무난하지 마십시오.  모세가 무난했습니까?  바울이 무난했습니까?  아닙니다.  무난한 사람들끼리 모여 가지고 무난한 짓이나 하는 조직은 해체시켜야 합니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그가 무슨 무난한 사람입니까?  그가 무난한 사람이었다면 열명의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원망하며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 우리는 저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고 할 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홀로 서서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외치면서 결코 무난하지 않은 행동을 했습니다.  요셉은 또 어떻습니까?  그가 어디 무난한 사람입니까?  무난한 형제들 속에서 그는 언제나 스타였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리고 역사를 보십시오.  무난한 사람은 무난한 짓이나 하면서 이름도 없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붙잡고 하나님 안에서 튀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은 모두가 역사의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무난한 사람들이 모인 무난한 조직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변화입니다.  무난한 사회에서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눈치나 보면서 비위를 맞추기 위한 사람들로만 충만합니다.  그런 조직에서의 사람들은 오직 자기 일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래 가지고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들은 끝없이 변해 갑니다.  또 변해야 합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다 변해 갑니다.  굳어진 생명에 내일은 없습니다.  굳어진 것은 죽은 것만 굳어집니다.  나무도 그렇고, 돌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은 결코 무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없이 변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굳으면 큰 일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굳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주도적으로 자기 일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끝없이 미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으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안되지만 여호와의 성령으로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한 변화를 시도하십시오.  변질되면 안되지만 거룩하게 변해야 합니다.  변질되어도 망하지만 변하지 않아도 망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믿기 이전의 삶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생으로의 변화를 시작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주 앞에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변화를 시작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변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 어디까지 변할 수 있겠는가?"  내 안에서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내 약점을 발견할 때마다,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결코 아름답지 못한 어떤 모습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 질문을 합니다.  사람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나도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변할 수 있다면 어디까지 변해야 하는가?

오늘 봉독한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라는 사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다는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삭개오의 인생을 보면서 하나님 안에서의 모든 인생들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의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이 삭개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말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사람의 정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누구였는가?  그리고 둘째로 그를 변화시켰던 기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를 변화될 수 있었던 기회를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첫째로 삭개오, 그는 누구였습니까?  성경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본문에 보면 이 사람의 이름이 삭개오였다고 말합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청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날 이 사람의 집에 들어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죄인의 집에 예수가 들어갔다."  청결해야 할 삭개오, 그러나 그는 결코 청결하지 못한 동네에서 소문난 죄인이었습니다.  삭개오, 그는 이름 값을 하지 못한 채 인생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인 기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 좋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를 않습니까!  우리 부모가 나를 낳아 주시고 내게 좋은 이름을 붙여 주시면서 좋은 인생을 살라고 주신 이름은 우리 모두의 사회적 기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회적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들을 저마다 다 갖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금을 거두고 다니는 사람들의 권력은 대단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권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은 모든 사람들이 탐하는 것입니다.

니체라는 철학자는 인간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의지가 권력에 대한 의지다."  그러니까 권력은 정치인들만이 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안에서 고부간의 싸움이 한창일 때, 거기에도 권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곳간 열쇠를 쥐는가!  이것도 권력에 대한 싸움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권력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리장이니까!  그런데 권력이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권력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권력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2절에 보니까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 또한 부자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자!"  얼마나 듣기 좋은 이름입니까?  우리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우상이 있다면 만물일 것입니다.  돈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는 돈에 구린내가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청년들이 모여서 지도자와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도자가 청년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들은 인생을 사는데 뭐가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아마 거기에는 남자들만 모였던 것 같습니다.  한 청년이 대답하기를 "뭐니 뭐니해도 머니죠. 돈이죠."  다음에 옆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여자가 필요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저는 돈과 여자, 둘 다 필요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대답하기를 "그러면 돈 여자를 가져라.  돈도 필요하고 여자도 필요하다면 돈 여자를 가져라."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입니까?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돈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돈으로 인생의 목적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돈으로 죽음 건너편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우리 나라의 부자들은 평안이라는 단어를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은행의 마감 시간을 넘기고 나면 그제서야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잠시 접어둘 수가 있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삭개오는 권력도 있었고, 부요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인생의 문제를 끌어안고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는 어떤 분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그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기회가 말입니다.  그 기회를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예수가 지나가신다.  저 갈리리에서, 요단강 저 동편의 데가볼리에서 만난 사람마다 인생이 변했다고 소리치며 따라다니는 저 예수!  그 예수가 지금 우리 동네에 와서 우리 곁을 지나가신다.  열 두 해를 혈루증을 앓으면서,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재산을 탕진했지만 그러나 고쳐지지 않는 병 때문에 인생에 대한 절망 속에 살던 한 여인이 지나가는 나사렛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자기 병이 순식간에 치료되었다고 소문난 치료자 예수.  그 예수가 지나가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인생이 변화 받기를 갈망하는 그에게 있어서 분명히 기회였습니다.

돈으로 살 수가 없었던 인생의 의미, 권력으로 살 수가 없었던 인생의 의미, 그런데 그런 인생의 의미에 굶주리고 있었던 삭개오에게 놀라운 기회가 왔습니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기회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래서 빅토르 위고는 기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회는 인생의 가장 위대한 자산이다."

누군가 기회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옛날 그리스의 시락쿠스라는 거리에 이상한 동상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동상은 날개가 있는데, 날개가 어깨 죽지에 와서 달린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앞머리는 아주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고.

사람이 머리가 벗어지는 것도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뱅뱅 돌아가면서 머리가 벗어지는 분이 있습니다.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운데만 쏙 빠지시는 분이 있습니다.  속알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데나 빠집니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동상은 앞에 머리가 많고 뒤에는 머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동상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회.  기회.  기회.  그대는 왜 날개를 발에 달고 있는가?  더 빨리 빨리, 빨리 날으고 싶어서.  걷고 싶어서.  그대의 앞머리는 왜 이렇게 무성한가?  내가 올 때 쉽게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왜 대머리인가?  다시는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기회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예수가 지나가신다.  구원자 예수.  치료자 예수.  그를 만났던 사람들마다 이상하게 인생이 바뀌었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가 있다고, 인생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가 없다고 말하는 그 놀라운 예수.  그 예수가 지나가신다.  이것은 분명히 놀라운 기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거기를 지나가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자기의 권력과 명예와 부를 가지고도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예수를 만나고 싶었다고 ….  그래서 예수를 기다리는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한참동안 읽다 보면 결론이 바뀝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라는 이 사람은 아마도 키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사람들이 많이 들끓고 있었고, 그 군중들의 외침 속에서 키 작은 삭개오가 쉽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만나야만 했습니다.  만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영혼의 갈증,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만나고자 열망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뽕나무라고 번역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뽕나무가 아닙니다.  돌무화과나무입니다.

세무서장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체면의 옷을 벗어 던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내가 꼭 예수를 만나야 겠다.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를 반드시 만나야 겠다.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가 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성경의 이야기는 이렇게 변합니다.  어쩌면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으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앞에 지나가기만 해 봐라.  그때에는 목이 터져라 소리칠 거다.  그런데 뭐라고 부르지?  예수님.  그냥 이렇게 부르면 실례일거야.  앞에다 뭐라고 붙여야지.  인류의 위대한 스승 예수여.  그 말은 좀 형식적인가?  나사렛 예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 앞에 오십니다.  예수님이 돌무화과나무 앞에 오시더니 삭개오가 부르기 전에 먼저 삭개오를 올려다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삭개오야."

사랑하는 여러분, 이때 삭개오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저분이 내 이름을 알아?  나를 만나지도 않고 내 이름을 부르는 저 예수.  예수는 도대체 누구일까?"

저는 성경을 읽다가 늘 저를 감동시키는 부분이 예수님이 사람들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좋아하십니다.  마리아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자, 욕심이 많았던 여자.  그래서 이름도 '막 달라 마리아.'  그래도 그 욕심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던 여자.  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주시고, 거룩한 여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모른 체 동산에 묻혀있는 줄을 알고 예수님이 묻히신 동산에 올랐던 이 여인.  새벽이었는데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어디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야."  깜짝 놀라서 보았습니다.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예수님,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의 음성 ….

마리아야, 삭개오야, 나사로야,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를 60억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인류 덩어리로 취급하지 않고, 우리 개개인을 알고 이해하고 찾아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나의 좌절을 이해하시고 찾아오십니다.  나의 고독을 이해하시고 찾아오십니다.  나의 방황을 이해하시고, 나의 삶에서 당한 말 못할 슬픔을 이해하시고 찾아오십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 벽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내 모습, 답답한 내 모습을 아시는 그 예수님.  찾아와서 그는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쯤 읽으면 이 이야기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도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나도 예수님을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  그를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고 싶어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알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만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삭개오를 찾으시던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을 찾습니다.  마음에 무거운 짐을 안고 힘들게 이 자리에 나오셨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초대일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것을 아십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이 시간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은 어디입니까?  살다가 살다가 죽으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모르신다고요.  그래서 인생은 방황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인류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라는 한 개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나를 아시는 분.  나를 이름으로 아시고, 나의 좌절과 내 눈물과 내 고독과 내 갈등을 이해하시는 분.  내가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와 나의 역량을 아시는 분.  내 모든 삶의 발자취를 기억하시고 아시는 그 분.  여러분을 포기할 수 없어 하시는 그 분.  여러분을 너무나도 만나고 싶어서 이 시간 여러분 곁에 조용히 그분은 지금도 다가오십니다.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지금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지금 내 곁으로 조용히 다가오는 이 놀라운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삭개오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삭개오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삭개오가 어떻게 응답을 했습니까?  본문 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다시 한 번 본문을 보십시다.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그런데 삭개오는 어떻게 응답했다고 했습니까?  "급히 내려와 …."  예수님도 급하고, 삭개오도 급합니다.  꼭 한국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다 급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신앙의 결단도 그렇게 급하게 할수록 좋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신앙의 결단은 급할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급한데 신앙만은 자꾸 급하지 않게 뒤로 미루어 두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이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이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이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말합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받아야 할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의 결단에 있어서는 급할수록 좋습니다.  신앙의 결단을 늦게 하다가 이 매 맞고, 저 매 맞고, 뭇매를 맞고서야 돌아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모셔드리면서 이미 그는 자기의 전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 나왔다, 안 나왔다 하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신앙이 참 신앙이 없으니까, 가끔 나왔다, 안 나왔다.  그래서 한 번은 찾아갔습니다.  전화를 걸어도 안되고, 밤에 가면 있겠지.  그래서 밤중에 아파트로 습격을 했습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무개 목삽니다"라고 문을 두드리니까, 목사님의 음성을 듣자 마자 갑자기 조용해지더랍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이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성경구절을 하나 써놓았습니다.  나중에 목사님이 가시고 난 다음에 그 분이 문을 열고 보니까 쪽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이게 뭘까?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리라."

좀 미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날 교회에 갔습니다.  그래도 차마 목사님을 뵙기는 어색할 것 같아서 목사님 사무실에다 이 교인이 쪽지 하나를 남겨놓고 갔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도 오늘 교회 다녀갑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다 창세기 3장 10절을 써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뭔가 목사님도 찾아보았더니, 창세기 3장 10절에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사랑하시면서 내 마음속에 찾아오시겠다고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는 예수님.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겠다.

삭개오는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 가정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자 마자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님 당시에 사업을 잘한 사업가가 자기 재산의 4분의 1 정도를 환원하는 것은 훌륭한 사업가의 윤리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4분의 1 정도가 아니라,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변한 겁니다.  변해도 굉장히 변한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재산의 절반을 나눠서 앞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소위 도덕적인 설교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자발적으로 인생을 바꾸겠다고 선언합니다.  변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자 마자 이 변화된 모습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하자마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 말을 바꾸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오늘 네가 구원을 받았고, 오늘부터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의 딸이야.  네가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수가 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을 이렇게는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도 좀 변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삭개오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삭개오가 한 결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이 자리를 떠나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된 인생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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