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기 묘실을 파 둔 사람 아사 (대하 16:7-14)

첨부 1


자기 묘실을 파 둔 사람 아사 (대하 16:7-14)  

오늘은 남 왕국 유다 왕이었던 아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어느 날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 왕에게 왔습니다. 7절 앞부분을 보면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니가 아사 왕을 찾아온 이유는 왕을 책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사 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미국 일간지 <시애틀타임지>에는 지난 7월 28일에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여성 작가 <제인 로터>의 부고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고기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이 글을 죽은 본인이  직접 썼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말기 자궁내막암으로 죽어가는 것의 몇 안 되는 장점은 바로 내 부고를 쓸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부고를 직접 썼습니다. 딸과 아들에게는 <인생길을 가다 보면 장애물을 만나기 마련이란다. 하지만 그 장애물 자체가 곧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렴!>이라고 조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영원한 휴가라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일로 슬퍼하는 대신 나의 충만했던 삶을 기뻐하기로 결정했다. 태양, 달, 호숫가의 산책, 내 손을 쥐던 어린아이 ........ 이 신나는 세상으로부터 영원한 휴가를 떠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아름다운 날, 여기 있어서 행복했다. 사랑을 담아, 제인.>이라고 끝을 맺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미리 준비하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거나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버티는 사람에 비해 대단히 현명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아사왕도 그런 점에서 현명한 인물이었습니다. 14절을 보면 <다윗 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라고 했습니다. 아사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 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무덤을 준비할 정도로 현명했던 아사 왕에게 무슨 책망할 일이 있었을까요? 

약한 사람은 누군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약한 사람이 강한 존재를 의지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의지하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지해서는 안 될 존재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썩은 동아줄을 잡는 사람은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흔들리는 바위를 밟는 사람은 그 바위가 구를 때 함께 추락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의지할 대상을 잘못 찾는 게 문제입니다. 아사왕의 잘못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7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아사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 대신 아람 왕을 의지했습니다. 

이 사건의 맥락은 이렇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 후 삼십 육년이 되었을 때 북 왕국 이스라엘의 <바아사>왕이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이 때 아사는 북 왕국보다 북쪽에 있던 아람의 왕 <벤하닷>에게 은금 보화를 보내면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아사가 벤하닷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 역대하 16장 3절에 나옵니다.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본래 아람 왕 벤하닷과 북 왕국 이스라엘 사이에는 동맹조약이 맺어져 있었는데, 벤하닷은 아사가 보낸 은금을 받고 동맹국 이스라엘을 쳤습니다. 이러다 보니 바아사 왕은 황급히 군사를 돌려 되돌아가게 되었고, 아사 왕은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아사 왕의 계획대로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착오였고, 실패였습니다. 

첫째, 그것은 <의지할 존재를 잘못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의지할 때는 가장 강한 자와 한 편이 되어야 합니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 동네 뒷골목에서 축구를 하곤 했습니다. 

몇 해 전 그 골목길에 가보니 우리 교회 앞 길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땐 제 몸집이 작아서인지 운동장같이 넓어보였습니다. 축구를 할 때마다 신경 쓰이는 게 있었습니다. 기왕이면 이겨야 하는데, 이기려면 실력 좋은 아이들과 한 편이 되어야 했습니다. 

편을 뽑는 방법은 특이했습니다. 저 보다 한 살 위의 동네 형들 둘이 중심이 되어 편을 짭니다. 두 사람이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길 때마다 자기편이 될 아이들을 한 명씩 지명합니다. 지명당한 아이는 그 형 뒤로 가서 섭니다. 그 때 저는 중국집 아들인 동호형이 저를 받아주길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그 형이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겨 <운성이!>라고 불러주는 순간,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과 한 편이 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긴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형은 거의 선수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공을 많이 만져볼 기회가 없어도, 이기기만 하면 신이 났습니다. 그 동호 형이 지금은 교회 집사가 되어 저보고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만약 다른 형이 제 이름을 부르면 그 날은 안 되는 날입니다. 

여러분, 약한 사람이 이기는 방법은 강한 자와 한 편이 되는 것입니다. 강한 자들이 여럿이라면 가장 강한 자와 한 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사 왕은 하나님과 한 편이 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야말로 최강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지혜를 당하며, 그 누가 하나님의 능력을 감당하겠습니까? 


둘째로, 아람의 벤하닷을 의지한 행동은 <복을 발로 차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사가 볼 때 아람은 자신들이 의지할 대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더 큰 복을 주셔서 장차 아람도 유다의 다스림을 받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아사가 오히려 아람을 의지하게 되자, 아람은 유다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고, 그 후로 계속 유다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7절 후반부를 다시 보십시오.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아람을 누르고 강대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아람을 의지함으로써 그 종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사는 자신이 다스리게 될 아람을 오히려 의지하게 되는 이상한 결과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다스릴 대상>과 <의지할 대상>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는 다스릴 대상과 의지할 대상이 분명하게 주어졌습니다. 다스릴 대상은 자연만물이었습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자연만물을 다스릴 존재였습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하고 의지할 대상이었습니다. 사람이 먹고 살아가는 모든 조건을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스릴 대상과 의지할 대상을 혼돈하였습니다. 다스릴 대상인 자연만물을 의지할 대상으로 착각하여 늘의 해와 달과 별을 의지하려다보니 태양과 달과 별을 숭배하는 종교가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 돈을 다스리려하지 않고, 의지하려 하다 보니, 물질의 노예가 되어 영혼과 몸을 팔게 되었습니다. 다스릴 대상을 의지하는 그 순간 사람들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타락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그 분만이 가장 강하시고, 변함없는 분입니다. 앞에서도 본 것처럼 아람의 벤하닷은 본래 북 왕국 이스라엘과 동맹관계에 있었는데, 아사 왕이 보낸 은금보화에 눈이 멀어 동맹국을 뒤에서 쳤습니다. 동맹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아사는 이런 벤하닷을 의지했으니, 얼마나 허망합니까? 

세상엔 이런 배신이 허다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힙니다. 끝까지 신실한 분은 하나님 아버지뿐입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가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눈물 흘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사왕은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벤하닷을 의지하였을까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몰랐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결정적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를 맛본 체험이 있었습니다. 

역대하 14장 9절 이하를 보면 <구스 왕 세라>가 무려 백만 대군과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유다를 침공한 일이 있었습니다. 유다의 힘으로 이들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 때 아사왕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한 일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역대하 14장 11-1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들을 아사와 유다 사람들 앞에서 치시니 구스 사람들이 도망하는지라> 아멘!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했었습니다. 그리고 구스의 세라를 물리치고 기적 같은 승리를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선견자 하나니도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세요.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런데 아사는 그 때 그 일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과거의 은혜를 망각한 것이었습니다. 구스 왕 세라의 침략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잊었습니다. 

성도들의 심각한 병 중 하나가 영적 망각증세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과거는 올바른 미래가 어디 있는지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과거의 실패, 과거의 성공, 과거의 행동들은 미래를 비추는 등불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를 교훈 삼아 미래를 설계합니다. 그렇다면 아사는 과거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긴 경험을 토대로 아람의 벤하닷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했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목사가 되기로 한 것도, 지금까지 목회자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자신이, 제 가족이 병들었을 때, 외로웠을 때, 중대한 갈림길에 섰을 때, 어려웠던 모든 순간에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힘들었을 때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을 빼놓고는 저의 삶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모든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우셨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왔는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도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이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야 할 상황이 왔을 때, 제가 좋은 말로 위로하면 될 거라는 기대를 가집니다. 그러나 막상 그 분과 마주 앉을 때면 그 분의 마음을 움직이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교 준비를 할 때 <이 정도로 준비하면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칠 거야>라는 교만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지만, 강단에 올라올 때면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과거에 체험한 하나님의 손길을 잊지 마십시오. 그 분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의지할 대상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그 분을 통해 승리했다면, 지금도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선견자 하나니는 아사를 꾸짖으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아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전심으로 당신을 향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분의 눈앞에서 땅끝교회 성도들이 그런 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능력을 행하셔서 도우십니다. 하나님을 향하되 <전심으로> 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 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 하나니가 와서 꾸짖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촉구했을 때, 아사 왕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0절을 보세요.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아사는 하나니를 옥에 가두고, 또 백성들을 학대하였습니다. 현명한 군주였던 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영적 분별력이 없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아사 왕은 사십일 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십구 년째에 발에 병이 들었으니, 그는 이 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의원만 의지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니의 책망을 들었을 때 아사가 <내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이제부터 다시 하나님만 바라보겠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영적으로 어두워진 아사는 마치 낭떠러지를 미끄러지는 사람이 내려오면서 점점 가속도가 붙는 것처럼 그의 타락도 가속도가 붙어 하나님의 사람을 투옥시키고, 백성을 학대하는 생각도 못할 일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다면 선견자를 가두거나 백성을 학대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다른 문제를 가져왔고, 총체적 타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손가락 하나만 아프면 온 몸이 다 아픕니다. 한 가지 문제가 전체를 망 칩니다. 영적인 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 대해 믿음이 식어버린 사람이 다른 것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믿음이 식은 사람은 사랑도 제대로 못합니다. 순수한 헌신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식은 사람이 어떻게 말씀을 사모하며,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기도가 식은 사람,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한 부분에 병이 생기면 신앙 전체가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맡은 일을 하는데 기쁨이 없고, 화만 나고, 다른 사람이 원망스럽기만 하다면, 그건 자신의 신앙이 병든 증거입니다. 기도생활이 힘들다면 그건 어딘가 영적 병이 든 것입니다. 

헌금 드리는 게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에 대해, 삶에 대해 원망과 불평만 생긴다면 어딘가 병이 든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생각과 판단이 옳아보여도, 여러 가지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결국 그 모든 것의 궁극적 이유는 자신이 영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증세가 보인다면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이런 저런 말로 주변 사람에게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신앙이 병들어서 그렇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신앙의 회복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가족과 직장과 성도를 원망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북 왕국 바아사가 유다를 침공한 것은 그가 왕이 된 지 삼십육 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 대신 아람을 의지했으니까 아사는 왕위에 있던  사십일 년 중에서 마지막 오 년 동안에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마지막 오 년 동안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으니, 아사왕은 나이만 든 게 아니라, 영적으로도 늙어 영적 치매에 빠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아사 왕은 왕이 된 지 사십일 년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고, 자신이 파 둔 묘실에 장사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향 재료를 사용하여 장례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의 호화로운 장례가 어찌 살아있는 동안의 실수와 수치를 만회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죽을 줄 알고 묘실을 준비하는 현명함과 함께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 지혜도 있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할 존재임을 아는 현명함과 함께 이 죽음의 존재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 천국을 주시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준비하는 현명함도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준비하는 지혜가 있길 기원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삶의 경험이 축적될수록,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처럼 여겨질수록 오히려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평생을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김운성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