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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4) : 하나님 품으로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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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4) : 하나님 품으로 (눅 15:11-24)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여 구두닦이부터 시작하여 열심히 돈을 벌어 100억대 재산가가 되었답니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아들 둘은 열심히 공부시켜 변호사와 교수로 만들었고, 딸 둘은 의사와 회계사로 만들었답니다. 아들 딸 결혼 다 시켜 놓고 100억대의 자산을 가지고 있던 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 이제 아들 딸과 상관없이 둘이 남은 생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아들 딸에게는 돈을 써보았지만 자신과 이웃에게는 돈을 쓸 줄을 몰랐답니다. 이런 사람들을 구두쇠라고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부자인데도 밖에 나가 자장면 한 그릇 먹는데도 떨었답니다. 부자이지만 돈 쓸 줄도 모르고 궁색을 떨면서 살았답니다. 죽을 때까지 아들딸들에게 한 푼도 주지 않고 꼭 쥐고 살자고 다짐을 했답니다. 

어느 날 노부부가 식당에 갔는데 밥 한 그릇과 그릇 두 개를 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밥 한 그릇을 둘로 나누더니 할아버지가 밥 먹는 것만 열심히 구경만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주인이 할머니 "왜 식사하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할머니가 말하기를 "할아버지가 다 먹으면 틀니 빌려서 먹으려고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천지를 만드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면서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질 낮은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8)” 

다윗이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2)”라고 고백했듯이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주인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 것입니다. 아들된 우리가 아버지의 풍요를 누려야 합니다. 

오늘은 회복 시리즈 4번째로 우리의 삶의 질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 시대 같은 시간, 같은 나라, 같은 교회를 다니지만 사람마다 삶의 질이 다릅니다. 입이 있어 말을 하고,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듣고, 머리가 있어 생각하고 살지만 삶의 질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주 삶의 질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아들딸이지만 부모 밑에 살고 있는 청소년은 부모가 주는 용돈을 받고, 학비를 받아 학교에 다니며 사는데 가출한 청소년은 삶의 질이 전혀 다릅니다. 

현재 정부가 추정하는 가출 청소년은 20만 명 정도라고 합니다. 이들 중 여자 청소년이 약 12만 명될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이중 약 3만 명의 청소년은 살기 위해 성을 팔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먹여주고 재워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하우스 메이트', 일명 동거 파트너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pc방과 찜질방을 돌아다니다가 대부분 비슷한 처지끼리 모여 사는 '가출팸'(집 나와 모여 사는 가출청소년 집단)을 먼저 경험하게 되고 좀 더 편안한 생활을 위해 하우스 메이트를 찾게 된다고 합니다. 

가출하게 되면 결국 살기 위해 절도와 배신, 성폭력 등 각종 사건사고를 저지르게 되고 인생은 완전히 뒤틀려 버린다는 것입니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도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들 보면 꼭 가출 청소년처럼 살아갑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아버지 곁을 떠나 가출한 한 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두 아들 중, 작은 아들인데 이제 나이가 들자 아버지에게 재산을 상속해 달라고 합니다. 자신도 자기 인생이 있으니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껏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유대인의 상속법에 따라 작은 아들 몫인 1/3 재산을 상속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며칠이 안 되어 모든 재산을 돈으로 바꾸어 이민을 갔습니다. 그는 아버지 품을 떠나면 참 자유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 돈이면 재산을 증식하여 미래가 보장될 줄 알았습니다. 그 돈이면 행복이 보장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면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참으로 재미있게 살 줄 알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품에서보다 더 질 좋은 삶이 그에게 다가 올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1. 회복되어야 할 아들(아버지를 떠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떠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첫째, 허랑방탕하게 된 것입니다(13). 기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규범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으면 허랑방탕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 모든 재산을 낭비한 것입니다(14). 기준이 없으면 재능을 낭비합니다. 

셋째, 궁핍하게 되었습니다(14). 

넷째, 돼지 치는 노예처럼 살게 되었습니다(15). 

다섯째, 아무도 그를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16). 

삶의 질이 최악의 상태로 밀려갔습니다. 관계도 소유도, 삶의 수준도 마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도나고 개인 파산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주어진 것 다 잃어버리고 겨우 목숨만 남은 짐승 같은 인생이 된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어제 박 넝쿨이 시든 것 같아 화분에 물을 주고 화단의 수도꼭지를 잠그러 가는데 교회 앞 길거리에 어떤 젊은이가 누워 있었습니다. 가서 깨어 보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것 같아 경찰에 신고를 하니까 경찰이 왔습니다. 경찰이 그 사람을 보더니 우리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수첩에 그 사람 주소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상습적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왜 그렇게 산데요.”라고 물어 보자 “세상 살기가 너무 힘든가 봐요.”라고 했습니다. 삶의 질이 최악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좌를 봐도, 우를 봐도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마음대로 살면 행복해지고 부자가 되고, 마음껏 즐기고 사람들이 인정해 줄줄 알았는데 완전히 인생의 수렁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간섭을 받지 않고, 잔소리를 듣지 않고, 자발적으로 살면 삶의 질이 좋아질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최악의 상황에 빠져 버립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작은 아들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삶의 질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자유를 방해하는 존재로 생각하며 하나님을 떠나지만 인간은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간섭자, 독재자, 내 행복을 방해하는 자로 생각하고 떠나지만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인간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고, 쾌락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노예가 되고, 성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는 노예보다 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쥐엄열매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쾌락도 한 때였습니다. 부도 한 때였습니다. 유희도 한 때였습니다. 권력도, 명예도, 건강도 한 때입니다. 인생무상인 것입니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헛되고 헛된 것들입니다. 세상의 단맛이란 마치 껌을 씹을 때 느끼는 단맛과 같이 짧은 것입니다. 돈이 떨어지자 친구는커녕 쥐엄열매 하나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정욕을 좆아 달려간 말로가 굶주림과 고독과 슬픔이 다가 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재물과 쾌락, 인기와 명예와 권세를 좇아 달려가지만 참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오늘 아들은 유대인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모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교회는 다니는 것 같고, 하나님을 아는 것같은데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자기 방식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는 것입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담그고 사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면서도 교회생활 따로 직장생활 따로 가정생활 따로 사는 것입니다. 갈등은 하지만 늘 자기가 주인이 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노아 때를 보십시오. 패역한 백성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을 노아의 가족만 남겨 놓고 다 쓸어 버렸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 타락한 백성들을 유황불로 다 태워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배역하고 떠난 고라의 무리들을 보십시오. 염병으로 죽어갔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 주려했습니다. 그 때 유대인 군중들이 말합니다. 

25절에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질어다"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을 떠난 유대인들 결국 그들의 후손은 AD 70년에 110만이 죽었습니다. 2차 대전 때 히틀러에 의해 600만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마저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가 있고, 하나님을 떠나면 행복이 보장되고, 하나님을 떠나면 쾌락이 있고, 하나님을 떠나면 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라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남북을 보십시오. 그래도 하나님 품에 있는 사람이 많은 남한은 세계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20개 잘 사는 나라에 속했습니다. 신앙을 죽이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은 어떻습니까? 평양에 교회가 부흥될 때는 남한 보다 잘 살았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풍요롭고 행복합니까? 참 자유함을 누리고 있습니까? 인간다운 삶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행복할 것 같고 하나님을 떠나면 참 자유를 누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의 흉년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스도예프스키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했습니다. 


2. 회복케 해 주시는 하나님(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행복으로 회복되실 원하시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삶의 질이 회복되려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아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신 분이었습니다(12). 소통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독재자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를 말살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둘째, 풍족하신 아버지입니다(17). 우리의 것을 빼앗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것으로 부자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언제나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20). 끝까지 기다리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넷째,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5)”

다섯째,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아버지입니다.(22-24)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고,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시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시고, 발에 신을 신기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뿐 아니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 찬치를 베푸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완전히 삶의 질을 회복시키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리가 먼데도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한 번도 잘못을 추궁하지 않습니다. 종들에게 좋은 옷을 가져다주고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며 즐거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가지 이유입니다. 죽은 아들 살아났기 때문입니다(24). 이것이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고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어떤 아들입니까? 돈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중히 여긴 아들입니다. 인륜과 도덕과 같은 삶의 중요한 원칙들을 우습게 여기고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돈을 중히 여긴 아들입니다. 그렇다고 돈의 진정한 가치는 안 아들도 아닙니다. 돈을 땀 흘려 번 적이 없고 아버지의 것을 허랑방탕하게 육체의 쾌락만을 추구하다 탕진한 아들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입니다. 거지가 된 아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용서해 주고 받아주십니다. 아버지는 새로운 언약의 표시로 가락지를 끼워 줍니다.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발을 신겨줍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부터 이 신발 신고 새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말입니다. 이게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삶의 질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른 나무처럼 시든 영적 상태입니까?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뭄으로 바닥 들어낸 논 같이 갈라진 마음 상태입니까?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마른 우물처럼 정서적으로 메말라 바닥이 났습니까? 아픔이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쁨도 기쁨으로 느껴지지 않고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들어도 무감각한 상태에 있습니까?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 품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의 위기에 처해 불안과 걱정으로 살고 있습니까? 풍요로우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절망적 상황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위한 출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기 위한 통로이며 수단입니다. 하나님께 나와 회복하라는 기회입니다. 

금세기에 평신도로서 전 세계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분이 있다면 아마 영국의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서 가르치면서 주옥같이 많은 소설, 책들을 썼든 씨에스 루이스라는 교수일 것입니다. 이 분은 부모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한 때 하나님을 떠났던 분입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고 종교와 학문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며 평생 독신으로 살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60이 되어 20대의 사랑이 찾아 왔습니다. 

조이 데이빗먼(JoyDavidman)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두 아들의 엄마로서 결혼 생활의 파경으로 이혼한 여인이었습니다. 골수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루이스는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루이스에게 또다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루이스는 조이의 시한부 인생을 끌어안고 3개월 후 조이의 병상에서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병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병원은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때 루이스는 기도로 시간을 보내며 치유의 기적을 소망했다고 합니다. 한때 병세에 호전을 보여 조이가 원했던 그리스로 늦은 신혼여행을 떠났답니다. 그러나 1959년 골수암이 재발했고 이듬해 끝내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루이스는 골다공증과 같은 자신의 육체적 고통과 죽어가는 아내를 마지막 몇 주간 보살피느라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서 조이의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격정적으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깨달은 것입니다. 

C.S. 루이스교수가 한번은 옥스포드에서 설교를 하고 나왔을 때 어떤 젊은이가 그를 붙들고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신이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 세상에 형언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왜 이다지도 많습니까?" 

그때 루이스교수는 '젊은이 형제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오만한데,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교만했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교만한 인간, 그리고 오만한 인간. 고통마저 없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교만했겠는가! 고통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지, 하나님의 메가폰이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고통과 역경 속에서 있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우리를 찾아와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부인하고 삶의 밑바닥에 내려갔습니다. 그 때 그 고통의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어떻게 하십니까? 저주하고 도망간 그를 예수님을 찾아 가셔서 먹을 것을 주시고 베드로야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세 번에 걸쳐 이 질문을 하고 내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책망하지 않습니다. 용서하십니다. 삶의 밑바닥에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살인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살인 방조자로 삶의 밑바닥에 내려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사명을 주어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살인자입니다. 도망갔습니다. 처가살이 하며 40년이 흘렀습니다. 삶의 밑바닥에 내려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사명을 주고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간음죄를 지고 살인죄를 져 삶의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어떤 처지에 있던지 하나님 품으로 나아가면 회복의 길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 29:11)”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 16:3)”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3. 회복의 방법(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당신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바늘귀만큼의 마음만 열어도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금마차를 타고 달려 내려갈 준비를 하고 계신다." 우리가 바늘귀 만큼의 마음이라고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회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자신의 질 낮은 비참한 형편을 인정해야 합니다(17).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대로 가면 주려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살면 지옥에 가고 이 대로 살면 개인 파산을 당하고 이 대로 살면 병들고 이 대로 살면 중독으로 삶은 파멸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문밖에 두두리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문을 열지 않으면 누구도 열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돌이킬 때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삶을 회복시켜 주시는 풍성한 아버지를 향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나아가기만 하면 풍요롭게 살 길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 풍요가 아니라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 풍요하는 사실을 고난을 통해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 아버지에게 가면 살길이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전환은 생각의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은 이대로 살면 주려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가면 풍족한 삶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면 살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방향이 잘 못되면 속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삶의 목표를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던 발걸음을 아버지께로 향해지는 것입니다. 물질 지향적 삶, 쾌락 지향적(13)을 품꾼이라도 좋으니 아버지 안에 있는 삶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아버지의 간섭을 귀찮게 여겼습니다. 아버지께서 원하는 삶의 방식에 동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유가 제한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구속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호등이 걸리적거린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새가 날개가 걸리적거린다고 다 잘라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날아가는데 공기가 저항이 된다고 진공상태를 만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기가 물 때문에 참새처럼 날을 수 없다고 물 없는 육지로 뛰어 오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물마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방식을 거슬리면 불행과 죽음이 따르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식을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그 방식을 떠나면 인간은 불행해집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에는 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목동에서 팔려갔으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절망을 계곡에서 뒹굴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장사로 살아야 했을 텐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곳을 떠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에게도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았을 법한데 호렙산 떨기나무 불 가운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민족을 해방시키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물고기 배속에서 요나는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전환점을 맞이하였습니다. 

셋째, 참회하는 것입니다(18-19).

아버지 뿐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거역하고 무시한 태도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무시한 태도라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교훈을 듣기 싫어하고 매사 반항적이고, 경건한 아버지의 충고를 잔소리로만 여겼다는 것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제 품꾼의 하나도 좋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5:32)"라고 했습니다.

넷째, 아버지 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20).

통회 자복하였으면 실제 실행하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판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을 바로 가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나아가는데 방해 요소는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때 크게 화를 내는 큰 아들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동생으로 취급하지 않고 아버지의 이 아들로 취급하는 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 내 아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찾은 아들이라고 기뻐합니다(24) 

그런데 3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나에게 손해를 주는 사람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람,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불결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방인, 창기, 세리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함께 즐거워할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타락했고 아무리 부족하고 아무리 볼품없고 아무리 가정에 망신을 시키는 아들이지만 그 아들 사랑해야 할 사람이고 함께 관계를 누려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갈 때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교회에 나오느냐로 비아냥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 아버지께 나아가는데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입니다. 그것에 넘어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가나안 교인됩니다. 안나가 교인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돌아가야 회복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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