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약하심으로 못 박히신 그리스도 (욥 23:15-17, 고후 13:3-4)

첨부 1


약하심으로 못 박히신 그리스도 (욥 23:15-17, 고후 13:3-4) 

삼손은 성경의 인물 가운데서 가장 힘센 사람입니다. 힘센 삼손은 구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삼손은 홀로 모든 원수를 갚고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강한 자가 가지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약점으로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이 잘리고, 자기가 죽음으로 블레셋을 이겼습니다. 

그는 다곤 신전의 두 기둥 사이에 팔을 뻗고 신전을 무너뜨려 원수들을 괴멸시켰습니다. 두 팔을 뻗는 삼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형으로 그의 최후를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죽음으로 장식한 것입니다. 그는 강하지만 약한 자였습니다. 강하지만 약하므로 죽은 최강자 삼손입니다. 
  
여러분, 에스겔 골짜기의 뼈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골짜기에 흩어진 뼈와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연결된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기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생기가 들어가서 비로소 살아 있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뼈가 사람이 될 때에 가장 연한 것은 겉에 있었고, 가장 강한 것은 속에 있었습니다. 

처음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은 가장 강한 것은 속에 있고, 약한 것은 밖에 있습니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외유내강’은 하나님의 모습이며,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습입니다. 
  
옛날 랍비들은 육체를 설명하면서 뼈 주위에 살이 있는 것은 소중한 뼈를 지키기 위해서이며 해파리처럼 살만 있어도 안 되고 또 돌처럼 뼈만 있어도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랍비 얀켈은 “언제나 갈대처럼 휘어져라. 삼목처럼 높이 솟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태풍에 느티나무 가지는 꺾여도 버드나무 가지는 꺾이지 않습니다. 약해보이지만 강한 것이 마침내 이깁니다. 

겉으로는 엄청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무한히 강한 자가 승리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모습을 닮아야 승리자가 됩니다. 
  
일본 소설가 엔도 슈샤꾸의 ‘나를 사랑하는 법’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이 들면서 나는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약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방법이란 바로 남들 앞에서 강해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약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솔직함일 수 있고, 겸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신 것을 보세요. “약해지라”, “져라”, “손해 보라”는 것입니다. “가난해져라”, “화평케 하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어라”,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때려달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온통 약해지라는 것입니다. 
  
왜 약해져야 합니까? 약해져야 강한 것이니까 약해져야 합니다. 산상보훈이란 결국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시고 가르치신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강하지 않으시면 십자가에는 절대 못 박히시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인류보다 더 강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힘에 의해 사형을 당하신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약하신 분이셨습니다. 

첫째,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3:4 상반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으로서 세상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모든 것 위에 강한 힘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약함을 나타내셨습니다.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왜 가장 강한 하나님이 약한 사람이 되셨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약한 사람이 되시고 사람 가운데서도 연약한 사람이 되셔서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에 오실 바에야 ‘강한 권력자’, ‘걸출한 율법학자’, ‘예루살렘의 귀족’, ‘잘생긴 카리스마’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강한 모습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하필 약한 자가 되셨습니까? 예수님은 약한 자에게 힘이 되시려고 오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시려고 오셨습니다. 작은이의 벗이 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약한 자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인 구원자의 뜻이 자신에게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약함을 선택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약하심은 자신을 낮추어 분노하지 않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원수에게 보복하지 않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여 자신을 포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53:2에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은 여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사야 53:7에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모습은 한 결 같이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어 사람의 모양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눈에 약해 보이는 기독교와 기독교인을 세상은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다락방강화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미워하고 박해하지만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현대의 참 양심이라고 일컫는 바우어하우스 박사는 안티 기독교 정신이 유럽을 휩쓸고 있다고 하면서 “약한 형태의 기독교는 박해 받는 존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정신은 사울이 예수님을 박해할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크게 사용하실 사람들에게 강한 것을 약하게 바꾸십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할 때 천사는 야곱의 허벅지를 잡고 둔부의 힘줄을 쳤습니다. 야곱의 가장 강한 곳을 친 것입니다. 허벅지 근육은 사람의 가장 강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장 강한 부분을 치셔서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다리를 절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안에서 강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크레이그 크로퍼드는 “약점이 없는 것은 신과 죽은 자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30에서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합니다. 약함이 자랑거리인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신감이며, 확신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만든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는 악명이 높기로 유명하였습니다. 수용자의 99%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약한 사람이나 어린이나 노인 등 노동에 쓸모없는 사람은 가스실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한줌의 재로 변하게 나오게 되는 ‘지구의 지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약한 자가 다 죽었을까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오히려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학자 빅터 프랭클은 참 약한 학자였습니다.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여인들이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약하여 고통을 당하지만 반면에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은 약한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모든 하나님의 거인들은 약한 사람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약한 것이 거인의 조건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약하시기로 결정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도 약하므로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라고 고백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13:4 하반절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약해서 죽습니까? 약해서 죽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약해서 삽니다. 
  
바울은 강함을 ‘살아남’이라고 해석합니다. 살아 있는 자가 가장 강합니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죽으면 더 이상 강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자보다 더 강한 자는 없습니다. 시체를 보고 사람들은 무서워하고 놀라지만 시체는 무섭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무서운 법입니다. 
  
“살아 있네”라는 말이 요즘 유행합니다. 이 말은 희망이 있고, 강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은 것 보다 더 강합니다. 왜 약하지만 살아납니까? 왜 약한 자가 강합니까? 우리가 약함을 통해 가장 강한 부활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습니다. 세상에 강한 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2:10에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합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이란 역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실입니다. 이 역설은 신앙의 세계나 자연의 세계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의 세계에서도 약한 것이 살아남고 강한 것은 점점 사라집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강함은 우리의 부활과 강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언제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라는 놀라운 비밀 가운데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에서 아말렉 군사가 오합지졸인 이스라엘군사에게 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싸우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장군 거인 골리앗이 소년 다윗에게 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는 약한 자이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가 강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미디안과 아말렉의 군사들이 사사기 7장에는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와 같다고 하였지만 기드온의 300용사에게 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메뚜기가 사람을 못 이긴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장군 시스라가 900대의 철 병거로 이스라엘을 침범하였지만 여 사사 드보라에게 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약한 자가 세상을 의지하는 강한 자를 이긴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이런 예는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운행하시는 힘이며 사람을 지으신 분입니다.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는 힘이십니다. 하나님은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신 생명의 힘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모습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예수님은 사셨고, 우리에게 살게 하십니다. 
  
순교란 복음을 위하여 이교도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행위를 말합니다. 기독교와 같은 일신교에서 순교가 주로 일어납니다. 순직과 순교는 다릅니다. 순교자들은 한 결 같이 강한 자들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약하여 세상의 힘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강하지 않으면 그 죽음은 절대로 당하지 못합니다. 순교자들은 죽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심이라”는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순교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는 세상의 힘에서 볼 때는 약하기 그지없는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지만 가장 강하고 멋진 순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수도사들에게는 ‘순종’이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들은 청빈, 순결과 함께 순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서약하고 수도사가 됩니다. 수도사들이 말하는 순종이란 그 대상이 두 분입니다. 하나님과 수도원장입니다. 하나님과 수도원장에게 그들은 절대로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작은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반드시 원장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누구도 어떤 작은 물건까지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의미로 그렇게 합니다. 순종하는 자는 약한 자가 아니라 진정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데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약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약한 나로 하여금 강하게 하십니다. 약하기에 강하게 하십니다. 쓰러졌기에 일으키십니다. 가난하기에 부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영원히 달려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숨을 거두신 잠시 후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속에 계시지 않으시기에 자신의 무덤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잠시 빌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멀리 하시고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잠시입니다. 죽음은 고작 사흘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처럼 우리의 마지막 죽음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죽음은 잠시이지만 부활은 영원합니다. 

  
결론 

십자가가 국기에 그려진 나라가 여럿입니다. 그 중에 덴마크는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국기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 십자가 국기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1219년 덴마크의 발데마르(Valdemar)왕이 에스파냐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스파냐의 군사력에 비해 덴마크는 열세였고 고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왕은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이 전쟁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오니 승리하게 하소서.” 그 때 갑자기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났습니다. 왕은 십자가를 보는 순간 용기를 얻어 승리를 확신하고 전쟁에서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그 후 왕은 전쟁을 할 때마다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를 그린 기를 앞세우고 나가 싸웠고 승리하였습니다. 왕이 전쟁에 가지고 가서 승리하게 하였던 그 기를 후에 덴마크의 국기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가 승리입니다. 죽음에서 승리입니다. 멸망에서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약한 자로 강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약하셔서 세상의 힘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리 찢기고 저리 맞는 약한 사람들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한 힘 있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