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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과 나 사이 그리스도 (히 1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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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 사이 그리스도 (히 10:19-25)

오늘은 Return to Basic 세 번째 시간입니다. 8월 마지막 주일까지 우리는 한 주일에 하나씩 교회의 전통적인 다섯 가지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고 듣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첫 주에는 예배에 대해서, 그리고 지난 주에는 교육에 대해서 들었고 오늘은 이제 교회 안에서 교제하는 일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의 교제,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과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교제하는 것이 무엇이 달라야 할 텐데... 과연 어떻게 교제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또는 그리스도인답게 교제하는 것일까요?

어떤 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진실되게 교제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 계십니다. 물론 어떤 의미로 그 말씀을 하셨는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진실하게 교제해야죠. 하지만 교회에서 하는 교제가 아닌 경우에도 저는 진실되게, 마음과 마음을 맞대어 교제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또 어떤 분은 서로 섬기며 교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교제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그 말씀 어떤 말씀인지 제가 잘 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섬기며 교제해야 하지요. 그러나 꼭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교제에만 섬기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의 사귐에도 서로 섬기는 모습이 나타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교제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사귀는 것과 정말 다른 것이 있는 것인가요?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가요?

제가 이 문제를 두고 지난주 생각에 생각을 거듭 하다가 저를 빙그레 웃음 짓게 하는 일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조금 나누기 쑥스러운데 여러분께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 저 하나 희생하는 마음으로 나누려고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사귀던 여자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론 저에겐 첫사랑은 제 아내입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만나던 여자 아이는 비공식적으로 만난 것이죠.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면 평소 하지 않던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시를 쓴다거나 편지를 쓰게 되죠.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여자 아이에게 생각날 때마다 편지를 썼죠.

그런데 편지를 이렇게 쓰다 보면 항상 문제되는 부분이 제일 마지막에 이름을 넣는 부분이 항상 문제였습니다. 보통 너의 친구 누구 누구로부터 라든지 항상 너를 생각하는 누구 누구로부터 하고 편지를 마무리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여자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좀 멋있게 마무리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멋있게 마무리 한다고 쓴다고 쓴 말이

“주님의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명선으로부터…” 혹은 “주님 안에 한 형제 명선으로부터…”

조그만 녀석이 별 일을 다 했죠?

당시 틴에이저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알 리가 없었죠. 하지만 그 뜻은 정확히 몰랐지만 나도 크리스천이고 그 아이도 크리스천이니 왠지 모르게 우리 사이에 예수님께서 서 꼭 서계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그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만 크리스천인 두 사람이 교제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그 사이에 서계셔야 할 것 같았죠.

여러분, 틴에이저였던 제가 잘 모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는 집었습니다. 성도와 성도가 사귀는 것은 그 사이에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사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은 두 사람이 1:1로 만나 사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마치 삼각형을 그리듯 사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성경 본문은 요한 1서 1장 3절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성도와 성도가 사귈 때, 늘 우리는 우리의 교제 안에 그리스도의 자리가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안내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교제이건 간에 그렇게 그리스도의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교제가 올바로 설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꽤 오랫동안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목사님들께서 이렇게 설교하시는 것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머릿속에 마치 공식처럼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는 예수님을 그 사이에 두고 사귀는 것이다.” 제 머릿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만히 보니까 그것이 제 머릿속에 공식으로만 들어있었지 제 삶에서 이 공식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을 본적은 퍽 드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가 어때야 하는가? 물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사이에 두고 사귀다가 공식처럼 튀어나왔지만 왜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사귀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사귀는 것이 실제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잘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주변 몇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교제가 세상 사람들의 교제와 어떻게 다른가 물었을 때 모두 한결 같이 이렇게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은 두 사람만 사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귀는 것이다. 듣기 좋았습니다. 멋져 보였죠. 그런데 그 대답을 듣고 나서는 두 가지 질문이 들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와 함께 사귀어야 합니까? 그리고 두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귄다는 정확히 어떤 모습인가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사귀어야 할까요?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사귀는 우리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사이에 두고 교제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깊은 내면에 있는 외로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10:19절 이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에 대해 증언한 말씀입니다. 교제에 대해 증언하면서 히브리서는 맨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증언한대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 화목 가운데 하나님과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귀게 된 것입니다. 20절,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이 친히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았던 휘장이 되셨고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순간, 그 몸이 갈라지면 휘장이 갈라졌고 하나님과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은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우리의 영혼이 슬퍼하는 소리입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소외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되어 지내야 했던 우리의 영혼이 죄로 인해 소외 당하게 되었고 그 소외로 인해 슬퍼하는 우리 영혼의 울부짖음이 바로 외로움입니다. 그러니 이 외로움을 해갈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교제 안에 그리스께서 서계셔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피조물 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근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매우 실망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피조물인 인간은 다른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모두 자기가 짊어지고 그것을 해결해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과 가장 가까이서 지내는 배우자도 우리가 우리 깊이 가지고 있는 외로움을 완전하게 해갈 시켜주지는 못합니다. 만약 나 아닌 다른 피조물이 나의 외로움을 완전히 해갈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교제하기 시작하면 그 교제는 이내 어그러져 억압, 예속, 실망, 그리고 말할 수 없는 피로를 만들어냅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트 본회퍼가 쓴 책 ‘신도들의 공동 생활’에 보면 본회퍼가 이렇게 충고합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남 사이에 서계시기 때문에 나는 남과 직접적으로 사귀는 것을 바래서는 안됩니다. 본회퍼는 더 말합니다.

“그리스도만이 내가 구원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사랑으로 남을 이래라 저래라 휘두르려고 한다든가 지배하려는 모든 노력을 깨끗이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서 사람이 되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시사 그를 위해서 죄사함과 영생을 마련해주신 그런 사람으로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위해 무엇인가 하려고 하기 훨씬 전부터 그리스도가 이미 그를 위해 결정적인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형제를 그리스도께 먼저 돌려드려야 합니다.” (본회퍼, 신도들의 공동생활, 대한기독교서회)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결혼을 막 하고 신혼 생활에 접어든 부부는 이제 짝을 찾고 결혼 생활을 시작함으로 자신 안에 근원적인 외로움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또한 자신의 배우자의 외로움도 자신이 근원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열렬히 사랑한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 당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외로움의 뿌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보다 훨씬 깊습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외로움을 해갈하려고 하다 보면 우리는 서로를 오히려 해치게 됩니다.

부부 상담을 하면 언제나 같은 패턴이 하나 발견되는데 그것은 바로 부부가 서로 똑같이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아버지,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문제가 생기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제가 그렇게 충고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문제다.” 최선을 다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최선을 다해도 우리 피조물이 해결해줄 수 없는 외로움, 소외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고치실 수 있는 분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그 앞에 내어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부, 가족, 친구 관계에 그리스도를 세워두셨습니까? 혹시 아직도 내 남편, 내 아내의 외로움은 내가 책임질 수 있다, 내 자녀들의 외로움은 내가 해결하겠다, 내 외로움은 충분히 내 가족들로 달래질 수 있다 자신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님께 올려드리십시오. 

주님만이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외로움을 해결하실 수 있는 것을 믿고 여러분,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십시오. 나뿐 아니라 우리 인간된 어느 누구도 그 외로움을 해갈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하는 교제 가운데 서계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난 뒤 오늘 본문 24절과 25절에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귐에 대해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 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짧은 두 절의 말씀에 두드러진 것이 격려한다 혹은 권한다 입니다. 그리스도를 사이에 둔 교제는 성도간에 서로 격려하고 권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무엇을 권하고 격려하는 것인가? 사랑하는 일과 선행하는 일을 격려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 가까워 올수록 힘써 모이기를 격려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조금 확대해서 적용해보자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선행을 길을 가기를 서로 격려하는 것, 그것이 성도간의 교제라는 것이죠. 다른 성경 본문에서는 성도들 간에 교제를 서로 용납하는 것이다 라고 적혀있는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큰 의미로 서로 사랑을 격려하는 포함 될 수 있겠죠. 또 어떤 본문에서는 성도의 교제는 서로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또한 서로 섬김으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성도가 서로 사귄다는 것은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때까지 서로 격려함으로 사랑과 선행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서로 힘을 돋아주는 것이죠. 이 길을 가다가 형제에게 잘못된 것이 있으면 사랑으로 충고하고, 실수한 것이 있다면 사랑으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낙심한 형제가 있다면 찾아가 섬기고 용기를 주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길을 함께 가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가 되었던 배우자이건, 자녀이건, 함께 한 교회에서 만나는 교우이건 우리는 서로가 낙심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만나서 서로의 외로움을 위로하거나 재미만 보다가 흩어지는 사람들이 아닌 함께 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불교에선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함께 길을 간다고 해서 도반이라고 하죠.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하나님 나라의 길을 함께 가는 도반을 가지셨습니까? 모여서 골프 하는 사람, 모여서 날씨 이야기 하는 사람, 사업 이야기, 주식 이야기하는 사람 말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서로의 신앙을 독려하며 쓰러지면 일으켜주고 함께 이 길을 가기를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해주는 사람을 두셨습니까?

작년 2012년 2월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백악관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강영우 박사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시각 장애인으로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백악관 정책 차관보에까지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강영우 박사님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께서 증언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다른 사람이 증언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고 보석 같았습니다.

강박사님께서 소천하시기 몇 달 전, 그 분의 마지막 글을 담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책 마지막에서 강박사님은 자신에 인생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 저의 마음에 깊이 와 닿은 구절이 강박사님의 사모님께 드리는 글입니다. 사모님에 대해서 감사하며 이렇게 쓰셨습니다.

“나의 지팡이가 되어 나보다 항상 한 발짝 앞서 걸어주던 당신, 그런 당신에게 가장 고마웠을 때가 언제인지 압니까? 진영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되었을 때였습니다. 한국 시각장애인 최초로 박사가 되어 금의 환향할 날만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는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학생 비자는 만료가 되고,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도 중단되어 버리고, 어린 아이들은 둘이나 되고, 이런 현실 속에 주저앉아 버리려는 나를 당신이 위로 했습니다.

세 살짜리 진석이의 손을 잡고, 갓난 아기인 진영이를 품에 안고, 식료품점이라고 열어서 생계를 유지할 테니 집안 걱정은 하지 말고 열심히 미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라고 나를 격려해주던 당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는데, 절대로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실 거라고, 반드시 더 좋은 문을 열어 주실 거라고 당신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 때 당신의 모습을, 신념이 가득 찬 당신의 목소리를, 나를 향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강영우,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두란노)

강박사님께 사모님은 박사님과 함께 길을 가는 도반이었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외로움을 섣불리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향해 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친구였습니다. 용납하고, 격려하고, 함께 길을 걸어줌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지팡이가 되어준 존재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가지셨습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셨습니까?

강박사님과 사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저는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 시가 떠올랐습니다. 이 시가 제가 오늘 여러분께 드리는 결론입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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