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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라(8) : 송영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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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8) : 송영 (마 6:9-13)

: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하시고 보호하심이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이 누리는 행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은 헨델의 ‘메시아’를 아실 것입니다. 아마도 메시아 전곡을 들어보지 못하신 분일지라도 메시아의 백미라고 일컫는 ‘할렐루야’ 부분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당시 영국 국왕 조지 2세가 ‘할렐루야’의 장엄한 합창을 듣고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났다는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할렐루야’ 합창이 연주될 때는 청중 모두가 일어서는 것이 전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메시아 연주에 참석하여 할렐루야 부분에서 일어서 있는데 좀 쑥스러웠던 느낌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야를 들으면서 정말로 일어나고 싶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맨 끝부분인 ‘죽임 당하신 어린 양’ 부분이었습니다.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지혜와 능력을 주님께’ 하는 부분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습니다.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지혜와 능력’하는 가사가 남성부와 여성부로 반복되고, 그때 들리는 팀파니 소리는 지금도 가슴을 뛰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는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지혜와 능력을 주님께 돌려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도 역시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지혜와 능력을 주님께 돌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지혜와 능력을 돌려야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몇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I. 의문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서 의문을 가지게 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13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3b(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주기도문의 이 부분을 성경으로 펴서 읽게 되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선 만나게 되는 이상한 점은 괄호()가 있다는 것입니다.

1. 괄호에 대한 의문입니다.

성경에서, 왜 이 부분에는 괄호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괄호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고대 사본에 이 괄호 내 구절이 없음’이라고. 이것을 ‘난하주’라고 하는데, 성경의 아랫부분에 작은 글씨로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 말이 더 큰 궁금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연 ‘고대 사본’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원본이 없다는 말씀을 들으시면 충격 받으실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태가 직접 쓴 마태복음 원본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다른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쓴 친필 원본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베껴 쓴 사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괄호 부분이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베자 사본 등과 같은 아주 오래 된 사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후대에 기록된 사본에는 이 괄호 부분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괄호 부분이 후대의 첨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괄호 안의 내용이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구원을 위하여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20:30-31 말씀입니다.

(요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원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이외의 일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다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 전체에라도 두기가 부족합니다(요 21:25).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만드신 분이십니다(요 1:1). 

세상을 만드신 이야기까지 다 기록하면 이 세상에 그 책을 둘 곳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일부를 선택하여 기록한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이 일부를 선택한 목적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데 전혀 지장이 없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벽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여 그 이름을 힘입어 풍성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성경은 정직하게 괄호를 쳐서 의심스러운 내용은 의심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괄호 안에 있는 말씀을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 권위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으로 계속 사용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괄호 이외에 또 다른 커다란 의문이 있습니다. 바로 ‘대개’에 관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깁니다.


2. 대개에 대한 의문입니다.

주기도문을 외울 때에 ‘대개’를 넣는 분들과 넣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개 ‘대개’를 하시는 분은 장로교인 이고, 대개 ‘대개’를 하지 않는 분들은 감리교인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파의 문제라기보다는 사용하던 찬송가의 문제입니다. 찬송가를 만들면서 찬송가 표지 안쪽 면에 실은 주기도문에 대개가 들어간 주기도문을 인쇄한 찬송가와 대개가 빠진 주기도문을 실은 찬송가에서 생긴 문제입니다. 

1949년 모든 교파가 합동으로 만든 ‘합동찬송가’에는 ‘대개’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파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 ‘대개’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1967년 ‘개편찬송가’를 발행하면서 ‘대개’를 뺏습니다. 그래서 합동찬송가를 그대로 사용하는 교회는 ‘대개’를 쓰고, ‘개편찬송가’를 사용하는 교회는 ‘대개’를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까지 사용하던 ‘통일찬송가’(1983년)에서는 다시 ‘대개’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006년에 발행되어 지금 사용하는 ‘21세기찬송가’에는 다시 빠졌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한 개역성경에는 ‘대개’라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성경의 내용대로 하면 됩니다. 성경에 대개가 있으면 주기도문에도 대개를 넣고, 성경에 대개가 없으면 주기도문에도 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대개’라는 말이 어떤 말이기에 이렇게 논란이 많은 것입니까? 첫째로 영덕 대게가 아닙니다. 주기도문에 들어가는 ‘대개’가 ‘대게’가 아닌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대게는 커다란 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둘째로 대략의 대개(大槪)가 아닙니다. 제가 앞에서 “대개 ‘대개’를 하시는 분은 장로교인 이고, 대개 ‘대개’를 하지 않는 분들은 감리교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앞의 대개는 ‘대부분’이라는 뜻입니다. ‘대부분’ 합동찬송가를 사용하는 장로교인은 대개를 하고, ‘대부분’ 개편찬송가를 사용하던 감리교인은 대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부 다는 아니었습니다. 장로교회 중에서도 개편찬송가를 사용하는 교인은 대개를 하지 않고, 감리교회 중에서도 합동찬송가를 사용하는 교인은 대개를 계속하였습니다. 

‘대부분’이라는 말은 전부는 아닙니다. 더욱이 이 때 ‘대개’는 ‘대강(大綱)’이라는 말도 됩니다. 기도를 드리면서 ‘대충’이라고 말하면 큰 문제입니다. ‘대부분’이라고 해도 문제입니다. 셋째로 송영으로써의 대개(大蓋)입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에 사용하는 대개입니다. 이것은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호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으로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라는 뜻으로 ‘대개’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송영(頌榮)이라고 합니다. 송영은 예배의 시작과 마지막에 들어가는 기도 형식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서두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한 것처럼 말미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여 끝맺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라는 말이 대충 혹은 대강이라는 뜻으로 오해를 할 수도 있고, ‘호티’라는 말이 문장의 부호처럼 쓰여 번역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주기도문에서도 굳지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개라는 말을 넣느냐 마느냐로 싸움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을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괄호의 내용이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이 아닐지라도 이 내용을 주기도문으로 계속 드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구약과 신약성경의 다른 말씀을 바탕으로 교회가 처음부터 사용한 송영이라는 점에서 계속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송영
  
송영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요한계시록 5:12-13 말씀입니다.

(계 5: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바로 헨델의 ‘메시아’의 마지막 합창곡인 ‘죽임 당한 어린양’의 내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송영은 하나님과 예수님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기도에 나타난 송영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3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3b(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면서 아울러 무엇이 또한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여야 합니까?

첫째로, 나라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나라는 로마였습니다. 로마는 로마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나라가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로마 황제의 다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고백입니다. 물론 이것이 세상 나라와 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황제의 다스림을 공공연하게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은 우리가 누구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대한민국에서 살고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이 세상 나라에서 사는 것이 크게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 나라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가 충돌하고 대립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나라가 정의롭지 못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성경의 진리와 반대되는 것을 강요한다면 기꺼이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를 기도하고 그렇게 되기를 순종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순간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와 질서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로, 권세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당시의 세계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시대였습니다. 로마 황제가 신으로 숭배되는 시대였습니다. 로마 총독의 결정으로 사람의 목숨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서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역설입니다. 

더욱이 모든 인간은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피차 잘못할 수 있기에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세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합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능력이 없음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세상은 악하고 우리는 약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이 우리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약하지만 강한 사람입니다. 정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이루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셋째로, 영광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면 당연히 영광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고 하면서 그 영광을 다른 어떤 것에 돌린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만약 그 영광을 우리 자신이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곧 교만입니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와 백두산에 사는 호랑이 중에서 누가 더 교만할까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답은 우물 안의 개구리입니다. 호랑이는 넓은 세상을 바람처럼 다니면서 이 세상에는 자기보다 더 크고 무서운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물 안의 개구리는 천하에 자기가 제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교만의 극치를 달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물 안의 개구리가 황소만큼 배를 불리려다가 배가 터져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여 일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간단하게(?) 여덟 주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도 개인적인 더 깊은 묵상과 연구와 실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동안의 결론을 맺는다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III. 기도
  
우리는 주기도문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드려야 할 기도로 가르쳐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19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9a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1. 주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주기도문이 주문(呪文)처럼 사용되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본래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목적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지 않도록 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을 공염불처럼 입으로만 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기도문’이라는 네 글자에서 ‘기도’라는 두 글자가 빠지면 ‘주문’이 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그 뜻을 생각하지 않고 ‘주절거리며 속살거리’(사 8:19)기만 한다면 우상에게 바치는 주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주기도문을 늘 가까이 하여 외우되 주문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주기도문으로 바르게 기도하는 것입니까?


2. 묵상이 되어야 합니다.

묵상이라는 말은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뜻을 생각하며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생각하는 것이 많고 복잡합니다. 너무나도 번잡한 일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드릴 때도 소나기 퍼붓듯이 하나님 앞에 쏟아 붓고는 또 다른 바쁜 일로 자신이 기도하였다는 것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또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로 잘 사는 것일까요? 더욱이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참 뜻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루과이의 한 예배당에 적혀 있는 주기도문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하지 말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라고 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말라, 네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하지 말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하지 말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너 자신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이것은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주기도도의 참 뜻을 생각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되 그 뜻을 깊이 생각하며 주님의 기도 내용을 자신의 기도 내용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이 주문이 되지 않도록 묵상하며 기도하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기도문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3.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라면 굳지 그렇게 힘들게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있는 것을 소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내용은 그렇게 외우고 마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순종하는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그렇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기도문은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는 내용은 언젠가 우리의 삶에서 그렇게 이루어져야 할 내용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되기를 우리가 바라고 원한다면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자신의 기도가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로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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