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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히 4:1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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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히 4:14-5:10)


우리는 이 인간사회에서 처음에는 크게 기대하고 아낌없는 존경을 주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실망하게 되는 지도자들을 여러 경우에서 만나게 됩니다. 
민생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뽑아 놓았던 대통령이나 지역구의 국회의원들이 전혀 자기 역할을 해 주지 못할 때나, 처음 만났을 때에는 무한히 존경스럽고 하늘처럼 보이던 교수가 나중에 알고 보니 지극히 실망스러운 인격의 소유자임이 드러날 때가 그러합니다. 
  
정말 '지도자'라고 하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힘들 때에 기댈 수 있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따라갈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자기 인생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동시에 이상적인 '역할모델'(role model)까지 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히브리서 기자도 자기 민족의 전통적인 대제사장들에게서 그와 같은 실망감을 톡톡히 맛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은 당시 로마제국의 압제 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유대민족에게 아무런 격려도 주지 못했으며 그들에게 무슨 본이 되는 것과는 더욱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영적 지도자라고 하는 제사장들에 대하여 실망 정도가 아니라 경멸까지 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전형적인 제사장들과는 달리 전혀 다른 모습과 자세로 자기 백성에게 다가오시고 그들을 이끌어 주시는 아주 특별한 대제사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대제사장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예수님을 만나게 된 감격에 겨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이런 분이시다."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순전히 자신의 이익과 명예만을 추구하면서 대제사장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던 자들과는 달리 지극히 정겹게, 그리고 언제 어디까지라도 좇아 갈 수 있는 믿음직한 모습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찾아와 주신 이 놀랍고도 멋진 대제사장 예수님을 본문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까지 친히 체휼하심으로써 '고통 받는 인생에게 최고의 위로자'가 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4장 14절부터 16절에 기록하기를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앞의 내용에 보면 우리 믿는 자들이 소망하고 있는 "그의 안식"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안식'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천당 구원이야말로 우리 기독신자의 최종 목적이요 최고 축복인 까닭에 이 히브리서 기자는 4장 11절에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종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소중한 '천당의 안식'을 사모할 때에 걸리게 되는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1절 하반절이 지적하는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는 사람, 즉 1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사람은 그 안식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말씀에 불순종한 행위는 이어지는 13절에서 강조하는 대로 결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고 마치 "벌거벗은 것같이 다 드러나게" 되고 만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하게 됩니다. 
저 천당의 안식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순종해야만 되는데, 우리의 모든 악한 생각과 불순종의 행위가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은 몸처럼 완전히 드러나게 되면 그 엄중한 심판을 통과하고 천당에 들어갈 길이 막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먼저 상기시켜 놓은 후에 본문 14절을 통하여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 '그러므로'라는 말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사실, 즉 천당의 안식에 꼭 들어가야 하겠는데 우리 자신의 의와 공로로써는 전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처럼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력한 처지에 있는 까닭에, 바로 그런 죄인을 위하여 계시는 이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더욱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우리의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정말 우리가 든든히 의지할 수 있는, 실로 든든하기 짝이 없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이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그처럼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연약한 처지에 있음을 전혀 이해해 주시지 않는, 그저 무정하고 엄하기만 한 분이 절대로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대제사장은 친히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 인생들이 누리는 모든 연약한 삶 즉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아 보셨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연약'과 '시험'을 몸소 다 당해 보신 대제사장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믿는 도리는, 이어지는 16절에 나오는 대로 바로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바로 그런 "은혜"를 받기 위하여 담대하게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란 '정기적으로 도와주시는 은혜'라는 뜻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도와주시는 은혜' 혹은 '제때에 도와주시는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 당하는 상황과 처지에 따라 어떤 특별한 은혜, 어떤 특별한 긍휼, 어떤 특별한 도움이 꼭 필요한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을 친히 체휼해 보신 까닭에 바로 그런 우리의 사정을 그때그때 충분히 이해해 주시며 어떤 구체적인 은혜가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베풀어 주시는 대제사장이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예수님은 그런 도움을 기꺼이 베풀어 주고자 하시는 마음 준비까지도 항상 갖추고 계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16절의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한 어려움과 시험에 대하여 능히 도와주실 수 있는 능력과 지혜뿐 아니라, 그런 처지에 빠진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자비의 마음까지 늘 가지고 계시는 까닭에 오직 당신을 의지하고 나아오기만 하면 즉시 그 위로와 도우심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인간의 연약을 다 친히 겪어 보셨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긍휼'을 더욱 뜨겁고도 강력하게 발휘해 주시는 것입니다. 

백성의 배고픈 현실을 모르는 왕은 결코 존경받는 성군이 될 수 없습니다. 
서민이 당하는 생활고의 아픔을 자기 일처럼 느낄 줄 모르는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들은 국민들이 믿고 의지할 만한 지도자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과는 달리 우리 인생의 연약과 고통을 아예 '피부로 직접 체험해 보신' 분이신 까닭에 그처럼 '긍휼'이 무한하시고 '은혜'가 넘치는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팝송 중에 'Lean on me'(내게 기대세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Lean on me, when you're not strong. And I'll be your friend. I'll help you carry on."(당신이 약할 때 내게 기대세요. 그러면 내가 당신의 친구가 되어 주겠어요. 당신이 버텨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요.)라는 아주 감명 깊은 가사의 노래인데, 이 노래를 지었던 Bill Withers라는 사람은 나중에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로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친구, 우리의 모든 어렵고 괴로운 사정을 자상하게 이해해 주시며 위로해 주시며 버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정말 고마운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피부에 닿도록' '뼛속에 사무치도록' 친히 체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것'은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고통이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이런 정도는 그야말로 비일비재하게 겪어 보셨습니다. 
피부로 '추위를 느끼는 고통' 역시 밤에 배를 타고 갈릴리바다 위를 지나가시면서 뼛속까지 체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고생'이라는 것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위시하여 빌라도 총독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모욕과 멸시와 핍박을 당해 보셨습니다. 
  
'불치병'이 본인에게와 가족에게 동시에 주는 고통은 정말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셔서 실로 인간의 육체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까지 온 몸 구석구석을 통해 맛보셨습니다. 
게다가 '마귀의 시험'까지도 공생애 첫 순간부터 친히 받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죄는 없으신" 무흠의 본성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죄에 대하여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충분히 이해해 주시는 너무나도 고마운 대제사장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대제사장께서 이해해 주시지 못하고 위로해 주시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그 어떤 쓰리고 아프고 괴로운 일이 생긴다 해도, 그것이 한 집에 사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나 교회의 교역자조차 알아 줄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해도, 우리 예수님만큼은 충분히 이해해 주실 뿐 아니라 넉넉한 위로를 베풀어 주시는 '긍휼의 대제사장'이심을 끝까지 믿고 의지함으로써 결코 도중에서 실족하지 말고 저 영원한 '천국의 안식'에까지 꼭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성부께 겸손히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 경외 신앙에 최고의 모범'이 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5장 5절부터 10절에 "5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6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의 5장 1절에 나오는 대로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는" 일, 즉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게 함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를 바로 맺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사명을 맡은 자였습니다. 
하지만 제사장 역시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 즉 어디까지나 '사람 가운데서 뽑힌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동일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2절과 3절이 말씀하고 있는 대로 대제사장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는" 인간이요 그런 까닭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한"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4절에서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라고 하는 말씀은 바로 그처럼 제사장 역시 죄인에 불과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생각한다면 스스로 그런 제사장의 직분에 올라앉을 자격도 근거도 전혀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소명과 임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대제사장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 주신 직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후에 이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 5절에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그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대제사장의)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 역시 그 근원은 오직 성부 하나님의 임명에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다른 구약의 대제사장들과 똑같은 위치의 대제사장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곧 이어지는 6절에서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멜기세덱"이란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을 맞이했던 제사장인데, 나중에 히브리서 7장 3절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한" 제사장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란 '아론의 자손이라는 육신적 족보를 따르지 않는, 아주 신비하고도 특별하게 임명을 받은 제사장', 다시 말해서 '다른 제사장들과 완전히 차별화된 대제사장'이심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예수님은 '아론의 자손'이라서 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라는 지극히 존귀하고도 높으신 본성을 가지신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다른 대제사장들과는 비교도 안 될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대제사장이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른 그 어떤 대제사장들보다도 가장 '낮은 자세'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신 실로 놀라운 대제사장이셨습니다. 
7절 상반절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라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뚜렷이 내세우는 말씀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연약한 육체를 입으시고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체휼하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의 극단인 십자가를 맞이하시기 전날 밤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성부라든지, 창조주라든지, 절대주권자라든지 하는 모습의 하나님으로 찾기보다는, 그저 당신을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능히 구원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그 점에만 모든 기도의 초점을 집중하시고서, 정말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본문이 잘 증거합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라고, 그야말로 당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성부 하나님께 간청할 수 있는 최대한도에 이르기까지 온 힘을 다해 간절하게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가 과연 어떻게 응답되었습니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할 수만 있으면 그 '십자가 고난의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간구는 그대로 응답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7절 하반절은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도대체 어떻게 응답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그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고 그 잔은 지나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기도가 들으심을 얻은 기도, 즉 분명히 응답된 기도가 되었다는 말이겠습니까?

이 점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더욱 정확하게 상기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또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이것, 즉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신 것'이 예수님 간구의 진짜 초점이었고, 바로 이 간구가 들으심을 얻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주님의 기도 그대로 당신의 뜻대로 성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고난을 잔을 받도록 하심으로써,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그렇게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그처럼 성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성부의 뜻을 최대로 존중하는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성부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당하실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그처럼 '심한 통곡과 눈물'로써 기도를 올리시는 가운데서도 결국에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하시는" 자세를 보여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바로 그런 예수님을 본으로 삼고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즉 그 어떤 극악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진정한 신앙에 대한 최고의 역할모델 또한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 중에서도 가장 지고한, 아주 특별한, '성자 하나님으로서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성부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가장 겸손하게 낮추신 대제사장이 되셨던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의 기도는 자주 하고 있습니다. 
자기 인생이 괴롭다고 하나님 앞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기도나 자기 삶에 이것저것은 꼭 해 주셔야 하겠다고 하나님께 떼를 쓰는 간구와 소원은 날마다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함'은 결핍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라는 가장 중요한 기도는 완전히 빼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란 것은 그저 자기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욕심쟁이'의 기도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의 기도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경외심이 빠져 있으면, 그것은 오로지 어떻게 해서라도 내 소원대로만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생떼를 쓰는 '철없는 아이의 보채는 소리'가 될 뿐인 것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너무나 완벽하고도 멋진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자신의 현실이 '최악의 상황'처럼만 보인다 해도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시면서 어떻게 저보고 하나님께 충성하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 우리가 오직 두려워해야 마땅할 천지의 대주재 앞에서 이런 건방진 소리를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집안 문제 때문에 괴로워서 미치겠는데 저보고 어떡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요즘 경기가 나쁘고 사업이 잘 안 되어서 죽을 지경인데 도대체 어떻게 성경 말씀대로만 따르고 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까?' - 설혹 진짜로 '죽을 지경'이 닥친다 해도 저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절대주권자 앞에서 그런 불경스러운 말은 단 한마디도 튀어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런 '조건부적인 경외'는 결코 참된 경외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일이 잘 풀린다 싶을 때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통곡'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극심한 고통 중에도 오직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찾고자 하는 겸손의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이것은 해 볼만 하다고 판단될 때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만 앞을 가리고 만사가 막막해 보이는 처지를 당할 때에도 저와 여러분은 그저 '우리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지옥불에 던지실 수 있는 절대주권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철저히 순종해야 할 뿐인 것입니다. 
'통곡과 눈물' 가운데서도 끝까지 성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에 '순종'하신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 어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오직 성부의 뜻을 받드는 경외의 신앙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모든 환난과 시험에서 능히 구원해 주실 수 있는' 하늘 아버지의 선하신 응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 이전의 대제사장들과는 전혀 다른 대제사장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혼자 호의호식하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을 자기 피부로 함께 느낄 줄 아는 대제사장이셨습니다. 
백성 위에 군림하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몸소 겸손과 순종의 본을 보이심으로써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는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오늘날 역시 교인들을 등쳐먹기에만 바쁜 삯꾼 목사들과 사이비 이단 교주들은 교인들이 당하는 시험의 고통과 연약의 아픔을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중간에서 자기가 가로채는 교권주의 사제들은 교인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는 가운데 결국 자기보다 '배나 지옥 자식'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있는 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더욱 반갑고 고맙지 않습니까?
이 예수님은 정말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분이십니다. 
실로 그 어떤 괴로운 때에도 평안히 기댈 수 있는 '위로자'이시며 아무리 힘든 때라도 본받고 따라갈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세상의 무슨 영웅, 호걸, 가인, 재사들 가운데 이처럼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언제든지 의지하고 무슨 일을 당해도 순종할 수 있는 '역할 모델'은 오직 예수님뿐이시며, 따라서 오직 "예수 안에"서 걷는 길만이 우리가 따를 수 있는 가장 "즐겁고 복된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모든 연약을 체휼하신 예수님을 통해 가장 뜨겁고도 진한 위로를 넉넉히 받고, 성자이시면서도 성부를 지극히 경외하며 순종하신 주님을 본으로 삼아 매사에 하나님을 온전히 두려워하는 신전인격자가 됨으로써, 바로 이 위대하고도 멋진 우리의 대제사장을 좇아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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