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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생명을 보존하라! (창 1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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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생명을 보존하라! (창 19:12-22)


과거에 한국 교회의 선교를 논의하기 위한 선교 포럼으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앞으로 한국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무엇인가를 토론했다고 합니다.

그때 한국 교회가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지적된 것 중의 하나가 교회 안에 너무나도 명목상의 교인들이 많다는 점이 지적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 안에는 진짜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이름뿐인 명목상의 교인들이 지나치게 많다, 교회는 나오지만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확신이 없는 교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진정한 생명성과 건강성을 무너뜨리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생활의 연륜도 많이 비껴갔고 따라서 교회의 분위기도 익숙합니다.  예배 의식에도 잘 참여할 줄을 압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월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신앙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의 자리에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과의 어떤 구별도 없이 죄를 범하면서 살아가는 지극히 세속적인 교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오늘 그런 이미지를 대표하는 사람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가 바로 '롯'이라는 사람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 젊어서부터 아브라함을 따라 다녔습니다.  제단도 쌓고 여호와의 이름도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주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해 관계를 따질 때는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삼촌 아브라함도 몰라라 하고 자신의 이해만을 챙겼던 사람이 바로 롯이 아니었습니까?  저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세상 속에서 로또 인생을 꿈꾸면 지극히 세속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 그가 바로 롯의 인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창세기19장의 전반부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롯의 집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두 천사가 방문합니다.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사람들을 우리에게 내어놓으라고 아우성을 치며 야단들입니다.  본문 5절에서는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그들과 성적 관계를 맺겠다는 말입니다.  소위 동성연애의 죄악이 오랜 옛날 소돔과 고모라 성에도 팽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요구 앞에 선 롯의 반응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래도 롯이 동네 사람들보다는 훨씬 낫지만 아주 이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가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손님을 위하는 것은 좋지만 자기 딸들을 부도덕의 현장으로 내어놓을 수 있었던 사람 롯.  그는 지극히 세속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그런 사람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의 수준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관영한 이 도시에 대한 심판을 작정하셨습니다.  심판을 작정하시고 나서 하나님은 롯에게만은 기회를 주시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롯아, 네 가족을 데리고 빨리 도망가라.  그리고 네 생명을 보존하라."

여기서 "네 생명을 보존하라"는 말이 육체적으로 생명을 보존하라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맥을 쭉 읽어보면 단순한 육체적 생명의 보존뿐만 아니라, 이 기회를 통해서 "네가 좀 변해라, 바꾸어져라, 새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  이런 하나님의 기대, 이런 하나님의 명령이 롯이라는 사람에게 떨어지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한국 교회를 메우고 있는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서도 롯의 후예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롯의 후예들 속에 저와 여러분의 얼굴이 끼어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의 롯들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소위 명목상 교인들, 이름뿐인 교인들, 지극히 세속화된 교인들,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있는 지극히 편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교인들이 한 번 변화되어 정말 확신과 감격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변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첫째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반응해야 하겠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어느 때 가장 진지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인간이 가장 진지한 순간이 있다면 언제일까요?  죽음 앞에서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가 죽음 앞에서는 진실해 집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사람은 죽음 앞에서는 진실해 집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서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날마다 매 순간 순간을 종말을 맞이하는 엄숙한 심정으로 주님 앞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믿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롯은 그 도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롯은 하나님의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 심판을 믿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그래도 이 사람의 밑바탕에는 어느 정도 신앙적인 의식이 깔려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롯은 믿고 자기 가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도성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는 처음부터 입을 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불러모아서 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우리가 본문이 시작되는 12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 롯에게 말합니다.  "이 외에 네가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밖으로 끌어내라."  계속해서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하나님이 이 도성을 멸망시키겠다는 심판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롯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4절에 보면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  롯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심판의 메시지를 자기 가족들과 사위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위의 반응이 참 재미있습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여러분, 사위들이 롯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농담으로 여겼더라."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 정도로 여겼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심판, 구원, 십자가, 재림, 이것을 신화적인 메시지로, 그냥 한 번 하는 그런 교훈이겠지, 거의 농담 수준에서 알아듣는 교인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말씀드릴까요?  그것이 여러분이 변화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말씀에 대한 진지한 반응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일이 되면 요식상 교회에 옵니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기보다는 요식상 들을 뿐입니다.

물론 어쩌면 롯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위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서 대화에 어떤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장인이 좀 권위가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사위가 말을 알아듣지 못한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롯은 누구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 의하여 그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충분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합법적으로 부름 받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설교되어 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선포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그것을 설교한 사람에 관계없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참되고 선합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언제나 진지한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오늘 나에게 주시는 '내'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가 설교를 하는데 교인들이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이것이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에게 코미디언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기 친구가 텔레비전에 나올 때 보면 늘 형편없는 허튼 소리를 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자기는 밤낮 진리를 이야기하는데도 이것이 도대체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코미디언인 친구를 만났을 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야, 너는 밤낮 가짜 소리만 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감동을 받는데, 나는 진리만을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감동을 안 받냐?"  그때 코미디언 친구가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너는 말이야, 진짜를 꼭 가짜처럼 이야기하더라.  나는 가짜를 진짜처럼 이야기하는데."

그렇습니다.  대화에도 문제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지성입니다.  말씀에 대한 진지한 반응이 문제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접근하고,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은 다 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농담 정도로, 신화 정도로, 우화 정도로, 단순한 하나의 가르침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한 오백 년 나가도, 골백 년 나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안 변합니다.

한 번은 유명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책을 쓰려고 원고를 끝냈습니다.  원고 작성이 끝나고 나서 자기 부인에게 원고를 먼저 읽히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당신도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느냐?  이때 부인이 코멘트를 하고 대답을 하는데 그 대답을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평생을 잊어버리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 시대의 사람들의 죄악상에 대해서 심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셔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시대의 죄악상이 얼마나 깊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또한 얼마나 어두운 것입니까?  하나님이 만약 이런 우리들의 죄악과 역사의 죄악, 인류의 죄악에 대해서 심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것을 사과하셔야 할 것이라고 ….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으십니까?  역사의 심판을 믿으십니까?  인류 역사의 심판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한 세상을 살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삶을 결산하는 날은 반드시 온다.  내가 행한 모든 행동들, 나의 모든 일들에 관해서, 나의 모든 사고에 대해서, 내 모든 토해 낸 언어들에 대해서 낱낱이 주님 앞에 결산되고 심판된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우리가 참으로 이것을 믿는다면 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반응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 속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변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인생이 정말 변하려면 주님의 강권하심이 은혜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촉구하십니다.  구원받으라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변화 받으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것을 호소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아주 강권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도 보면, 하나님 나라에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마다 핑계와 구실을 들어서 초청에 응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주인의 모습으로 비유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길로 산으로, 골목으로, 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좋다, 병든 사람도 좋다, 가난한 사람도 좋다, 누구든 좋다,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거기에 강권이란 단어가 나타납니다.  오늘처럼 개인의 자유 의사가 존중되는 시민사회 속에서 강권이란 말이 주는 이미지는 어쩐지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강권하십니까?

오늘 본문에도 보면 강권하십니다.  15절에 보십시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  동틀 때에 재촉했다, 그러니까 밤새도록 강권한 것입니다.  저녁에 와서 밤새도록 집을 떠나지 않고 심판이 온다고 떠나라고, 이 도성을 떠나라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라고 밤새도록 강권을 한 것입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런데 본문 16절에 보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  두 천사가 밤이 새도록 재촉했지만 롯은 여전히 머뭇거리며 망설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보다 못한 두 천사가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서 어떻게 했습니까?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라고 했습니다.  17절에는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 강권해서 끌어냈습니다.

그런데 끌어내면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서 보아야 할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16절의 마지막 부분의 단어인데 두 딸의 손을 잡아 성밖에 두니 그 다음에 강권의 사건을 가리켜서 성경의 기자는 이렇게 코멘트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것은 무엇을 더한 사건이라고 했습니까?  자비를 더하셨다.  그것은 사랑이었다는 말입니다.  강권이 사랑이었다는 말입니다.  강제로 한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이었다.

간혹, 우리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공부를 시킵니다.  부모님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배우지 못했던 한을 자녀에게는 물려주지 말아야 하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되지를 않아서 포기해야만 했던 어린 시절을 내 자녀들에게는 물려주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이들이 부모가 생각하는 것만큼 공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뗑뗑이 치기를 밥먹듯이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붙잡아 놓고서 야단을 칩니다.  회초리를 들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한 것인데….  너 하나 잘 되기를 바라면서 엄마 아빠가 이렇게 피땀을 흘리는데, 도대체 너는 뭐하는 놈이냐?"  그런데 사실은 부모님의 이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은 것입니다.  솔직히 말입니다.  그래서 잔소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그 아이가 자라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을 만큼의 나이가 됩니다.  잔소리 같던 야단을 치시던 부모님은 곁에 계시지 않을 때 문득 부모님의 말씀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아빠의 사랑인 줄 몰랐는데.  그 잔소리가 나를 향한 아빠의 사랑이었던 것을 …"

가끔 우리가 예수 좀 제대로 믿자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교회에 끌고 오려면 "왜 이렇게 강제로 하나, 자기 혼자 잘 믿지."라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아마도 그 아이처럼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죠."  그렇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강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바뀌어져라고,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고 ….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분명히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권하시는 그 밑바탕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하시는구나.  제대로 믿으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강권하시는구나.  이 강권이 하나님의 사랑인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변화의 희망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정말 변화되려면 주님의 은혜에 지체없이 응답해야만 합니다.

15절에 보면,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  그러니까 밤새도록 재촉하는 것입니다.  저녁에 갑자기 어떤 이상한 손님들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온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 메시지를 전한 것 자체가 불쾌했을 것입니다.  저녁에 잠을 자려고 하는데 문을 두들기고 들어와서 "잠깐 실례합시다.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러 왔습니다.  이 도시가 멸망할 것입니다.  떠나십시오."  얼마나 기분이 나빴겠습니까?  그런데 밤새도록 졸라대는 것입니다.  얼마나 짜증이 났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이튿날 하늘에서 불비가 내리는 그 도시의 광경을 보았을 때 그들은 이 무례한 천사들의 방문, 이 낯선 손님들의 무례한 강권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중에 억지로 지금 끌려서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제대로 믿게 되었다면 나중에 천당에 가서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감사하다고, 너무 너무 고맙다고."

그러나 만약 그 강권이 멈추어진 사람들이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면, 지옥의 영원한 불꽃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 할 지 모릅니다.  "그때 왜 좀 더 나를 강권하지 않았나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인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심판이 있다고 왜 그때 나를 강권하지 않았나요?  김 집사님, 이 집사님, 박 집사님, 왜 나를 강권하지 않았나요?  여보, 왜 나를 좀 더 강권하지 않았소?"  기억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강권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데 사실 롯도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16절에 보면 어떤 말로 시작합니까?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  바로 응답을 못하고 지체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심사숙고가 필요합니다.  깊은 사고가 필요합니다.  이성적인 결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절대로 결정을 늦추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결정이 꼭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결정입니다.  회개하는 결정, 회개할까, 말까?  구원의 결정,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을까 말까?  이런 영적인 결단에 관해서는 결코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서두를수록 좋은 결단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이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이것은 성경도 그렇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니까 경험이 말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라는 것도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회개도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언제 회개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역사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감동할 때,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움직임을 주실 때 "그래 맞아, 나도 죄를 버리고 주님 앞에 나와 십자가 붙들고 하나님 믿고 제대로 살아야 해."  성령이 역사하셔서 이런 마음을 주실 그때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면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가 안 되는 그런 시점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회개할 수 있는 것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가운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누님이 권사님이고, 부인이 집사님입니다.  자신도 한때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고, 교회 집사님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상처 난 이유들 때문에 교회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십 수년을 지나왔습니다.

어느 날 그 분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의 남편이 입원했기에 교인들과 함께 영덕에서 대구 영남대학교 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후에 그 분의 손을 붙잡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 분이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금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그 분에게는 마지막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회개도 할 수 있을 때 해야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해야 된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회개하게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값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응답만 하면 됩니다.  열린 마음으로 성령께서 감동으로 역사하실 때 인정하면 됩니다.  "맞아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 값없이 주시는 회개의 은혜를 왜 못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명목상의 교인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이름뿐인 교인으로 남아 있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전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신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은혜 받고 구원받고 회개하여 생명을 보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은혜를 거절하고 영원한 파멸의 길로 걸어가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질문을 여러분의 심장을 향해 던지고 싶습니다.
오늘 밤 주님이 당신의 영혼을 불러 가신다면, 오늘 밤이 나의 인생에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면 당신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지금까지는 구원의 확신이 없이, 내 삶에 진정한 변화가 없이 교회를 왔다 갔다 했다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예수를 믿고 주님을 따라갔으면 좋겠습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의 변화된 삶의 내용을 가지고 자녀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된 저와 여러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부모된 저와 여러분이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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