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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를 사랑하는 자의 복 (시 8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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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사랑하는 자의 복 (시 84:1-4)
  
< 교회의 기둥이 되는 길 > 
  
성장하는 교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교회를 오래 섬기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한 교회를 오래 섬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교회를 옮길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자주 옮기면 문제지만 교회를 고심 끝에 옮기는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오죽하면 교회를 옮기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좋은 교회를 찾아서 기둥 역할을 하겠다는 꿈과 비전은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목회자를 좋아하십시오. 사람관계가 막히면 은혜의 통로도 막힙니다. 특히 목회자와의 관계는 더욱 그렇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목회자에게 마음이 닫히면 은혜가 안 되지만 목회자에게 마음이 열리면 은혜도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마귀가 교회를 멀리하게 하는 제일 전략은 목회자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목회자가 못난 모습을 보여도 계속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목회자를 이해하고 좋아하려고 하십시오.
  
둘째, 교우들과 잘 어울리십시오. ‘안식하는 삶’의 의미에는 ‘어울려 노는 삶’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은 리더가 되려면 지혜롭게 잘 놀 줄 아는 성품도 훈련해야 합니다. 그처럼 주중에 5-6일을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주일에 교회에 와서는 다른 성도들과 잘 어울려 지내려고 하십시오. 그런 어울림 속에 진리와 행복이 있고 또한 그런 아름다운 어울림 속에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임재도 더욱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셋째, 교회 일에 적극 참여하십시오. 교회에 대한 진지한 책임감을 느끼고 교회 일이라면 끝까지 남아 처리하고 교회 행사라면 최선을 다해 참석하십시오. 교회 일은 잘해도 인정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잘해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을 하면서 억울한 평가를 받고 심지어는 비판을 들어도 교회를 위해 일하는 열정만은 잃지 마십시오.
  
넷째, 섬겨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섬길 줄 모르면 그곳의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섬겨야 합니까? 자기만 혼자 일하는 느낌이 들어서 섭섭하고 억울할 정도로 섬기십시오. 하나님은 감사하며 감내한 성도의 섭섭함과 억울함을 반드시 큰 축복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문제가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때 앞장서서 조용히 십자가를 지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이 결국은 교회의 기둥이 됩니다.
  
다섯째, 교회의 기둥역할을 사모하십시오. 가끔 보면 교회의 기둥들이 교회에서 잘못된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환멸을 느껴 자기는 교회의 기둥이 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좋은 기둥이 되려고 하면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교회의 기둥이 되는 역할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그런 꿈을 아예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면서 교회의 존경받는 좋은 기둥이 되는 것만큼 큰 기쁨을 주고 큰 축복을 예비하는 것은 없습니다.

  
< 교회사랑은 하나님 사랑 >
  
본문은 교회사랑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이 고백만 봐도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장막을 사랑하면서 그 사랑을 통해 지상 최대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상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왜 본문의 시편 기자가 주의 장막을 그토록 사모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 교회도 자연히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무교회주의자는 말합니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 그처럼 교회가 싫다는 분들을 보면 교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는 나름대로의 여러 이유를 댑니다. 예를 들어, 요즘 많은 성도들이 교회는 사기업이 아닌데 유산 물려주듯이 교회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모습을 보면 분개하면서 교회에 혐오감을 느낍니다. 그런 모습이 교회의 불행한 역사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원래 가톨릭교회가 신부의 독신제도를 채택한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초대 교황으로 여기는 베드로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준 이야기(막 1:30-31)에서 보듯이 독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직매매와 성직세습으로 교회의 타락상이 극심해지자 1139년의 라테란(Lateran) 회의에서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채택한 것입니다. 그런 중세기 교회의 타락한 모습들이 싫다고 개혁을 주장하고 나선 개신교 교회에서 그런 상황이 재연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딸만 둘이 있습니다. 요새 교회 세습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하나님이 딸만 둘 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사위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것도 이슈가 되는 것을 보고 이 문제에 대해 자만은 금물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목회를 마감할 때쯤 보니까 집요하게 세습을 추진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교회가 싫어질 수도 있지만 사실상 교회의 좋은 면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요새 부모가 물려주어야 할 것은 유산이 아닌 믿음임을 인식하고 ‘유산 물려주지 않기 운동’을 하는데 그 일에 교회가 가장 앞장서고 있습니다. 또한 유산을 남겨주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기 몸의 일부까지 남에게 주고 가려는 ‘장기 기증 운동’에도 교회가 가장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런 면을 보면서 아직도 교회가 희망임을 자부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가 싫어진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문제점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교회의 약점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교회를 더 사랑하고 바른 교회를 만들려고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길이 바로 성도가 추구해야 할 길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부인이 광고를 냈습니다. “남편을 염가로 급히 양도함. 남편의 골프채와 사냥도구와 개도 함께 끼워줌.” 그 광고를 보고 미국 전역에서 문의전화가 불티나게 왔습니다. 그때 한 사람은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부인! 남편이 싫어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고 사랑해 보세요.” 그 편지의 글처럼 때로 교회가 잘못된 모습을 보여도 희망을 잃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바른 교인이 되려고 하고 교회를 위해 더욱 기도하십시오.

  
< 교회를 사모하는 삶 >
  
본문의 시편을 쓴 고라 자손의 눈에도 하나님의 장막이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마치 상사병에 걸릴 정도로 하나님의 장막도 사랑했고 그래서 그곳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입니까? 사람은 무엇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 그 인생과 인격이 크게 달라집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돈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물론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여러 그럴듯한 핑계와 변명과 이유를 대지만 거의 돈 문제 때문에 싸웁니다. 어떤 사람은 소리칩니다. “내가 돈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아!” 그런데 알고 보면 정말 돈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돈 문제가 걸리면 부모, 형제, 친구도 다 소용 없이 사생결단을 하고 달려듭니다. 성도는 그런 때에도 선교하는 마음으로 돈을 양보함으로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돈 때문에 악에 바쳐 소리치거나 부들부들 떠는 모습은 결코 없게 하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선교마인드를 가지고 ‘손을 펼 줄 아는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처럼 사랑의 대상이 바꾸어 보다 소중한 것을 사모하며 사십시오. 특히 본문에 나오는 시편 기자처럼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다가 쇠약해질 정도로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그를 비켜가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어느 날, 평양에 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경성의 배재학당에 지원하자 아펜젤러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평양에서 경성까지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안창호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8백 리 정도 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아펜젤러 선교사가 “아니,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배우러 왔습니까?”라고 묻자 안창호 선생님이 되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미국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아펜젤러 선교사가 “8만 리 정도 됩니다.”라고 하자 그때 안창호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선교사님은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와서 선교하는데 8백 리가 뭐가 멉니까?”
  
사랑은 거리를 초월합니다. 그런 초월적인 사랑을 가지고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하십시오. 특히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쇠약해질 정도까지 교회를 사모하려면 3가지 태도가 특히 중요합니다. 첫째, 예배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최소한 예배 시간만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하려고 하십시오. 교회를 사모하는 모습은 예배를 사모하는 모습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결국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가 됩니다.
  
둘째, 말씀을 받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교회를 사모하는 모습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잘 받는 겸손한 모습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곳곳에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생겨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들은 “내가 이런 체험을 했어! 나는 이런 은사를 받았어!”라고 간증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말씀을 받는데 시간을 더 많이 썼습니다(행 2:42). 얼마나 복된 모습입니까?
  
셋째, 기도하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교회를 간절히 사모하는 모습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교회를 사모하는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본문 시편 기자는 자신의 마음과 육체를 다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처럼 교회를 간절히 사랑하는 사람은 대개 진실한 기도자입니다. 

  
< 교회를 삶의 터전으로 삼으십시오 >
  
더 나아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장막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생생하게 고백합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참새와 제비는 스스로 지키기 힘든 연약한 새들이지만 하나님은 그 새들도 주의 제단을 통해 지켜주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의 장막을 사랑하는 사람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고 지켜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고 말씀했습니다(마10:29-31).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지 말고 앞날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도 마십시오.
  
특히 본문의 시편 기자는 주의 제단 처마 밑에서 참새와 제비가 둥지를 치고 사는 모습을 보면서 최고의 행복과 안전을 느꼈습니다. 그처럼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좋은 교회를 만나서 그곳에 둥지를 틀고 보금자리로 삼는 일입니다. 집은 육신의 보금자리이지만 교회는 영혼의 보금자리입니다. 그 보금자리가 없으면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새 그 보금자리를 잃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IMF 때 먹고살기 힘드니까 부모들이 아이를 버려서 고아원에는 고아 아닌 고아들이 가득 찼습니다. 그때 TV에서 한 기자가 6살 난 아이에게 “얘야! 왜 여기에 오게 되었니?”라고 묻자 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잠시 과자 사러 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 있으라고 해서 있었는데 서른 밤이 넘도록 안 와요.” 그 아이는 매일 달력에 표시하며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잘 때는 항상 베개를 껴안고 몇 시간씩 눈물을 흘렸습니다. 원장이 가보면 자는 척 했지만 사실은 자지 않고 매일 베개를 눈물로 적시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금자리를 잃은 모습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보금자리는 육신의 보금자리보다 더 중요합니다. 결국 세상에서 자신이 안식하고, 사랑하고, 섬길 교회가 없는 것처럼 불행은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안식하고, 섬기고, 삶의 터전으로 삼을 교회가 있고, 그 교회 중심적으로 사는 것처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멀리서 교회를 다니며 충성하는 분들은 항상 “집이 교회에서 가까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처럼 교회는 가까이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중심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를 계획할 때 항상 교회를 생각하며 교회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고 하면 하나님은 “네가 정말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귀하게 생각하는구나!”하고 여기시고 그에게 누구보다 더욱 큰 축복을 예비해주실 것입니다.
  
가끔 보면 교인들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시험이 들어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교회에 다닐까?” 하고 교회를 멀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족한 사람을 위해서도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값싼 모조품은 항상 진품을 모방하려고 하듯이 교회 안에 위선자가 많다는 것은 또한 교회 안에 좋은 진품 성도도 많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므로 교인에 대해 실망했다고 교회까지 실망해서 멀리하지 마십시오.
  
본문의 시편 기자가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은 쓸모없게 보이는 자들도 돌봐주신다는 암시가 숨어 있습니다. 그처럼 교회는 완벽한 성인군자들의 안식처가 아닙니다. 사실상 인간은 누구나 미완성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으로 부족한 사람이 교회에 있다는 것 때문에 교회를 멀리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향한 사모하는 시선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 교회를 사랑할 때 복 받습니다 >
  
그처럼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 중심적으로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합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이 말씀은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 중심적으로 사는 자들에게 그의 입술에 찬송과 감사가 끊이지 않도록 복을 내려주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복 받겠다고 인맥과 금맥을 찾지만 제상 최대의 금맥은 묵묵히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삶입니다. 복을 추구하는 분들은 이 사실을 꿈에도 잊지 마십시오.
  
서울에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묵묵히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사업에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여유 돈이 생기니까 전혀 투기할 마음이 없이 편한 마음으로 몇 곳에 부동산을 샀습니다. 신기하게도 사는 부동산마다 올랐습니다. 교인들은 교회를 묵묵히 섬기는 그분을 존경하고 또한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신 손길이 나타나니까 마침내 교인들의 투표로 그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장로 안수를 받을 때 그분은 눈물을 많이 흘리면서 더 모범적인 모습으로 깊이 교회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사님의 은퇴 문제로 교회가 시끄러워졌습니다. 은퇴할 목사님이 지나치게 노욕을 부린 것입니다. 그 신임 장로님은 교회가 그렇게 시끄럽게 되는 것이 안타까웠고 교회가 바르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갈등의 한복판에 서서 교인을 대표해서 피켓을 들고 재판도 걸었습니다. 교인들끼리의 멱살잡이에도 말려들어 사진에도 찍혀서 경찰조사도 받았습니다. 그처럼 교회가 바르게 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이상하게도 사업이 급속히 무너졌고 가진 부동산도 다 하락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장로님을 만나 말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교회가 잘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교회 분쟁에 앞서면서 갈등이 더 커지고 사업도 어려워진 것을 보십시오. 이제부터는 옛날처럼 사랑하는 일에만 앞서고 싸우는 일에는 앞서지 마십시오. 그리고 남은 소중한 인생을 장로님이 가진 사업 달란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더 하는데 집중하십시오.” 그러자 원래 기본 성품이 좋으신 분이고 게다가 사업이 막바지에 몰리자 장로님은 그때 교회 싸움에서 물러나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습니다.
  
교회가 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으면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 없고 그런 마음에서는 성공을 이루게 할 하나님의 지혜와 창조성도 생기기 힘듭니다. 그때는 교회를 은혜롭게 옮기든지 잠잠하게 기도하든지 해서 그런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비전을 향해 전진하고 묵묵하게 교회 사랑의 손길을 베풀어야 하나님이 새로운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사랑은 창조성과 지혜를 선도합니다. 특히 순수한 교회사랑은 창조성과 지혜를 최고로 선도하는 축복의 최대 발판과도 같습니다. 
  
누가복음 7장 1-10절을 보면 로마 백부장이 유대인 장로 몇을 예수님께 보내 자신의 종을 구해달라고 요청하자 장로들이 와서 말했습니다. “예수님! 그 백부장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5절).” 그러자 예수님은 백부장의 사랑과 믿음의 고백을 보시고 그 종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는 자를 칭송 받게 하시고, 좋은 후원자도 붙여주시고, 치유와 축복의 문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결국 교회를 사랑하면 누구보다 자신이 더욱 큰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어느 날, 서울의 한 교회에서 오지에 교회 지어주기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때 한 사업가가 자신도 오지에 교회 하나를 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사업이 부도를 맞아 손에 남은 돈은 5백만 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물질로 교회를 지어 드리기로 결정하고 그 물질을 바쳤습니다. 결국 그 물질로 파나이 섬 나무 밑에서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작은 교회를 짓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사업가를 위해 파나이 섬의 전 교인들이 매달리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기하게도 모든 막혔던 문제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부도났던 사업가의 사업이 다시 번창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작지만 지금 성경 전권 파일 완성과 네트영어 등의 거대한 비전을 착착 이뤄가고 있습니다. 그런 역사는 우리의 선교하려는 마음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고 또한 우리의 도움을 받은 선교지 교인들이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임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작은 교회지만 때로는 과분할 정도로 조용히 선교했습니다. 매월 대출 이자를 내는 고단함도 있어도 최선을 다해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그런 기본자세가 있었기에 하나님은 저희 교회의 꿈과 비전을 구체화시켜주셨고 앞으로도 큰 역사를 이뤄주시며 우리 교회를 통해 큰 인물이 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비록 소리 없이 조용히 드렸지만 도움 받은 선교지 목사님들과 교인들이 얼마나 감사하면서 우리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들에게 예배 처소를 제공하고 의자와 차량을 제공해준 한국의 무명 교회를 축복해주세요.”
  
또한 인터넷을 통해 말씀에 은혜 받는 수많은 성도들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고 말씀 준비에 도움을 받은 목사님들도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진실하고 순수한 기도가 얼마나 능력 있는 기도가 되겠습니까? 그 기도를 먹고 우리 교회가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지금 큰 비전을 착착 이뤄가게 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자에게 반드시 꿈과 같은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씨를 뿌리면 거둘 때가 반드시 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지금은 부족해도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최선을 다해서 선교하고 나눌 줄 아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 가려고 하면 하나님의 축복은 결코 우리를 비켜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더욱 교회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복을 예비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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