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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료하시는 하나님 (호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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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하시는 하나님 (호 7:1-7)    

조선 오백 년 역사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 중 하나는 <단종애사>입니다. 단종(端宗, 1441년 8월 9일 -1457년 11월 7일, 재위 1452년~1455년)은 문종의 아들로서 세종대왕의 손자입니다. 문종이 허약해서 일찍 죽어 겨우 열 두 살에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인 1453년 소위 <계유정난 癸酉靖難>이 일어나 숙부인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인 후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이 되니, 그가 조선 7대 임금 세조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의 배후에 <한명회, 韓明澮, 1415~1487>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칠삭둥이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수양대군의 책사가 되어 계유정란을 주도했습니다. 그 후엔 1456년에 성삼문 등 사육신을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이런 공으로 네 번이나 공신에 책록되었고,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종과 성종, 두 임금의 장인까지 되어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이런 그는 후에 여생을 즐기기 위해 압구정(狎鷗亭)이란 정자를 지었다가 그만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 정자가 있던 곳이 현재 서울의 압구정동입니다. 

그렇다면 한명회는 어떤 성향의 인물이었을까요? 1487년에 그가 죽은 후 사관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권세가 매우 성하여, 따르며 아부하는 자가 많았고, 손님들이 문에 가득 하였으나 접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한 때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정 관원으로서 그의 말고삐를 잡는 자까지 있었다.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서, 토지와 금은보화 등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어여쁜 첩들을 많이 두어, 그 호사스럽고 부유함이 한 때에 떨쳤다.> 한명회는 권력 암투에 능한 전형적인 모사꾼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말없이 충성하는 이들이 많으면 나라가 안정됩니다. 그러나 권력 지향적인 모사꾼이 많으면 나라는 어지러울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 왕국의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절에 북 왕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정세는 앞에서 말씀드린 조선의 상황과 비슷했습니다. 음모에 의해 나라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우리 왕의 날에 지도자들은 술의 뜨거움으로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과 더불어 악수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왕의 날>이란 왕들이 무너지고 세워지던 격변의 때를 말합니다. <술의 뜨거움>이란 권력욕과 욕망으로 가슴에 불이 붙은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북 왕국 이스라엘은 음모와 암살에 의해 왕들이 교체되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고 아들 <스갸라>가 왕이 되었지만 겨우 6개월 만에 <살룸>에게 암살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살룸은 겨우 1개월 만에 <므나헴>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므나헴은 10년 동안 통치하고 아들 <브기히야>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그는 2년 만에 암살당해 권력은 <베가>에게 넘어갔습니다. 베가는 20년 후에 <호세아>에게 죽었는데, 이 호세아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최후의 왕입니다. 

호세아 시대에 북 왕국은 앗수르에게 멸망하여 사라졌습니다. 대부분의 왕이 암살당하여 권력이 교체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궁궐에 얼마나 많은 암투와 권모술수가 판을 쳤겠습니까? 당시 권력자들은 하나같이 권력의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 같았습니다. 이들은 온갖 거짓으로 왕의 마음을 흐리는 아첨꾼들이었습니다. 

3절을 보세요. <그들이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왕이 맘에 안 들면 새 왕을 세워 계속 욕심을 채우려 했는데, 그 모습이 달아오른 화덕과 같았습니다. 4절을 보세요.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그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여기 <빵 굽는 화덕>이란 표현이 나오지요? 중동 지방에서는 지금도 화덕을 이용하여 빵을 굽습니다. 화덕의 모양은 여러 가지인데, 화면으로 몇 장면을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달궈진 화덕 안쪽에 반죽을 붙이면 빵이 구워집니다. 저런 빵에다가 각종 향료를 넣고 버무린 야채와 고기를 넣고 말아서 케밥처럼 만들어 먹습니다. 저 화덕이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모여 왕을 몰아낼 궁리를 합니다. 음모의 밤이 깊어갑니다. 날마다 쑥덕댑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까이 올 때에 그들의 마음은 간교하여 화덕 같으니 그들의 분노는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꽃같도다>  이 부분을 <표준새번역성경>으로 읽으면 더 실감이 납니다. <새 왕을 세우려는 자들의 마음은 빵 굽는 화덕처럼  달아오르고 그들은 음모를 품고 왕에게 접근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 북 왕국이 얼마나 무질서하고 폭력적인 나라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과 지도급 인사들의 삶이 이와 같았다면 일반 백성들은 어떠했겠습니까? 1절을 보세요.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거짓을 행하고, 도둑질을 하고, 떼강도처럼 노략질을 했습니다. 힘 있는 권력자들은 국가 권력을 노략질하고, 일반 백성은 자신들끼리 속이고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모든 악을 보고 계셨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악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악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마치 시편 10편 11절의 말씀과 같았습니다.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바로 여기서 가슴 아픈 <엇갈림>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을 보시면서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문제 때문에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을 아예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을 향하건만,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욕망을 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고 계셨지만, 그들의 시선은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엇갈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본문 1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라고 했지요?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려 하시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신을 원해 왔습니다. 절대적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왔습니다. 그러나 그 신에 의해 제약을 받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입맛에 맞는 편리한 신이 필요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주머니에서 꺼내 쓰고 다시 넣는 물건 같은 신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신을 멋지고 웅장하게 깎아 세우고 가끔 와서 바라보다 돌아갑니다. 관람용 신입니다. 그런 신을 집에 두기도 하고, 작게 만들어 휴대하기도 합니다. 이런 신은 애완용 신입니다. 그 신은 인간의 노리개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머릿속으로만 신을 상상해왔습니다. 소위 철학적 신이 그러합니다. <절대 타자>, 혹은 <일자, THE ONE>라고 부르면서 머릿속으로만 신을 상상합니다. 그 신은 그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을 뿐, 그의 삶에는 없습니다. 그 신은 이론으로만 존재합니다. 그 신은 숨도 쉬지 않고, 그를 꾸중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힘들어 쓰러질 때 일으켜 주지도 않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계시고,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휴식중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은 편히 쉬면서 인간들이 세상을 운영해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개입하지 않습니다. 이미 시계에 태엽을 감아 놓았기 때문에 태엽이 풀리기까지는 시계가 알아서 가듯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일일이 개입하지 않아도 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이신론, Deism>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이스라엘을 모세를 보내 건지신 분입니다.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신 분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키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의 물을 마시게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릿속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살아계십니다.  그 분은 구경만 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 삶에 뚫고 들어오셔서 개입하십니다. 꾸중도 하고, 위로도 하시고, 일으켜 세우기도 하십니다. 그 분은 당신의 백성과 자녀들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 분의 가슴에는 사랑이 넘쳐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죄악의 중병에 걸려 신음할 때 치료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곧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치료를 거부하는 인간들에게 있습니다. 이게 바로 엇갈림입니다. 늦은 밤 경찰이 환자를 응급실에 데려옵니다. 환자는 술에 취한 채로, 어디서 다쳤는지 팔 다리에 피가 줄줄 흐릅니다. 의사는 환자를 눕히고 치료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환자는 이미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의사에게 맡기고 가만히 있어야 치료를 받을 텐데,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난 병자가 아니야. 니들이 뭔데, 날 치료해?> 그러면서 힘으로 밀어제치고 침대에서 내려옵니다. 비틀거리면서 병원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다가 병원 입구에서 쓰러집니다. 

검사를 해 보니 이미 그의 간이 다 녹아내리고, 이미 치료가 늦은 상태임이 드러납니다. 가족에게 연락하지만 가족들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이게 본문의 이스라엘의 형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치료하려 하자,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 병자인가 하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악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죄악에 물든 사람들은 병자가 의사의 치료를 받듯이 하나님의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맡기고 누워야 합니다. 그 분의 손길이 우리를 치료하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다산 정약용, 1762~1836>선생은 조선 후기에 대표적 지성인으로서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였습니다. 그 분이 타계하기 엿새 전에 쓴 편지가 『다산 간찰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인생의 연약함과 허무함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죽는다는 것은 아침에 생겼다가 없어지는 버섯처럼 덧없는 것입니다. 생각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생활하면서 더욱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자리보전하고 있으며 또 두풍(頭風)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회혼(回婚)이 이미 임박하였지만 부끄러울 뿐입니다. .......2월 16일 병제(病弟) 약용(若鏞) 돈수(頓首)> 

이게 대학자도 어쩔 수 없는 한계였습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태혁>이란 분을 아십니까? 그는 세계 포커 챔피언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일본에 건너가 프로 도박을 처음 접한 후, 2004년 세계적 권위의 영국 <브리티시 RCT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강연과 저술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가 프로 갬블러로 살면서 배운 교훈들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선 그는 돈의 한계를 알았습니다. <한때는 저도 하루에 수십억을 따봤고 또 수십억을 잃어봤어요. 그러다 보니 초연해지더라고요. 돈은 딱 필요한 만큼 이상이 되면 숫자에 불과합니다.> 

또 그는 <교병필패, 驕兵必敗>의 교훈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교병필패>란 기원전 68년 <전한, 前漢> <선제, 宣帝>에서 비롯된 이야기로서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고 교만한 병사는 반드시 패배한다.>는 뜻입니다. 하루에 수십억을 벌기도 했던 사람이 깨달은 마지막 교훈은 결국 인간의 연약함이었습니다. 지성도, 권력도, 재물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치료를 거부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 그 분의 치료를 거절한 것이었습니다. 호세아 7장 10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또 7장 13-14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엊그제까지 역대상하를 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역사는 두 가지 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떠나 금송아지를 비롯한 온갖 우상을 숭배하며,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여로보암의 길>입니다. 그 길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또 하나는 여호와를 따라 정직하게 살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다윗의 길>입니다. 그 길은 복과 평강을 가져왔습니다. 성경은 왕들을 평가할 때 <이 두 길 중 어느 길로 걸었는가>를 따라 평가했습니다. <여로보암의 길>인가, <다윗의 길>인가,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한 영적 숙제를 안겨줍니다. 

더구나 인생들의 병은 영혼까지 썩어 들어간 죄악이란 무서운 병입니다. 이 병을 고칠 의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 영혼을 더럽힌 죄악을 어떻게 씻겠습니까?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강에 나와 몸을 씻습니다. 화면을 보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을 정화한다고 합니다. 저렇게 씻으면 영혼이 정결해질까요? 

여러분, 우리의 죄악을 씻고, 영혼까지 침투한 죽음의 병을 치료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치료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그 보혈만이 우리를 씻고,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우리를 치료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아셀 인트레이터>는 『마지막 때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십자가를 통해 제자도를 배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십자가 없는 제자도를 가르칩니다. 십자가를 통한 축복과 건강과 형통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십자가 없는 축복, 건강, 형통함을 가르칩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없는 복, 하나님 없는 건강, 하나님 없는 구원을 꿈꾸는 것이 인생들의 병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도 부정부패와 음란과 타락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치료가 시급합니다.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치료가 시급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영적 힘을 잃고 있습니다. 치료가 시급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치료할 수 없고,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치료를 거부하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 무리를 불쌍하게 여기사 크신 복을 주시고 주의 얼굴 뵈소서.....> 하나님의 손안에서 치료받아 깨끗해지고, 새로워지고, 건강해지길 원합니다. 나아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 사회가 건강해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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