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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신앙의 능력 (행 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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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능력
사도행전 2:22-32

오늘 여러분이 부활주일을 맞아서, 부활절 감사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도, 부활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요, 그리스도의 능력이고, 부활하신 주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에게도 능력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의미에서 부활을 이해하고, 바라보고, 소망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사도행전 2:22-32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예수 부활의 가장 분명한 증언자인 사도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1) 그리스도인은 나사렛 예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레 사람 예수의 역사적인 부활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이런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고, 현재 터어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사원에 소장되어 있는, 50권 분량의 ‘빌라도의 보고서’란 문서가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고, 그리스도교가 그것을 교회가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거짓이라면, 지금의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활사건은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부할사건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더 큰 능력을 발휘하고 있고, 교회는 나사렛 사람 예수가 부활했음을 증명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예수 부활의 두 번째 차원은, 현재적인 성도의 부활체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만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 안에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화 하여, 새롭게 거듭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옛사람의 모든 모습을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새로운 인생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게 되는데, 이것을 가르켜서 현재적인 부활체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나는 과정을, 신자의 현재적인 부활체험이라고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과정이 있어야만 새로운 신앙인격이 만들어지고, 거듭난 성화의 삶으 살 수가 있습니다.    

예수 부활의 세 번째 차원은 성도의 미래적인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미래에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재림주 안에서 일어나는 완성된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신령한 몸,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거을 의미합니다. 
  
본문 24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사도인 바울도 롬 6:9절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고, 삶을 얻은 상태가 바로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현재적인 부활을 체험한 성도는 이런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말하기를, 주님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재림하실 때에, 주님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산 자들 또한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이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차원의 부활, 곧 신령한 몸의 부활은 어떤 것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고, 이 땅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항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로운 몸의 부활’은 현재적인 부활을 체험한 사람이, 모두 이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죽어서 땅에 묻힌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인 부활을 통하여, 거듭난 삶을 얻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영광 가운데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소망과 능력 가운데 서야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부활의 소망 가운데 온전히 서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은 여러분에게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고난이 아닙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고난의 십자가 자체로, 아니 형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십자가는 위로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 능력의 십자가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겸손히 지신 십자가 때문에 죄인인 여러분이 구원의 소망을 가지게 되고,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진정한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분명한 소망이 생겨난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습니다. 그래서 본문 28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 거민에게 담대하게 말하기를, ‘주께서 내게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으니, 주님 앞에서 나에게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 거민에게 오순절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면서 이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시 16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본래는 다윗의 노래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멀리서 믿음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고, 알아, 그 일을 기뻐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부활이 있었고, 개인적인 부활체험이 있었다면, 이 부활로 인하여 여러분은 기쁨이 충만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 앞에 있을 때, 구원받았다는 즐거움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부활이란 믿음 가운데 있을 때 담대한 삶을 삽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을 설명하라고 하면,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1)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태어난 성령공동체입니다.
(2)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공동체입니다. 
(3) 성령의 인도 아래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와 말씀의 교육과 양육이 이루어지는 있는 교육과 교제의 공동체요, 
(4) 구령의 열정으로 이방 세계를 복음화 하는 선교공동체요.
(5)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죽임 당함을 무서워하지 않는 순교공동체입니다.
  
본문 말씀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 성에서 한 사도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한 사건으로 두려워 떨던,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던 무리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부터, 그리고 성령충만 한 상황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새롭게 경험하고, 그 의미를 깨달았을 때, 제자들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가서 누구에게든지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히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전에는 두려웠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한 번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혀 갔습니다.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합니다.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도 말고, 복음을 가르치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 때에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원에게 반문하며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라고 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순교하는 것을 자청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능력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키고, 믿음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이런 부활신앙을 갖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의를 지키고 사랑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믿음과 소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를 지키고, 거짓 없는 사랑을 합니다. 분명한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유혹이나 찰라적인 시험 때문에 넘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가진 믿음과 소망 때문에 핍박 받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하나님의 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합니다. 여기서 의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간다 교회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의 우간다는 독재자 이디아민이라는 악명 높은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는 때입니다. ‘케파쎔팡기’라는 목사가 섬기는 교회는 교인이 7,000명이 넘는 큰 교회로, 귀한 역사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는 부득불 정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독재자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는 국민을 위로하는 설교를 합니다. 이것이 정부에 알려졌습니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다섯 명의 비밀경찰이 찾아왔습니다. 교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예배 후에 그들은 사무실에 총을 겨누며 들어와서 ‘반국가 사범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처단하기 위해 왔소.’라고 합니다. 목사는 이미 각오한 것처럼 온유하게 대답하기를, ‘오늘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나는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게 2분간의 시간만 주시면, 기도하고 나의 목회를 마무리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비밀경찰은 그러라고 허락을 합니다. 목사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또박또박 큰소리로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우간다 통치자 이디아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명령을 원치 않으면서도 받아들여야 하는, 불행한 이 다섯 사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간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옵소서. 내 사랑하는 조국이 사랑의 땅, 의의 땅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나의 죽음으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기도하는 목사의 눈에서 눈물이 솟았습니다. 비밀경찰도 울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장되는 사람이 말하기를,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 못 본 것,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고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답니다.

이처럼 부활의 믿음과 소망을 가진 사람은 ‘의’를 사랑합니다. 부끄러운 것과 수치스러운 것과 불의와 부정과 악을 미워하고, 오직 진리를 따릅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리고 어떤 유혹이나 핍박이 와도 담대하게 이길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에게 눌려서 자신을 아프게 하고, 핍박을 해도, 진심으로 그런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고자 갈망하며, 애를 쓰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부활믿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예수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기 전에, 바울은 사울이란 이름을 가진 바리새인입니다. 사울은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이자 당시 로마제국 내 3대 학문의 도시 가운데 하나인 다소에서 출생을 하여, 그곳에서 성장한 유대인입니다. 베냐만 지파 출신 유대인이지만 사울은 나면서부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디아스포라 출신이면서도, 놀랍게 율법학자로 유명한 랍비 가마리엘의 제자였습니다. 율법에 열심히 충성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독신죄를 짓고 돌에 맞아죽을 때에 증인을 섯던 사람이고, 예수당을 적극적으로 핍박을 하는데 앞장을 섯으며, 심지어는 박해를 못이겨 다마스커스로 피난을 한 예수당까지 핍박하고자 대제사장의 공한을 가지고 다마스커스까지 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다마스커스에 가서는 놀랍게도 나사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할 수가 있습니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여간 바리새인 사울이 다마스커스에서부터 그리스도인 바울,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증거자 바울로 변화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바울 스스로가 증거하기를 바리새인 사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위에서 밝은 빛 가운데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순간 바울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가, 나중에 다마스커스에서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 아나니아란 신자의 기도를 받고 다시 앞을 보게 되었고, 그 때부터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그리스도에게 직접 세움을 받고, 로마에서 순교하는 날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나사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처럼 부활신앙이 있으면 증거자가 됩니다.             

본문 32절에서 사도 베드로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살리셨으며,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부활에 대한 믿음과 깨달음,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덧입을 때, 누구나 부활의 증인 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가 사망에 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현재적으로도 그렇고, 미래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도 또한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께 대하여는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여러분 또한 미래의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부활의 믿음을 가진다면, 여러분은 늘상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과 죽음에 대하여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여러분도 그 날이 이르면 완전하게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세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이 들려서 점을 치는 여자 노에를 고쳐준 죄로, 노예의 주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재판도 없이 매질을 당하고 깊은 감옥에, 손발에 착고를 찬 채로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분명히 바울과 실라가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깊은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밤이 깊도록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기도할 때에, 감옥의 터전이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며, 손발을 옭맸던 착고가 풀렸습니다. 이 때문에 감옥의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감옥의 터전을 흔드시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바울과 실라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를 가진 사람의 담대함 모습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비록 억울하게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어도, 시비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기도했습니다.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분명한 부활신앙를 가지고, 가볍게 낙심하지 않고, 시비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면서, 어려워도 신령한 노래와 기도를 쉬지 않는다면, 언제나 여러분은 여러분을 가둔 감옥의 터전을 흔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보장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언제나 여러분을 억압하는 감옥의 터전을 철저하게 흔들어 부수고 무력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을 경함하면서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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