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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부르심 (렘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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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 (렘 1:4-10)

처서가 지나고... 이젠 공기가 좀 바뀌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기쁨과 충만한 생명력이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에도 인력거가 다니는 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서울 중에서도 아주 오래된 곳인 북촌에 가면... 관광용으로 인력거가 다니고 있다고 하니 참 놀랍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을 시작한 분이 아주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의 좋은 대학을 나오고 증권회사에서 근무하던... 그야말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가 그 일을 팽개치고 나와서 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일이야 말로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독특한 길을 선택한 그가 입은 티셔츠엔 YOLO란 영어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You only live once. 당신은 지금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단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삶이 참 길고 지루하기도 하고, 권태로운 시간도 참 많지만... 이렇게 단 한 번뿐인 삶을 산다고 생각해보면... 우리의 마음은 좀 엄숙해지고, 이대로 무기력하게 살 수는 없다는 절박한 마음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나마 우리들은 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보화 시대가 되어서... 그래도 조금 노력만 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그런 것을 조금은 알 수가 있고... 거기에 따라서 나의 여정을 생각하면서 살 수가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지금처럼 정보와도 단절되어 있고... 자아에 대한 존중도 없었던 옛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무엇을 토대로 해서 자기의 길을 결정하고, 선택하면서 살았을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를 함께 읽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아나돗에서 태어난 예레미야... 그의 아버지는 제사장이었고, 그가 자라난 아나돗은 평온한 농촌이었습니다.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났더라면... 그는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전원에서 나무를 가꾸며 평온하게 보내었을 텐데요... 그러다가 제사장으로서 자기의 역할이 필요할 따면 예루살렘에 올라가곤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 번  뿐인 기회를 살아가는 인생치고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예레미야는 만났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639-609B.C)로부터 시작하여서 여호아하스(609-608)와 여호야김(608-598) 그리고 여호야긴(598.12-597.3)을 거쳐서 시드기야(597-587)에 이르기까지 무려 다섯 명의 왕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보면 예레미야가 참 장수한 사람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는 예루살렘의 역사 중에서 가장 어둡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요시야 임금은 개혁자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도 이미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자신이 이집트 군인들과의 싸움에서 전사하면서 그의 개혁도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여호아하스의 시대는 불과 일 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이집트로 끌려가서 죽습니다. 

그에 이어서 왕이 된 여호야김은 바빌론에 대항하다가 죽음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왕이 된 여호야긴은 불과 석 달 만에 많은 귀족들과 기술자들과 함께 바빌론에 포로로 사로잡혀갑니다. 이른바 제 1차 바빌론 포수입니다.(597) 시드기야는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이 되었습니다. 바빌론에게 대들었다가 두 아들은 죽음을 당하고 그도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을 당하는 시간인 것이지요.(587)
   
단 한 번뿐인 생인데... 예레미야는 바로 이런 시대를 살았습니다. 2절과 3절에서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는 예레미야의 시대는 아주 어둡고 힘들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개인으로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때로는 이집트가 물결처럼 들이닥칩니다. 

이집트가 잠잠해지면 이제는 바빌론이 으르렁댑니다. 한 개인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둘 사이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무기력함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예레미야로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끔찍한 재앙과도 같은 일들이 자기만은 좀 비껴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렇게 암울한 시기가 예레미야에게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던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아나돗이라는 시골에서 나무나 키우면서 살던 예레미야가 어떻게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고... 그가 하는 말들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그에게 찾아온 새로운 계기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게 소용돌이의 뒤편에 숨어서 웅크리고 있지만 말고... 중심을 향하여 뛰어 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하여 나가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시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의 여러 민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하려고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로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자기 하나도 제대로 보존하기가 힘든 시기인데... 사람들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게다가 하나님은 그에게 단지 입으로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그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너는 이곳에서 아내를 맞거나, 아들이나 딸을 낳거나, 하지 말아라...’(렘16:2) 

하나님은 이렇게 예레미야에게 명하셨습니다. 고지식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려 할 때... 그것은 또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사람들은 그가 빨리 사라져주기를 바랍니다.

‘이제 예레미야를 죽일 계획을 세우자. 이 사람이 없어도...’(18:18) 

그는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구덩이 속에 던져지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참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니 예레미야의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자기가 겪는 어려움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이렇게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도 후회합니다.

‘아! 어머니 원통합니다.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15:10) 

이렇게 자기를 낳아 주신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렇게도 스스로의 생을 한탄하기도 합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된 날이 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하는데...’(렘20:14,17) 

이렇게 고달픈 길을 걸어가면서... 자기 스스로가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레미야의 마음이 참 묘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에게 말하라고 하셔도 입을 다물어 버리거나... 아예 요나처럼 먼 곳으로 도망을 가 버리면... 그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이런 어려움이나 고통은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레미야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도망할 수 없는 자기의 심경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20:9) 
   
참 복잡하고 묘한 심경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겠는데요...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면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사람들도 그를 조롱합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그런 소리를 듣고서도 침묵한다는 것은 그로서는 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입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 신비한 일이 있습니다. 그가 어려운 중에도...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언제까지 해야 하나... 이렇게 갈등을 하면서도... 말씀을 전할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렘20:11) 
   
사람이 항상 편한 것만 좋은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때로 그런 순간에 ‘아,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감동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항상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그들의 기분에 맞추어 주면서 사는 것도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아마 예레미야는 시대가 인정하는 공공의 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때론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길을 걸으면서... 숱하게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더라도...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느껴지는 신비한 희열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레미야를 생각하면서 느끼게 됩니다. 
   
시인 윤동주 선생은 ‘십자가’라는 시에서 예수를 가리켜서 ‘괴로웠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누구도 하기 힘든 선택이고 자기를 온전히 죽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 고통의 내면에는 다른 곳을 통해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깊은 행복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자기가 세상에 살면서 해야 할 바로 그 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놓으신 바로 그 일을 할 때에 와지는 행복이겠지요. 

예레미야가 날마다 내면의 갈등을 겪으면서...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날마다 징징거린다고나 할까요? 그러면서도 그 일을 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렇겠지요. 힘들기는 한데요... 그것은 참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그 일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날마다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고 말하면서도... 다시금 주님이 맡기신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김난도 교수가 ‘내:일’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런데 ‘내일’이 아니라 ‘내:일’입니다. 여기에 그 책에서 그가 말하려 하는 멧세지가 함축되어 있는데요. 우리는 ‘내:일’이라는 말을 둘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내일’ 이렇게 붙여서 읽으면 오늘 다음에 오는 날이지요. tomorrow 또는 future 이렇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일을 떼어서 읽으면 어떨까요? ‘내 일’입니다. 그러면 전혀 다른 말이 생각납니다. 나의 일... my job 이런 뜻으로 읽게 됩니다. 
   
그런데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내일’과 ‘내 일’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내 일’이 없는 ‘내일’은 없다고 할까요? 그러면서 그분은 직장을 의지하지 말고 직업을 의지하라는 충고를 합니다. 어떤 직장을 다닐까? 우리에겐 이게 참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어떤 직업을 갖는가? 어떤 일을 하면서 사는가? 정말 애착을 가지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 일’이 내게는 있는가? 이것이 우리에겐 참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그는 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일... 자부심을 가지고 하는 일... 마치 예레미야처럼 ‘다시는 안할 거야.. 더 이상 할 수 없어... 이젠 끝이야...’ 그렇게 수 없이 말하다가도 아침이면 일어나서 다시 하게 되는 일... 그런 일은 어떤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예레미야를 통해서 바로 그런 일을 우리들 모두에게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할 수 있는 일... 그 일을 하기 때문에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서 멀어질 때도 있겠지만... 한 번 시작하면 도저히 놓기 어려운 매력을 가진 그 일...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 모두를 바로 그 일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 일은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들이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 어려운 시대에 예레미야를 부르시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게 나를 향한 이야기로구나... 그 시대엔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면, 오늘은 하나님은 나를 부르시는 구나... 그런 깨달음이 우리들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들 대부분은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만큼 아는 것도 없고, 믿음도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그런 반응을 하나님께 보입니다. 

‘이제는 네가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여러 민족에게 나가서 내가 하는 말을 전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렇게 읽을 수가 있겠지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v.6) 자기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에게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는 너무나 어리고... 말주변도 없다고 그는 자기의 부족함을 말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가지는 마음일 것입니다.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주님이 맡기시는 일을 하기엔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우린 이렇게 늘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누구나 가지는 생각입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제 나이 80이 되어서 온갖 경험을 다 한 모세였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에 그도 나는 아니라고... 나는 너무 부족하고 말 재주도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면서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셔야 한다고 겸손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합니다.(출4:10) 
   
주님도 처음에는 그러셨던 시간이 있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셨는데...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 때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드리지만 예수는 나서기를 거절하십니다.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무척 조심스럽기는 한 문제이지만, 혹시 주님에게도 그런 머뭇거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킬만한 대목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 없어하고 당황하게 되는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장점보다는 할 수 없어 보이는 단점만이 두드러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아직도 나는 부족하여서 아는 것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면 입도 잘 열리지 않는 것... 사실은 그것이 우리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이런 부족함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곁에 계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v.7) 
   
우리는 여기서 약할 때가 가장 강한 순간이라는 역설도 생각을 하게 됩니다.(고린도후서12:10b) 바울이 느꼈던 것처럼 내가 약해서... 스스로의 능력이나 힘으론 아주 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그래서 더욱 간절히 주님께 엎드리고 주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하는 시간... 그 시간이 가장 강한 순간인 것은 주님이 우리 곁에 서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부족합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난 아무 것도 모릅니다.’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충성된 주님의 일군이 될 수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겠다.’(v.9b-10)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싫어하고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뽑고 허물고 멸망시키고 파괴하는 말을 하니까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기분 좋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정말 그랬습니다. 그는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오는 두 단어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세우며 심게 하겠다...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가지는 궁극적인 멧세지는 다시 세우고 심는 일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얼마나 희망에 찬 사람인가 하는 것을 구석구석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가 고향 아나돗의 밭을 사면서 장차 회복되어질 이스라엘을 행동을 통해서 보여 줍니다.(32:15) 그런가하면 졸지에 집과 예루살렘 성전을 등지고 포로가 된 이들에게 그곳에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번성하라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그곳에서 돌아올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우리가 가지게 된 가장 큰 희망은 새로운 언약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다왕국이 망하면서... 이젠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도 나라의 기능을 상실한 것도 가슴 아프지만, 이제는 자기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 가깝게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31:31) 

지금의 이 혼란과 고통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더욱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할 말이 바로이것입니다. 세우며 심는 것 말입니다. 지금은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고...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망하는 과정인 것 같지만... 이것은 더욱 좋은 것... 영원한 것...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세우기 위한 과정이라고... 오늘 이라는 시간이 하나님께서 정말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을 세우시고 심으시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을 선포합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29:11) 
   
우리가 하는 말이 사람을 쓰러진 세우는 일이라면...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에 희망을 심는 일이고... 미움이 가득한 세상에 사랑을 심는 일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소중하고 멋진 일일까요? 바로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비록 부족하고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지만,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들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밖엔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v.5) 
   
저는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이것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빠져나갈 수 있는 약간의 빈틈도 만들어 놓지 않으셨구나... 하는 것입니다. 좀 젊었을 때엔 이런 말씀들이 무척이나 숨 막히게 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깊은 안도감과 편안함이 있습니다. ‘난 완전히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혀 있구나!’ 

우리는 결코 우연히 세상에 오게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깊고 신비한 계획과 아주 섬세한 보살핌... 하나님의 강한 손길과 깊고 오묘하신 생각...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 가운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멋진 계획을 의식한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고, 우리의 삶의 격을 저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천성적으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세우고, 희망과 꿈을 심는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으니... 이것은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요? 
   
비록 힘들더라도... 사람들이 잘 듣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희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우리를 참 행복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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