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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샘을 파는 사람 (창 26: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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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을 파는 사람 (창 26:17-25) 
 
 
26: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26: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26: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6: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6: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6: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6: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6: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6:25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입추 말복이 다 지나갔는데도 날씨는 여전히 무덥고 칙칙합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시원한 샘물 한 대접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성경에 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샘을 메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샘을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이 파논 샘에서 샘물을 마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불레셋사람들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샘들을 메웠다고 했습니다. 남이 파논 샘까지 메워버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반면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은 "샘을 파는 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샘을 많이 판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삭'하면 우리는 대뜸 '우물 파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부터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이삭의 활동 무대가 사막 지대이기 때문에 '물'이 생명처럼 귀합니다. 성서시대에 샘은 곧 생존권이 달려 있었습니다. 샘을 많이 확보하는 족속들이 번성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성서의 땅에서는 샘에 대한 분쟁이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샘에 대한 아리고 쓰린 기억들도 많습니다. 우기 때는 물이 나오다가 그만 말라버리는 빈 우물도 많았고 먹지 못할 쓴 우물도 많았습니다. 빈 우물은 사람과 가축에게 덫이 되어 죽음의 웅덩이가 되기도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함으로 빠트린 우물도 빈 우물이었습니다. 쓴 우물은 복통을 가져오고 고생하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까지 하기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의 쓴 우물물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하기도 했습니다. 

우선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실하게 그리고 묵묵히 샘을 파는 한 이삭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이삭은 우물 파는 일이 그의 유일한 사명인듯 그렇게 열심히 성실하게 샘을 파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식솔들을 위해, 짐승들을 위해 쉬지 않고 샘을 파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니다. 이삭은 샘에서 물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샘을 파는 그런 사람으로 오늘 등장합니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방해꾼이 등장하여 우물파는 일을 방해해도, 그는 개의치 않고 정말로 열심히 우물을 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나 그랄 목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우물을 파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물을 빼앗고 우물을 메우는 사람들이요(18절), 남이 파논 우물물을 빼앗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이삭과 전적으로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과연 나는 우물을 열심히 파는 존재인가? 아니면 우물을 메우는 존재인가? 그리고 파더라도 적당히 파다 마는 존재인가, 아니면 물이 나올 때까지 끝까지 파는 존재인가? 방해꾼이 와서 우물 파는 일을 방해한다고 우물 파는 일을 포기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방해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물을 파는 존재인가?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도들은 영적으로 샘을 파는 사람들이야 합니다.  
샘을 파되 샘물이 나올 때까지 샘을 파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혹 샘을 잃게 되거나 빼앗기게 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시 샘을 파는 사람들이여야 합니다. 

샘을 파는 이야기가 하나의 비유라고 할 때, 도대체 샘이란 영적으로 무엇을 상징할까요? 
여러분, 본문에서 이삭은 쉬지 않고 열심히 샘을 팠는데, 그가 그렇게 판 샘은 복음적으로 무엇을 상징할까요? 물은 성경에서 종종 '말씀'으로 '성령'으로, 주님은 그의 비유에서 '자신'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이삭이 샘을 열심히 팠다는 의미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말씀 충만을 위해서, 성령충만을 위해서 예수 충만을 위해서 샘을 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읽은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이삭은 여러 번 샘을 팠는데, 그것은 단지 식수를 얻기 위해 샘을 팠다는 사실적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을 찾아 나섰다는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물을 찾아 끔임없이 샘을 판 것은 하나님을 찾아, 끊임없이 영적 작업을 하고 있는 이삭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삭은 샘에서 시원한 생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샘을 판 자가 샘물을 먼저 마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도 그렇지만 영적인 것도 결국 "목마른 자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누가 더 목마라르냐? 더 목말라 하는 자가 샘을 파게 되고 샘을 마시게 되며 그것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 84:4~6절에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했습니다. 

주의 집을 찾고, 주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메마른 광야에 샘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만이 아니라 이곳 저곳에 샘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샘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물을 마시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메마른 광야에 샘을 파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며칠동안 땀 흘려 파다가 거대한 암반을 만나는 바람에 덮어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국 샘을 만들어내고야 맙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은 결국 그같은 기적을 만들어 내는 줄로 믿습니다.

결국, 이삭이 샘을 팠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이고, 그는 계속해서 성령을 좆아 살려고 애썼고, 그 때마다 방해하는 수 많은 방해꾼들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축복을 누렸다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샘을 파면서 많은 저항에 부닥쳤습니다(20, 21절). 
본문에 잘 나와 있듯이, 이삭이 샘을 파면, 그랄 목자들이 와서 시비를 겁니다. 자기들의 샘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쫒겨 납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 샘을 파면 그곳에 와서 또 싸움을 겁니다. 그러면 이삭은 또 샘물을 양보하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서 다시 새로운 샘을 팝니다. 이처럼, 본문은 샘을 사이에 놓고 이삭이 그랄 사람들과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진리의 샘을 파고 참된 신앙의 샘을 파는 사람들은 부정 혹은 반항과 부닥칠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삭과 그 종들이 판 첫 번째 두 우물을 에석, 그리고 싯나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툼 그리고 대적함이란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샘을 파는 사람들이 샘을 파면서 많은 저항에 부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것을 변명으로 삼지 않고 계속해서 샘을 팠고 샘물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보려고 하면 부딪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사건건 그런 것들을 모두 변명거리로 삼는다면 샘은 팔 수 없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샘을 파면서 그 샘과 관련해서 빚어지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보여주는 이삭은 싸움을 피하고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너희도 이와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양보하라." 그것이 손해되고 좀 억울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양보하라고 오늘 이삭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정말, 억울하고 양보하긴 싫지만, 그렇게 양보하다 보면, 그것이 지금 당장에는 손해처럼 보이지만, 종국에는 축복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싸움을 피하십시오. 싸움은 피해야 합니다. 싸워서 이득 볼 일이 없습니다. 싸움은 최후의 수단일뿐입니다. 도저히 방법이 없을 때 죽기를 각오하고 하는 것이 싸움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삭은 세 번씩이나 우물을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지만, 그렇게 세 번을 양보한 후, 이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과거보다 더 좋은 우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곳 우물을 일컬어 "르호봇" 곧 "장소가 넓다"라고 이름 붙였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끊임없이 양보하는 이삭을 향해,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24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까닭없이 다가와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맛서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 양보하고 피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대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당장은 손해되는 것 같고, 혹 지는 것처럼 보여 분할지 모르지만, 분명 하나님께서는 과거보다 더 크고 넓은 우물로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축복을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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