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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 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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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 4:43-54)


서울에서는 밤에 많은 별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는 별이 머리 곧 위로 쏟아질 것 같은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전자 망원경으로 보면 은하계에서 약 2000억 개 정도의 별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약 10만 개 정도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지만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데에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너무 미세한 것도, 너무 큰 것도 볼 수 없는 한계성이 있습니다.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큰 소리도, 너무 작은 소리도 듣지를 못합니다. 사람의 인식의 능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모르는 세계가 훨씬 더 많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인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만을 인정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깊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서 이틀을 거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수가 성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을 떠나 갈릴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이 갈릴리로 올라가려면 고향인 나사렛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에 들리지 않고 갈릴리로 바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44절에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 들리지 않은 이유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자라는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다 보았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비범함이 있다는 것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가난한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라는 선입견에 사로 잡혀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입견, 고정 관념을 가지고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따르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고 할 때 ‘영광’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독사’(doxa)입니다. 이 ‘독사’라는 단어 안에는 ‘인정 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귀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시면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내가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면서 한 가지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에게 구원의 자리로 회복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로부터 인정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내 삶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입견과 고정 관념에 사로 잡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나사렛을 그대로 통과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이 나사렛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아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통과하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함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머무시는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들리지 않고 가나 마을로 올라가셨습니다. 가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쁨으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가나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혼인 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번째 기적을 보이신 곳입니다. 가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기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숙청하시는 장면을 보고,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가지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속이 후련하고 통쾌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뤄진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하는 이유도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 보다는 낫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인식의 한계에 갇혀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경험 안에서만 믿음을 고백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자신의 경험을 뛰어 넘어 하나님을 인정하는 성숙한 믿음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적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마을에 머무실 때 헤롯 왕의 신하가 찾아 왔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약 37km 정도 떨어진 꽤 먼 곳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가나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가나까지 온 것입니다. 그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했고, 용하다는 의사를 불러서 온갖 치료를 했지만 병세는 더 위중해져만 갔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기적을 행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가나에 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죽어가는 아들의 절박한 상황을 말씀드리고 자신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여기에서 헤롯 왕의 신하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한계에 갇혀 있는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버나움으로 모시고 가기 원했습니다. 현장에서 기적을 행하심으로 아들을 낫게 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신하가 예수님께 계속 요청하는 것은 자신의 집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아들이 누워 있는 병상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47절 후반 절에 보면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49절에 보면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고 합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경험의 현장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가기를 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 고백합니다.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으로 볼 때 이것은 대단한 고백입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지를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 달라는 아버지를 향해 48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48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언제까지 너의 믿음이 네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제한적인 믿음의 상태에 머물겠느냐?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인정하는 것인데 말씀과 능력을 언제까지 너의 경험 안에만 가둬두려 하느냐? 그 인식의 한계에 갇혀 있는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성장 단계로 나아올 것을 촉구하시는 도전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말씀이 50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나와 함께 가서 현장에서 되는 일을 보고 믿으려 하지 말고 나를 믿는다면 내가 하는 말을 믿고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의 도전을 받아 믿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가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의 아들이 나았다고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인정하고 믿음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아들이 나은 것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대로 이뤄질 것을 믿고 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뛰어 넘어 믿음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가던 도중에 종으로부터 아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신하가 종에게 언제부터 회복이 되었느냐고 물으니 일곱 시라고 말합니다. 일곱 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1시입니다. 그 시간은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아 있다고 선포하신 시간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예수님께서 너의 아들이 살아 있다고 선포하신 말씀의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지고 신하가 일어서서 집으로 향했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신하의 아들을 살리는 이 기적을 통해 인식의 한계에 갇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를 더 깊고 성숙한 믿음의 세계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깊고 크신 은혜의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중심으로 도리어 아집과 고집으로 왜곡된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뛰어 넘어 순종한 신하의 믿음은 죽어가는 아들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예수님은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이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신 놀라운 축복의 자리에 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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