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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 됨을 위하여 (요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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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됨을 위하여 (요 17:11-19)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봉사에도 단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서로 화합하여 봉사하는 정신과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유태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나와 너]란 책에서 사람이란 말의 어근이 “서로서로”란 말에서, 곧 나와 너와의 조화에서 유래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의 의의는 서로서로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서로서로 화합하여 봉사할 때의 기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을 절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스튜어트 아베리가 쓴 책 [느헤미야를 통해 본 참 지도자론]에서 ‘서로’란 용어에 붙은 여러 가지 아름다운 생활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 돕고 서로 지지해주며 함께 모든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그 중에 몇 가지를 지적하였습니다. 

“서로 위하여 기도하라(엡6:18). 서로를 격려하라(히10:24,25). 서로 대화하라(엡6:18). 서로 봉사하라(갈5:13). 서로 친절을 베풀라(롬12:13). 서로 사랑하라(요일3:11).” 
우리는 모두 서로 봉사함은 물론 모든 일상생활에서 화합을 위해 힘쓸 때 지체로서의 아름다운 사명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랍비는 유대인의 교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랍비에게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화목과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형제우애를 강조하면서 격려하며 살 것을 권면했습니다. 어느 날 밤. 가족이 잠들 무렵, 한 아들이 랍비에게 와서는  
“아버지. 다른 형제들은 잠만 자는데 저는 자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얘야, 그래서는 안 된다. 다른 형제의 흉을 보는 것보다 다른 형제와 같이 자는 편이 훨씬 나은 거란다"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저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것입니다.”라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다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우리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람들인 우리들이 잘 되기를 위해 지금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셨으니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예수님은 그렇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제가 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이전에 하나님의 자식이란 말입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경우에도 버려진 존재이거나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어린 딸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시골서 단독 목회를 할 때입니다. 어린 자녀 둘을 데리고 잠시 서울을 다니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큰 딸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 날이 토요일입니다. 주일 예배를 위해 목회지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다가 그만 사고가 터진 것입니다. 그때 교회에서는 장로님이 자기가 예배를 인도할 터이니 내려오지 말고 아이를 찾아보도록 하라는 말씀도 주셨지만 아무래도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골 교회로 막차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아침에 잃어버린 아이를 저녁 가까이 되도록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마음이야 불편했지만 그 밤 교회에 당도하여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드리고 하나님 앞에 밤새도록 엎드립니다. 하나님이 찾아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허락하여 주신 딸인데 제가 그만 부주의해서 아이를 잃어버렸네요.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면 아이를 무사히 찾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엎드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홍 전도사야 너 네 딸이 소중하니?” “그야 말로 다 할 수 없이 소중합니다.” “그러냐 한데 너 이거 아니?” “무얼요?” “네가 네 자식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내 자식 더 사랑한단다. 그 아이는 네 자식 이전에 내 자식이라는 사실을 너 알고는 있니?” 그 순간 저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제 자식인줄만 생각했습니다. 한데 그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시실을 언제나 명심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아이들을 키우겠습니다.” “알았다 염려하지 마라. 그 아이들 내가 키울 거다.” 그래 편한 마음으로 주일을 지켰습니다. 다시 감사함으로 월요일을 맞아 서울로 향했습니다. 강남 고속터미널에 도착해서 전화를 하니 아이를 찾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적에도 부모로서 많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실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정성을 쏟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자녀들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거기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아니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담긴 중보기보보다 더 아름다운 기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근본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식들을 위해 기도할 적에도 “그 아이가 내 아들 내 딸이기 이전에 하나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소중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잘 되게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가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건 내 자식이니까 요거 내가 잊어버릴 수 없는 내 생명처럼 생각하는 내 자식이니까 어떻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 이 아이 하나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해 주세요. 이렇게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자기의 아들의 신앙을 위해서 여러 해 동안 기도를 했는데 응답을 못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때 훌륭한 목사님을 만나 가지고 상담을 하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자식이 뭐 부자 되게 해 달라 출세하게 해 달라 그런 기도가 아니고 내 자식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왜 이거 안 이뤄주실까요?” 

그때 목사님이 반문하기를 “그런데 장로님이 그 아들을 위해 기도할 적에 어떤 생각으로 기도 했습니까? 내 아들인데 내 체면이 있지 내 자식인데 애비의 체면을 봐서라도 내 자식이 이렇게 돼야 됩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그런 심정으로 기도를 했습니까? 아니면 주여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의 사람인데 하나님에게 손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저 하나님 손해 안 되도록 이 하나님 아들이 좀 잘 되게 해 주시오 정직하게 그런 마음으로 기도 했습니까?” 

장로님이 그런 반문을 받고는 “저는 정직하게 뒤의 것보다 앞의 것이 더 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체면이 있지 내 자식이 이렇게 돼 가지고야 내 체면이 깎여서 되겠는가 내 자식인데 이렇게 해 주십시오. 그런 생각이 더 강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그 생각은 뒤로 미루고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 사람인데, 하나님 일군인데 하나님 손해 안 되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세요. 그 아버지 체면보다 하나님 체면을 중점으로 하고 한번 기도를 해 보시오.” 

그렇게 인제 자문을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 나오는 얘기입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첫째 이유는 이들은 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더 소중합니다. 이들은 다 소중한 하나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기에 소중하게 생각을 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9절에서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하고 기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온 분이고 예수님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 제자들이 이제 다 깨닫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사람들 아버지의 것인 이들을 위해서 내가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둘째 이유는 제자들로 말미암아 아들이 영광을 받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되겠는데 하나님 영광 받으려면 아들 내가 영광스럽게 돼야 됩니다. 처음에 그런 얘기를 17장 첫머리에서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렇다면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제자들이 영광스럽게 돼야 또 제가 영광스럽게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십니다. 

자식들이 잘못된 길로 간다면 그 부모가 영광스럽게 되겠습니까? 아니죠 오히려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못된 사람이 되고 못된 길로 가면 예수님의 영광이 안 되고 예수님의 영광이 안 되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는 아들인 제가 영화롭게 돼야 되겠고 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거는 제게 주신 이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잘 돼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 사람들 영화롭게 해 주세요. 그렇게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첫째 기도 이유는 이 사람들 다 아버지의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둘째 이유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제가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 잘못되면 제 영광이 다 깨지고 제 영광이 깨지면 아버지의 영광에도 손해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위해서 기도하는 세 번째 이유가 오늘의 본문인 11절에 나오는데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느냐 하면 제자들은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서 나는 아버지께로 가지만 이 제자들은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되는데 이 세상에 험한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아니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삼년동안 예수님께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 예수님의 품 안에 늘 감싸서 지내셨지마는 이제 이들을 다 세상에 두고서 떠나실 마당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라는 말씀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드레와 야고보 요한도 함께 부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택한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거듭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건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성령님을 통해서 감동해 주시고 믿음의 세계로 불러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자녀 삼아 주셨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녀삼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일꾼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모든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이끌어주지 아니하면 우리가 아버지께 붙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모든 수고를 다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주시고 능력주시고 직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우리의 길을 그리고 자녀의 길을 그리고 우리 모두의 연합체로서 교회가 잘 되기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도록 자녀된 우리들의 길을 열어 달라고 우리 역시 주님처럼 기도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얻어야 하고 누려야 할 영광은 무엇이냐 하면 먼저는 영생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영생입니다. 다음으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안다고 하는 것이 왜 그리도 중요한 것인가 하면 바로 아버지의 모든 능력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모습이 그 이름 가운데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엘로이 목자 되신 하나님, 여호와 이레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 우리의 승리의 깃발이 되시는 하나님 여호와 삼마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등 하나님의 이름을 알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전히 보호하여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이름에 합당한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그 이름처럼 우리를 살피시고 이끄시고 보호하시고 공급하신다고 할 때 우리 가운데 그 어떤 두려움도 염려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에게 예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에게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것도 이제 내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에게 내가 좋은 훈련을 했습니다. 좋은 설교를 해 주었습니다.좋은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지 않고 내게 주신 자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다고 기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항상 말씀하는 것은 내가 하는 말들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설교를 하실 적에도 내 말을 너희들에게 준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내가 너희들에게 전해 주는 거다 그렇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오늘도 똑같이 우리가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목사들의 경우에도 설교를 빙자해서 자기의 하고 싶은 소리를 실컷 떠들면 그건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말씀을 전할 적에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어 하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받아서 이것을 전달하는 말씀을 위탁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내게 주신 자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해 주느냐 하면 저들을 보존해 주십니다. 보존하고 지켜 주십니다. 12절에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라고 예수님이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은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잘 지켜 줍니다. 보존해 줍니다. 한 사람 다만 멸망의 자식을 빼놓고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잘 보존했습니다. 잘 지켰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도 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지키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 성경에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고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의로운 나의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주신 말씀대로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길에 맡겨드려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겨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가장 아름답게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책임을 맡아도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님도 지금 그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보존하고 지키었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내 인생을 다 맡기고 위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 돌아오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책임지시고 그를 잘 지켜 주시고 보존해 주십니다.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흔들림 없이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그 다음에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여 주셨다고 기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십니다. 성부께서 성자 예수님 안에 계십니다. 또 성자 예수님이 또 성부 하나님 안에 계시죠. 그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데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예수님 을 통해서 내가 예수 안에 있게 되고 또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안에까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내게 주신 자에게 영광을 주신다고 예수님이 기도하십니다. 22절에 보면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습니다.”라고 예수님 기도하십니다. 주께로 오는 자에게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주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부끄러움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주님에게 오는 자에게는 주님의 영광스러움 같이 우리가 다 영광스럽게 된다고 바울을 통해서도 그렇게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들에게 나는 영생을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나눠줬습니다.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했습니다. 

또 일치를 이루어 주었습니다. 영광을 주었습니다. 라고 기도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신 주님이신가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크신 능력의 주님이신가를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결코 나약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그분이 약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임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약한다면 결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만이 승리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할 때 주님은 강함 되신다는 사실을 언제든지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주님 앞에서 힘 자랑 하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서 지혜 자랑하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서 돈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 앞에서는 우리의 나약함만 자랑하십시오. 우리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기꺼이 주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사랑의 하모니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건축이라는 제목의 연극이 있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낯선 섬에 도착하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해서 거기에 당도했는지를 몰랐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토론하기 시작합니다. 여기가 어디인가? 왜 우리가 여기에 왔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때 한 사람이 섬 한 구석에 쌓여 있는 건축 자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건축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어떤 이는 날씨가 더우니 수영장을 만들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음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시급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집을 짓자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병원을 짓자고 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그 섬 옆에도 섬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섬에 낯선 사람이 사는 것 같다고 하며 무슨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운 마음이 들어 건축 자재로 성벽을 쌓아야 한다고 해서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낯선 청년이 나타나서 자기가 건축업자라고 하면서 ‘여러분을 이 섬에 오게 하신 분이 나를 이곳에 보내서 건축을 돕게 하셨습니다. 여기 설계도가 있습니다. 그 의도를 모르고 다른 것을 짓고 계시군요.’ ‘그럼 무엇을 지어야 한단 말이오?’ ‘여러분과 나를 이 섬에 보내신 분은 옆 사람과 교제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벽을 쌓고 있군요.’ 
섬사람들은 그 청년을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수상하다고 스파이 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다가 ‘죽여라 죽여라’ 하면서 돌을 던지고 천둥소리 울리고 전기가 나가면서 캄캄해졌습니다. 잠시 후 불이 켜지자 돌팔매질 당하던 청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습니다. 

짤막한 내용이지만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분은 화평을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의 다리를 만들려고 오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의 다리를 만들려고 오셨습니다. 화평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화평의 다리가 되어주셨는데도 서로 담을 쌓고 있지 않습니까? 경제 한파라는 이유로 담을 더 높이 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편견의 벽, 미움의 벽, 불신의 벽, 의심의 벽, 교만의 벽을 계속해서 쌓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이 다락방 기도를 통해서 세 번이나 우리가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하나 됨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죄는 분리됨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성도라 부르고 하나님의 집을 성전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을 성물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아놓은 책을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성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한자로는 가장 존귀한 책을 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말씀 중의 말씀은 당연히 성경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줄로 믿습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의 특징은 한 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됨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됨의 기초를 엡 4:4~6에서 일곱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희망도 하나요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됨의 비결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나와 다른 사람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두가 다 나와 같지는 않습니다. 비슷해 보여도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까? 다르지만 연합하면 됩니다. 화합하면 됩니다. 조화를 이루면 됩니다. 한 줄기에서 같은 꽃인데도 한 송이에도 꽃받침이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비슷한 꽃받침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꽃잎을 이루는 것입니다. 

거기에 조화가 있고 균형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균형이 흐트러진 것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다르지만 모두가 소중한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모두가 내 마음과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릅니다. 사는 방식이 다릅니다. 사는 환경이 다릅니다. 이해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같은 몸 안에도 여러 가지 기능들을 담당하는 각종의 다른 신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로 균형을 이룹니다. 그 균형이 깨지게 되면 그것이 바로 병입니다. 

다름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다른 것은 알아도 인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처음에는 삐꺽대는 것 같은데 이윽고는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아하 그런 것이로구나. 개와 고양이가 앙숙이라고요? 사실입니다. 한데 같이 키우다 보면 처음에는 서로 으르렁대는 것 같은데 이윽고는 서로가 없으면 못사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얼마나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지 모릅니다. 조금은 귀찮아 할 때도 있지만 다치게는 하지 않아요. 

그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먼저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가진 자에게는 엄하셨습니다. 하지만 약한 자에게는 항상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접근하셨습니다. 먼저 품어 주셨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향해서도 저를 정죄하는 사람들에게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는 이윽고 여인에게 말합니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더냐?” “예 없습니다.” “나도 노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지금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보면 제자들의 속셈이 뻔히 다 보입니다. 

그런데 단 한 마디도 제자들을 야단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운데 가진 자가 누가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강한 자가 누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우리 역시 긍휼의 마음으로 서로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상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연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우리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그러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먼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말을 앞세우지 말고 먼저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기 싫은 거야 다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오죽하면 그러겠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시고 저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먼저 고려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 입장에서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서로의 마음이 상할 행동과 말은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래 무슨 말을 해도 한 번 더 생각하고 하십시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전기도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서로 그냥 튀는 것 아닙니까? 사람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서 좋지 않은 말은 나도 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이야기해 놓고도 내 마음도 좋지 않은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 됐든 항상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나 편한대로 이 편한 세상을 살자고 하지 마시고 나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함께를 위해서 조금씩 양보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세요. 축구 경기를 합니다. 골을 넣는 사람은 골게터입니다. 소위 골잡이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 골게터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팀이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팀입니다. 하나의 팀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일부러 색안경을 낄 필요가 없습니다. 일부터 도끼눈을 하고 쳐다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말을 해서 상처가 될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거 말해서 도움이 되는 것 없고요 그런다고 바뀌는 것 없습니다. 바뀌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사람의 힘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성격이 하루 아침에 바뀌겠습니까? 

그 삶이 하루 아침에 바뀌겠습니까? 단지 바뀐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근본은 하나님이 바꾸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이요 그래서 지금 주님도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특히나 상대방이 비난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은 오직 주님께로 돌리십시오. 주님 앞에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 중보의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름답게 열매 맺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불평하면 불평의 열매를 거둡니다. 내가 비난하면 더 큰 비난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칭찬하면 칭찬의 열매를 배려하면 배려의 열매를 거둡니다. 한 마디로 생명을 얻습니다. 그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는 하나됨의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유명한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 몇 명의 소년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화판 더미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예민한 그의 작업이 방해를 받아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는 붓을 집어던지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에게 화를 내며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소년은 울면서 화실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다시 붓을 들고 예수님의 얼굴을 완성시켜 보려고 애썼지만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창조성과 영감은 화를 낸 후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울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미안하구나. 내 말이 너무 지나쳤다. 나를 용서해다오. 나는 너보다 더 잘못했구나 너는 그저 화판에 걸려 넘어진 것뿐인데. 나는 공연히 화를 내어 나의 생명 안에 흘러드는 하나님의 영감을 막았구나. 나와 함께 다시 화실로 들어가지 않겠니?” 
그런 후 그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겸손함과 용납과 사랑에서 화목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역사는 교만과 우월감 또는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감정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다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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