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왜 깨닫지 못하십니까? (막 8:1-21)

첨부 1


왜 깨닫지 못하십니까? (막 8:1-21)


탈무드에 보면, 사람의 머리 속에는 기억의 방과 망각이라는 방이라는 두 개의 방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은 기억의 방 속에 집어넣고, 또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망각의 방 속에다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일들을 기억하기도 하고 어떤 일들은 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탈무드의 말은 일반적으로는 진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진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과 망각의 기능에는 때로는 혼란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기억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어떤 것은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데 기억해야 할 것을 쉽게 잊어버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천명을 먹이신 놀라운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저 같으면, 예수님이 이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제 눈으로 한 번만이라도 확인했다면 내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두 번씩이나 보고도 제자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 이후에 무리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문 14절에서 문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짧은 항해이지만 그래도 항해는 항해인데 도시락을 챙겨 가지고 가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이것 때문에 16절에 보면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면서 또 다시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야, 우리가 양식을 챙겨 가지고 타지 않아서 큰일났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  그래서 다시 떡으로 인해서 걱정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먹이시고, 사천명을 먹이셨던 두 번에 걸친 기적의 현장에 제자들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기적을 행하시는가를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 기적의 공통점의 명백한 가르침, 내지 교훈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그 분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할 수가 있다.  이 기적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는 정녕 우리의 모든 필요에 의한 공급자이신 것을 기적을 통해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또 걱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솔직히 제자들의 모습만 그렇습니까?  어디 제자들의 모습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까?  언젠가 내가 역경에 처했을 때 부르짖었더니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나를 고통에서 건져내셨던 놀라우신 그 주님.  주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나는 그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은 내게 오셨고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소망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  나는 주님 앞에 흥분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역경, 오늘 내가 처한 환경 속에서 나는 또 다시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떡하지?  오늘 나는 이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제자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들이 떡 때문에 걱정하는구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내가 두 번씩이나 기적을 행하여 너희들의 필요를 공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를 신뢰하지 못하느냐?  아직도 내가 너희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자요, 구세주요, 그리고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 둔하냐?  경상도 말로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니 대가리가 돌대가리냐?"  뭐 이런 말이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여기서 깨닫지 못하느냐는 말씀이 단순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기억력의 문제만 문제시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너희들이 자꾸만 기억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에 처해 있구나"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두 번씩이나 기적을 경험하고도 아직도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15절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필이면 여기에서 왜 누룩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까?  누룩은 한 마디로 말하면 영향력에 대한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빠른 속도로 빨리 퍼져나가는 것.  이것을 예수님은 누룩으로 상징하고자 의도하셨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누룩은 좋은 영향력의 상징으로 쓰여진 예도 성경에 있습니다만, 그러나 대부분 나쁜 영향력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령, 고린도전서 5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지금 자랑하고 있는 것, 너희들이 자랑하고 있는 육신적인 자랑, 이것은 옳지 않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제자들이 지금 염려하고 있는 이유, 두 번씩이나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두 가지의 나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바리새인의 영향이고, 또 하나는 헤롯의 영향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바꿔야 할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영향을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자주 우리는 거꾸로 세상에 의해서 오히려 우리가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영향을 받았기에 오늘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똑같은 비슷한 사건 앞에서 좌절하고 낙심하며,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영향이 있었기에 ….  두 가지 영향을 지적하십니다.

첫째는, 바리새인의 영향입니다.
그것을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으로 경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에 보면 우리는 바리새적인 누룩의 정체, 그 영향의 정체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 스크린에 띄워진 내용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바리새인의 누룩은 바로 외식이다 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외식주의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을 읽다가 "외식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보고서는 외식을 안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외식은 그런 외식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이란 것은 안으로는 텅 비어 있으면서 그 내용을 갖추지 못한 채 바깥으로만 관심을 갖는 것, 이것이 바리새주의의 특성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바리새주의는 외식주의 혹은 형식주의라고 정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전통을 중요시합니다.  어떤 종교의 형식, 그 틀을 수호하고 그 틀을 지키는데 아주 민감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있어서 주님을 실망시키고 있었던 결정적인 오류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종교의 형식을 갖추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내용을 갖추는데는 열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에 신랄하게 책망하셨던 것 가운데 하나가 "회칠한 무덤이여, 회칠한 무덤이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무덤을 겉으로만 꾸미는 것입니다.  무덤을 열심히 겉으로 꾸며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안에는 썩고 있습니다.  죽어 있는 뼈다귀들, 그리고 냄새와 부패함이 그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런 바리새인들의 신앙 생활의 특성을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신 대목을 복음서에서 여러 군데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유형의 신앙생활을 했느냐를 우리가 잘 알 수가 있는 대표적인 대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앞에 스크린에 띄워진 마태복음 23장 2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신앙 생활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이 십일조에는 열심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한 것을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보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때때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소위 이 땅의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이 바리새인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바리새인들이 우리들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십일조는 열심입니다.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종교인들의 대표적인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 당시에는 십일조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냐?  십일조 열심히 하고, 요즈음 말로 하면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꼬박 꼬박 잘 나오고, 그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때로는 성경공부도 하고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이런 모습들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중요합니다.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문제를 삼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난 삶에는 열중하면서도 더 중요한 것, 그러니까 의롭게 사는 것과 사랑하며 사는 것, 그리고 믿음직스럽게 신실하게 살아가는 진정한 삶의 내용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이 바리새인들의 삶이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양보와 배려도 무시해버리는 일이 다반사이지 않습니까?  교회에 나와서 설교는 듣지만 행동의 변화가 없는 삶의 모습을 우리는 나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가끔씩 상식 이하의 일이 벌어지는 모습을 우리들에게서 볼 때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교회에 나옵니까?  왜 신앙 생활을 하십니까?  저는 교회에 나오는 이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문제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았다는 것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출발입니다.  신앙 생활의 새로운 출발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구원받은 자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날마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종교인의 모습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예배를 드렸고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에게서 내 신앙이 증명되는 순간은 예배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 받은 바 은혜가 불과 몇 미터 되는 저 마당까지도 연장될 수가 없다면 우리의 가정 생활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우리의 직장 생활은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그러고서도 우리가 과연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저는 한국 교인들의 최대의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것과 삶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앞장서는 것,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리고 이웃들을 구체적으로 돌보는 것, 그리고 빛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이웃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다가서서 내가 손을 벌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 이것이 신앙 생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그런 삶의 변화나, 그런 의지가 없다면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는 것조차도 주님 앞에는 오히려 송구한 일일 수가 있습니다.

저는 바리새인들의 최대의 문제는 변화의 의지가 없이 종교적인 형식만을 지키려는데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우리가 바리새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자라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리새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서 어느 정도의 찬송과 기도에는 익숙해졌지만 아직까지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너희가 바리새인의 영향을 받고 있다.  신앙의 형식과 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신앙의 삶을 형성하는 진지한 삶의 변화에 대한 의지가 없는 너희들이여,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과 헤롯, 이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시는 대로 헤롯은 로마로부터 임명을 받아서 그 당시 팔레스타인 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왕이었습니다.  물론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헤롯 가문에게 공통된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같이 욕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것이 헤롯 왕가의 대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에게 필요 없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물론 이 세금의 상당한 부분은 헤롯 왕가가 그들이 중간에서 가로채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뇌물을 즐겼습니다.  철저하게 헤롯 왕가가 대표하고 있는 생활의 한 단면은 세속주의, 혹은 물질주의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바리새주의가 형식주의, 내지는 외식주의를 대표한다면 헤롯주의는 세속주의,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물질주의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이러한 헤롯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세상에 영향을 주기는커녕 그들이 오히려 물질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신앙은 자라나지 못하고,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물질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눈이 멀어버렸다고 주님께서는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16절을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보십시오.  지금 제자들은 무슨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는데, 누룩 소리가 나오니까 제자들은 얼른 마음속에서 떡을 떠 올렸단 말입니다.  뭐 눈에는 무엇 밖에 안 보인다고, 떡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예수님께서 누룩에 관한 말씀을 하시니까 그 말씀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모두가 떡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제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물질에 대한 관심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오늘 이 시대의 최대의 우상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황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들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옛날에 우리가 아주 위기에 처하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누구를 불렀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어머니를 찾았지 않습니까?  어려운 일에 처하면 어머니.  이북 사람들은 "오 마니."  요즈음은 어려움에 처하면 "오 마니"를 찾는 게 아니라 "오, 머니"하고 찾는다고 합니다.  시대의 풍자일 수가 있습니다.  돈 앞에 무릎을 꿇고 황금 앞에 무릎을 꿇는 오늘 현대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셨겠습니까?  너희들이 내 제자들이라고 하지만, 막상 내 제자도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구나.  늘 떡 생각만 하고 있구나.  물질 생각만 하고 있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물질은 필요합니다.  성경은 물질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우리의 숭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의 물질주의를 극복할 수가 있습니까?

저는 물질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상을 두 가지에서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우리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우리가 정말 물질주의를 극복한다면 그것이 우리 헌금 생활에 나타나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물질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헌신하는데 내가 물질은 드릴 수가 없다, 이것은 내가 아직도 물질주의의 노예로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는 신용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정말로 변했다 회개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그 돈을 사용하는 용도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전에는 나를 위해서 내 욕심만을 위해서 쓰여지던 돈이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이웃들을 위해서 사용될 수가 있느냐?  이것이 물질과 관련된 내 가치관을 시험하는 척도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침례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침례교에서는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침례를 줍니다.  온 몸이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그렇게 침례를 주는데 마지막으로 한 성도가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왜 안 들어오느냐 고 하니까 "목사님, 나 지금 지갑을 갖고 있어서요."  그 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형제여, 당신의 지갑도 침례를 받으셔야 합니다."

세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례라는 것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부활되었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를 위해서만 사용되던 물질에 대한 가치관이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역을 위해서 사용된다.  물질에 대한 구체적 헌신이야말로 내가 변했고 내가 회개했고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증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증거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물질적인 헌신을 하지 못하면서 교회를 어떤 물질을 이용하려는 장소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귀어서 내가 취직이나 하고, 혹은 적당히 돈이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6.25 사변 직후에 외국에서 원조 물자가 오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에 나왔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그들을 가리켜서 선교사들은 Rice Christian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런 지경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동기를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니까 축복 받는다더라, 물질적인 축복.  신앙의 유일한 동기가 물질의 축복이 되어 있는 사람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축복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만약 물질의 축복 때문에 예수를 믿었다면, 만약에 내가 신앙 생활함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축복이 오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언제든지 주님을 버리고 떠나갈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물질적인 축복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보다 위대한 꿈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삼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내 인생이 쓰임을 받을 수 있다.  더 높은 가치와 더 높은 기쁨 때문에 인생을 사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물질 앞에 굴복하고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물질에서 해방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  주님의 가슴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그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본문 1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제자들이 보아야 할 것은 주님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누구십니까?  창조자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오천명을 먹이셨던 기적의 현장에서, 사천명을 먹이셨던 기적의 현장에서 그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던 놀라우신 주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보지 못하고 떡을 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시선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내 눈이 열려 살아 계신 주님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뭐가 걱정입니까?  그 주님이 내 곁에 계시면 말입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왜 보지 못하느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주님이 내 앞에 계시고 그 분이 지금 내게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말씀이 내게 용기가 아닙니까?  그가 말씀하시면 천지는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면 세상은 새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주님, 그러나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고 그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제자들의 안타까운 모습.  "어찌하여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자꾸만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에게 보일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의 위대한 표적은 무엇입니까?  그가 물 속에 들어갔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가장 위대한 기적은 그가 여러분과 저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그가 죽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그가 바로 우리의 소망인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생명인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 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함께 하십니다.  왜 염려하십니까?  왜 걱정하십니까?  왜 좌절하십니까?  소망이신 주님, 살아 계신 주님이 내 앞에 계시고 그가 내게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는 비결인 것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염려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좌절의 늪에서 허덕이십니까?  왜 깨닫지 못하십니까?  아직도 깨닫지 못하십니까?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