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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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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9:14-17)

(마9:14-17)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1. 예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여러 세리들과 죄인들이 와서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세리와 창녀 등은 죄인으로 규정해서 멸시천대를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는 것 또한 자신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마9:11)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며 비난하며 시비했습니다. 이를 들으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9:12-13)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바로 그 때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질문합니다.
(마9:14)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9:15-17)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께서 금식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3가지 비유로 설명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고, “혼인집 손님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유합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 슬픔의 금식을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바른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비유한 사람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하셨습니다.

(요4: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이는 훗날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체험하고 난 후,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베풀어야 할 것을 염두에 두시고, 예수께서 세례예식을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날, 즉 오순(五旬)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이 성령강림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체험한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설교를 하자, 그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하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행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이에 사람들이 모두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3천명이나 더 하였습니다. 이렇게 훗날을 대비하여 예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세례를 베풀도록 하셨는데, 사람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 제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자기 스승인 세례 요한에게 가서 말하자, 세례 요한이 이렇게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밝히 전합니다.

(요3:28-29)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세례 요한은 자신을 두고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 앞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이 세례를 사람들에게 베풀 때,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소개했던 것입니다.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이어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리고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다시 말해 신랑의 들러리에 비유했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금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신랑의 들러리’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 ‘신랑과 신부’ 로 비유하셨습니다.

(사54:5-6)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사62:4-5)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뿔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호2:16-2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예수께서는 천국의 비유 말씀을 통해, 자신을 ‘신랑’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신부’로 비유하셨습니다.

(마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 ‘남편’으로 비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정결한 처녀’, ‘신부’로 비유했습니다.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비유하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엡5:22-33)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은 근본적으로 금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금욕주의적인 습관을 따라 자발적으로 금식했습니다.(눅7:33) 바리새인들 또한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신부’된 성도들은 금식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결한 처녀’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다하며,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신랑을 기쁨으로 맞이 하기 위해 등과 기름을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마25:1-13) 

예수께서 금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두 번째 말씀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 말씀이 비유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눅5: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생베는 한 번도 세탁이 된 적이 없는 천을 말합니다. 이것을 물에다 빨아 말리면 줄어듭니다. 따라서 이같은 생베를 낡은 베에다 대고 기울 경우, 생베는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기운 효과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헤어짐을 더할 뿐인 것입니다. ‘생베’(새 옷)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낡은 베’(낡은 옷)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많은 금식과 금욕주의적 의식들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베’를 ‘낡은 베’에 대고 기울 경우, ‘낡은 베’는 더 헤어질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교리들을 비교하면 할수록,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점점 더 고립되고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금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세 번째 말씀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입니다. 

여기서 ‘가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채로 벗겨낸 후,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다 액체를 담아 놓는 데 사용된 용기(容器)를 말합니다. 근동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가죽 부대’가 지금도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가 낡아 튼튼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서 생겨나는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반드시 터져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급격한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 부대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고 ‘낡은 가죽 부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훈을 뜻합니다. 이 말은 금식과 같은 생명력이 약한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생명력이 충만한 예수의 가르침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인도하는 ‘몽학선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새 법,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옛 언약’(옛 법, 율법)에 대한 완성이자 그 최종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새 부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새롭게 탄생하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지금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은,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가 아닌 새로운 조직, 교회 속에 부어 넣어져야 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마16:18)


2. 그러면 ‘생베 조각’, ‘새 옷’, 그리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예수께서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며 ‘새 옷’, ‘새 포도주’, ‘새 부대’에 해당하는 ‘새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삶의 양식으로 주신 ‘새 법’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옛 법으로 일컬어지는 율법으로는 결코 천국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 법인 율법의 근본은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등등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 법을 지키는 정도의 수준을 바리새인의 율법 수준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버리고, 율법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데만 정신이 팔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그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아무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일>, 즉 노동이란 무엇이냐를 정의를 내려야 했습니다. <노동>에 대해 정의를 내리다보니, 노동이란 <짐을 운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짐>은 무엇인가? <짐>이란 마른 무화과 한 송이 무게를 옮기는 것, 상처에 바를만한 소량의 꿀을 바르는 행위, 한 모금 정도의 우유를 마시는 것, 알파의 글자 두 개를 기록하는 행위, 안식일에 여자가 가슴에 부로치를 다는 행위, 안식일에 가발을 쓰는 행위 등등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참된 종교이며, 하나님께 대한 참된 봉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를 내린 수 천 가지의 율법을 기원 3세기에 법전으로 성문화한 것이 바로 미슈나(Mishnah)이며, 이를 후에 유대 학자들이 해설해 놓은 것이 그 유명한 탈무드(Talmud)입니다. 예수 당시 엄격한 정통 유대인은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정의를 내린 수 천 가지가 넘는 율법들을 지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한 바리새인(율법사)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합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6-40)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러므로 십계명,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 십계명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롬13:9-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율법의 본질과 정신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기며,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율법은 ‘옛 법’이며, 사랑은 그 ‘옛 법’을 완성하는 ‘새 법’입니다. 수 천 가지의 율법을 다 지킨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 율법의 근본 정신과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기독교의 목적은 바리새인들이 내린 율법을 충족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삶으로 율법을 완성하는데 있습니다. 율법을 능가하는 사랑,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사랑은, 첫째로 형제에게 분노를 품거나 멸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20)고 했습니다. 진실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정당한 분노일지라도, 분노를 마음에 오래 동안 품거나 그 분노를 잊지 않거나, 화해를 거절하며 분노하거나, 복수하려고 분을 품고 있거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보다 더 죄질이 나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웃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좀 많이 배웠다는 교만에서 나오는 멸시는 추악한 것입니다. 남보다 지위가 좀 높다거나 좀 더 많이 가졌다 해서 이웃을 멸시하는 것은 더러운 죄악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중한 죄는 사람의 명예와 그의 신용을 파괴하거나 탈취하는 것입니다. 악담을 지어내어 이웃의 명예를 더럽히고, 뒷공론(뒷담화)을 일삼아 이웃을 멸시하는 행위는, 살인 못지 않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분노와 멸시로 가로막힌 인간관계를 하나님 사랑으로 회복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화내지 않고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도록 화를 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화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겠는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그 가능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시지만 인류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 고통,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는 아픔,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히는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을 다 받으시면서도,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시거나 조롱하는 강도를 향해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사는 것이 바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복된 삶이 됩니다. 스데반은 과연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돌을 던져,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군중들을 향하여, 전혀 분노하여 저주하거나 그들을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처럼 그들의 죄사함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더 마음 속 깊이 예수를 마음에 품고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의 마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옛 법’은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살인은 예나 지금이나 분명 죄악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법’은, 형제에게 노하거나 욕하거나 미련한 놈이라며 멸시하는 것 역시 지옥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것 역시 살인죄와 같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미움이 자라서 욕이 튀어나오고, 그것이 자라서 멸시하며 분노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더욱 더 자라게 되면, 결국 죽이고 싶은 마음이 살인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움은 살인의 씨앗입니다. 살인은 겉으로 나타난 죄이지만, 미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예수께서는 살인죄로 간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 법’에 따르지 않고 ‘새 법’에 따라는 생활입니다. ‘옛 법’은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고, ‘새 법’은 원수를 위해 축복하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사는 것이, 바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복된 삶이 됩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5:27-28을 보겠습니다.

(마5:27-28)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옛 법에 간음은 분명 죄악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 법’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부터 간음죄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여성의 인격에 대한 모욕이며, 자신의 인격을 더럽히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지켜 주며 존중할 때, 인생이 아름다워지고 매력있는 인생이 될 뿐만 아니라, 건강한 가정,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성과 그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쾌락의 도구로 삼는 것은, 인권 침해와 동일한 범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범죄를 저지른 사지백체를 찍어버리라고 할 만큼, 중한 죄악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29-32)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던지신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던져 여성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과 더불어 이웃의 삶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지키며 사는 것이 바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복된 삶입니다. 더러운 죄로 얼룩진 나를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항상 마음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깨끗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자신의 성결뿐만 아니라 이웃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지켜줄 수 있는 성령이 여러분에게 항상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5:33-37을 보겠습니다.

(마5:33-37)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이 말씀은 누구 앞에서나 맹세할 필요가 전혀 없는 진실한 인격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생활에, 정직과 진실로 어디에서나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은행에서조차 저 사람정도라면, 얼마든지 믿고 담보없이 대출해줄 수 있다고 할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같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 살아가게 될 때,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혼인잔치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할 ‘새 포도주’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그 누구나, 무엇도 끄거나 끊을 수 없는 인류를 향한 끝없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옛 법’인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새 법’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날마다 혼인잔치의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채워지도록 항상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고 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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