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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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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마 16:13-20)

오늘 본문은 여러분들이 익히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4부터 강론하면서 오늘 본문이 결론에 해당한다고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구원자로 나셨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침을 받으시고 이사야 예언을 따라 흑암의 땅인 갈릴리에 오셔서 천국의 왕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모세의 법을 완성하신 예수의 법을 천국의 법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이 천국의 왕은 어떤 권능이 있는가에 대하여 8-9장에 나타내시고 10장에 이 나라를 봉사하는 일꾼들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11-13장에 구약에 약속하신 ‘오실 그이’로 자기를 증거하셨으나 고향 사람들이 배척을 했습니다. 

이제 14-16장은 천국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정책으로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함께 하실 것인가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가 끝나면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자기 영광을 새롭게 나타내 보이시고 그의 일을 본격적으로 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에 대하여 예수가 삼위일체 중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배워왔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만 나의 주로 섬긴다는 의미로 이 고백을 이해해서도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의 고백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잘못 이해하고 해석이 되어 왔기 때문에 그러하고 마태복음이 증거하는 핵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신 것을 어떻게 나타냈는가는 5병2어와 7병2어의 두 가지 중심 사건을 통하여 알리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한 목자로 백성을 긍휼히 여기셔서 자기를 따르는 백성을 먹이시는 분으로 알리셨고,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분으로 알리셨습니다.  

이러한 표적을 행하신 후에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예수님을 보았는데, 베드로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누구를 알게 되는 것은 우리 삶 가운데에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은 주로 그 사람이 하는 일을 통해서 압니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위하여 싸우거나 돕는다면 그런 사람을 가리켜 노동운동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노래를 잘하면 가수라고 부르겠지요. 이처럼 우리는 하는 일을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임을 알고 인식합니다. 

예수님이 5병2어를 가지고 5천 명을 먹이신 일은 그저 단순히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써 신적인 능력을 나타낸 것으로 보면 안됩니다. 역시 7병2어로 4천 면을 먹이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이 굶주리고 먹을 것이 없어 주님께 작은 것을 내어 놓으면 주님은 더 크고 많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본 말씀에 이렇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9-10절입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경퀴즈 시간에 답을 하는 것처럼 ‘12광주리요, 7광주리요’라고 하라는 것인가요? 왜 예수님은 두 개의 표적을 통해 몇 광주리가 남았는지에 대하여 반복하시며 강조를 하시는 것일까요? 그냥 예수님이니까 먹고도 남고 12광주리나 거둘 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한 것일까요? 그 때 광주리가 얼마나 큰 것인줄 알지 못하지만 12광주리 남겼다거나 7광주리를 남겼다 해서 아주 엄청난 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신 두 표적으로는 불만족스러웠는지 다시 예수님에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청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를 시험하려고 이런 표적을 청하였다고 마태는 말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어쩌면 그들로서는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당시에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지나는 40년 동안 약 12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과연 5병2어와 7병2어의 표적을 행하신 일은 한 끼 정도 식사를 해결한 것에 불과하고 기껏 합쳐 보아야 9천 명의 사람들이 먹은 것입니다. 12광주리, 7광주리가 남았다 하더라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먹은 양과 어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굳이 몇 바구니가 남았느냐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하여 아는 방법은 바로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만나 사건에 대하여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나는 하루 양식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만나를 매일 거두러 나갔는데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남지도 모자르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이 얻는 급여와 같습니다. 하루살이에 필요한 양식이니까요. 이러한 출애굽기의 만나를 주심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면 예수님이 왜 몇 광주리가 남게 거두었는가를 물으시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런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해가 서쪽에 넘어갈 때가 되면 가정의 아버님들이 연탄 1장을 새끼줄에 매어달고 귀가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날 밤 하루 온 가족이 따뜻하게 지낼만한 연료였습니다. 또 누런 봉투에 쌀을 팔아 가슴에 안고 오시는 아버님들도 보았는데 그 쌀은 거의 하루 먹을 식량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바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과 같습니다. 하루 양식이나 하루 땔감으로 부족하거나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 예수님이 왜 몇 광주리를 거두었느냐고 거듭 되물은 것이 왜 그리하셨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넉넉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루 살이 양식을 주신 분이 아니라 보다 넉넉하고 넘치는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하루 보다 많은 이틀이나 열흘의 식량을 주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먹고 마시는 양식은 한 번의 인생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먹고 죽고 썩어 없어집니다. 하루나 한 번의 인생의 먹음이나 서로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넉넉한 생명의 양식, 몇 광주리나 먹고도 남은 양식을 주셨다는 의미는 먹고도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메시지와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에서 증거합니다. 5병2어를 행하시니까 무리들이 임금을 삼으려 했습니다. 이를 아시고 예수님은 혼자 떠나가셨습니다. 다음 날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자 예수님은 너희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썩는 양식을 구하려고 나를 찾아왔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먹고 마시고 결국 죽고마는 그런 양식을 주시는 임금으로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모세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먹고도 죽었거니와 내가 주는 생명의 떡은 영생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5병2어의 표적을 행하시고 나서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을 나타내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5병2어와 7병2어로 무리들을 먹이신 표적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아는 것은 마치 모세처럼 만나를 주시는 분 정도로 인식을 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떡을 가져온 것을 잊고 예수님이 떡이 없어서 하신 말씀인줄 알았을 때 예수님이 내 말이 왜 떡에 관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보지 않고 주는 그리스도라고 보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복이 있는 것입니까?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욱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천한 피조물로서 어떻게 절대적인 신을 알 수가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로 알 수가 없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만일 이 말이 맞다면 네게 알게 하신 이는 삼위일체 성부 하나님이시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알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혈육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 알리셨던 것, 즉 모세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알았던 것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새로운 앎이 왔습니다. 새로운 관계로써 아는 것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계시하신 앎이 온 것입니다.  

혈육으로 아는 관계는 구약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신약에서 하나님을 아는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어느 관계가 더 확실히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더 밝히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베드로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의 구원은 구약 백성들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10-12절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이제 1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가 주를 그리스도 알고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을 통해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이었는데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라는 희랍어의 뜻이 바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반석’과 베드로의 이름을 일치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남성명사인데 반석은 여성명사입니다. 왜 성이 일치가 안될까요? 이는 베드로와 반석이 서로 같다고 선입견을 가졌기 때문에 생긴 오류입니다. 

‘반석’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말과 일치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우리 나라는 민주공화국입니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입니다. 이런 말은 모두 어떤 반석 위에 나라가 세워졌는가를 나타냅니다. 우리 나라는 민주주의의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조선은 유교의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런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반석은 제가 정책이라고 표현한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책 위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어떤 나라입니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죽음의 문이 이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직함이 가지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나타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그리스도의 정책으로 세운 나라이니 당연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구약에 세웠던 여호와의 나라는 모두 죽음의 문을 이기지 못하는 나라였습니다. 이방의 권세자들과 이방 나라들을 이기는 나라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죽음을 이기는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책을 반석으로 세워져 죽음의 문을 이기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 참여하려면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알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고백하며 들어오는 나라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값없이 주신 구원을 알고 감사함으로 들어오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죄를 다 사해주신 것을 믿기만 하면 이 나라에 들어올 수가 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나라는 없습니다. 그 나라의 정책을 알고 그 정책으로 이루는 나라에 참여하여 함께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그 나라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몸을 주시는 이 성찬에 참여하여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우리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나라에 민주시민으로 살려면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듯이 교회는 죽음을 이기는 의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가 음부듸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나라가 됩니다.  

교회는 선진국가를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대국을 만들려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부강한 나라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말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나무라신 것입니다. 이 나라는 죽음을 이기는 영생의 떡을 먹는 나라입니다. 민주주의 나라는 백성이 주인되는 나라입니다. 어떤 독재자가 백성을 자기 마음대로 통치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나라는 독재가 이기지 못하는 나라라고 할 것입니다. 죽음은 죄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와 죽음을 이기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함께 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알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친목하자고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연애하려고 오는 곳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죽음의 문을 이기는 나라임을 알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6.25전쟁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나라와 관련이 없는 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알지도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에 와서 고귀한 피를 흘리고 죽어갔습니다. 그들이 바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로부터 민주주의가 승리해야 한다는 것 그것 때문에 먼 타국 땅에 와서 아까운 젊음을 바친 것입니다. 세상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공산주의를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싸운 것을 우리가 압니다. 하물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우리가 어떻게 지켜내야 하겠습니까?

19절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왜 천국 열쇠인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기 때문입니다. 즉 땅에서 잠그면 하늘에서도 자물쇠처럼 잠겨요,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도 열려요. 땅의 생명을 하늘의 생명으로 열어주는 자가 베드로입니다. 

천주교가 베드로를 다른 사도들보다 높이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이 천국열쇠가 그에게 있다는 것이 사도행전을 통해서 잘 증거가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도 베드로가 설교하여 이 성령강림이 어떤 은혜의 일인지 증거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킴으로 첫 사역을 베드로가 열었습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도 베드로로 말미암아 처음 열립니다. 이방인 선교도 고넬료의 가정을 방문한 베드로로 말미암아 비로소 열렸습니다.  

구약의 나라는 땅의 열쇠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땅에서 매면 땅에서 매였습니다. 땅에서 풀면 땅에서 풀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땅의 수고가 하늘의 생명과 직결되게 한 것입니다. 내가 먹고 마시는 이 땅의 일들이 이제 하늘 문을 여는 일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로 말미암아 하늘 문이 열리고 또 그와 같은 사도들의 증거로 말미암아 이 일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떡상에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십니다. 비록 땅에 있는 것을 먹고 마시지만 이 떡과 잔이 하늘의 생명에 참여케 하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는 천국의 영광과 권세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하고, 여러분이 먹는 것으로 여러분이 하늘을 여는 제사장 나라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받는 복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생명을 먹고 마시는 신령한 복을 교회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죄와 죽음을 이김으로 얻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로 모여서 세상의 주식투자와 같은 얘기만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곧 하늘을 닫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녀에게 교육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녀가 세상에서 공부로 일등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쉽게 주님의 떡상을 버리게 만듭니다. 부모가 하늘을 자녀에게 닫는 일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베드로의 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먹고 마심이 무엇인지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죽음을 이기는 권세 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제사장의 역할을 다하여 하늘 문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여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 떡상에 참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떡을 원하시고 이 자리에 앉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자가 더 낫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이 나라에 참여했다면 우리가 힘과 목숨을 다하여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와 죽음을 이기는 새 생명을 이 땅에서 나타내고 증거함으로 뭇사람에게 하늘 문을 여시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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