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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에서 소망으로 (옵 1: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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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소망으로 (옵 1:15-21)

15/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16/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17/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18/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며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것이라 그들이 그들 위에 붙어서 그들을 불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19/그들이 네겝과 에서의 산과 평지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20/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많은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이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에서 사로 잡혔던 자들 곧 스바랏에 있는 자들은 네겝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21/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지난 1998년도에 세계적인 영화상인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11개 부분에서 상을 휩쓴 영화가 있었습니다. 누구나가 한번쯤은 들어보았던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 1912년에 영국은 거대한 배 한척을 만들었습니다. 선체 길이만도 259미터나 되는 46,300톤의 거대한 초호화 여객선이었습니다. 그 배는 영국이 해양제국이라는 명예를 걸고 자기들의 영광을 세계 만방에 자랑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그 거대한 여객선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신족 타이탄의 이름을 따서 '타이타닉'이라고 지어졌습니다. 영국은 해양제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가장 크고 가장 튼튼하고 가장 호화스러운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배를 가리켜서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 자랑했습니다. 이 배가 처음 출항할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영국을 출발한 타이타닉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을 목표로 거만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첫 항해 때 그 배에 탔던 사람만 2,340명이나 되었습니다. 타이타닉은 모든 것에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크기도 최고요, 호화스러움도 세계 최고였습니다. 첫 항해에서 한 가지 더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건 속도입니다. 그래서 타이타닉은 전 속력으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미국 뉴욕에 도착했을 때 '최고로 크고 튼튼한 배, 최고로 호화스러울 뿐만 아니라 최고로 빠른 배'라는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장은 최고로 빠른 속도로 가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첫 항해를 나섰던 그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배는 4월 14일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승선자 2,340명 중에서 무려 1,500여명이 이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수장되고 간신히 노약자들과 함께 711명만이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해양 사고 중에서 최고로 큰 사고였습니다. 

후에 역사는 타이타닉을 바벨탑 사건에 견줄 수 있는 인간의 교만이 만들어낸 비극 중에 비극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다'고 자랑할 만큼 크고 튼튼한 타이타닉이 첫 항해에서 1,500여명과 함께 바다에 수장된 것은 인간의 교만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엄청난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현대의 인간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자랑하고, 자기들의 과학적 지식과 발명품들을 자랑하며 얼마나 큰 교만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현대의 지식 사회만이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교만이라는 죄악은 우리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가장 무서운 인류의 적입니다. 중세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적한 대로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죄의 뿌리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교만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죄악에 허우적거리며 살게 만듭니다. '교만'을 우리는 이렇게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위대함과 훌륭함에 도취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자신의 작은 위대함과 별 볼일 없는 훌륭함에 도취되어서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뽐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남보다 조금만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고 오히려 비난하면 죽자 살자고 싸우려고 덤벼듭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남보다 조금 더 나은 것처럼 생각되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 때문에 교만이라고 하는 무서운 대적의 표적이 되고 맙니다. 

성경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오바댜서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오바댜서는 무척 짧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별 내용이 있겠는가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들어가서 천천히 살펴보게 되면 우리가 짚고 교훈을 삼아야 할 내용이 의외로 아주 많습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앉아계시는 성도님들께서도 오바댜라는 책을 처음 보시거나 있는 줄을 알지만 이 본문으로 말씀을 들어본 기회가 많지 않은 성도님들이 계실 것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가장 짧은 1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심판의 내용이 많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기가 참 어려운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이가 짧아도 성경이고 성경은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이 중요하리라 믿습니다. 

오바댜서의 역사적인 배경은 이렇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주전13세기 에돔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할 당시 이미 한 왕을 중심으로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여러차례 에 결쳐서 이스라엘과 대립 관계에 있었으며 주전 605년에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587년에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바벨론에 합세를 하여서 유대민족을 유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오바댜서는 유대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 오바댜 선지자를 통해서 에돔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시간에 모두를 언급할 수 없지만 대표적으로 에돔의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지형적인 교만이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3-4절을 보면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그 에돔 족속은 사해 남동쪽에 바위가 많은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과 인공적으로 바위를 깨뜨려서 만든 집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또 수도인 '페트라'는 약 3km에 이르는 좁은 암반을 계속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군사가 공격해 온다 하더라도 적은 군사를 가지고도 그들을 막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자연적인 여건은 에돔을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감히 어떤 세력도 에돔을 침공하거나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들 자신도 3절 후반에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말합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평안과 번영이 그들 자신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어떻습니까? 

4절에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돔의 교만은 그들의 믿음의 근거가 하나님이 아닌 엉뚱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 6절-7절을 계속해서 보면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탈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빼앗겼는고 /너와 약조한 모든 자들이 다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여 이기며 네 먹을 것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에 함정을 파니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에돔이 믿음의 근거를 두었던 그 동맹국들에 의해 오히려 배신을 당하게 되고 결국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멸망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에돔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돔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침략을 당해 황폐해졌으며, 로마제국의 침략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에돔 땅은 지구상에서 가장 심한 폐허가 되었습니다. 에돔이 자신을 지켜주리라고 생각했던 지형적인 조건, 물질적인 풍요, 동맹국과의 연합, 풍부한 지식과 지혜를 갖춘 인재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단번에 부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여호와를 의지한다고 말은 하지만 궁극적으로 세상적인 기준들이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을 때 그것이 교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십니까?  오직 우리 하나님께 두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우리의 위치가, 우리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축복과 은혜의 근원은 오직 우리 하나님께 있으므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에돔의 죄는 에돔이 유다에게 행한 행위와 태도에 있었습니다. 본문 11 절부터 14절까지는 몇 가지 반복되는 비슷한 구절들을 사용함으로써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포학한 행동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다. 그 비슷한 구절들이란 "형제의 날", "재앙의 날", "유다자손이 패망하던 날", "고난의 날",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 이 날은 모두 같은 날을 의미합니다. 즉 이 날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늑탈할 때에 에돔도 거기에 동참했습니다. 

본문11절입니다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그리고 형제가 재앙을 당하던 날에 방관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또한 예루살렘의 약탈에 참여하였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고난의 날에 사거리에 서서 도망하는 자를 막고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을 적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말씀합니다. 

바로 에돔은 이런 모든 포학한 행동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행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에돔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과 정의를 역행하는 잔혹한 폭력의 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뿌리가 같은 형제들이었지만 에돔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방관자적인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에돔은 사탄의 길에 서 있었습니다. 에돔뿐만 아닙니다. 성경 구약 에스겔 26장은 두로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로의 백성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여 황폐해지면 두로에 번영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두로는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서 5년 동안, 그 뒤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서 13년 동안 포위를 당하다 주전 332년에 헬라의 알렉산더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패와 좌절을 내 이익의 기회로 삼으려 할 때 우리도 두로와 같은 심판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두로처럼 다른 사람의 실패와 좌절을 내 이익의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남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자가 아닌 함께 우는 자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사회의 제도들과 관습과 관념으로 피해를 당하는 여인들도 있고, 어린아이들, 고아들, 환우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 그리고 도움의 손길과 위로의 말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가까운 이웃형제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필요를 모른체 하거나 이들의 아픔을 방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신약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책망하신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난 이웃을 외면하고 지나갔지만 가난하고 천시 받던 사마리아인이 그 이웃을 도왔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1-43절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이러한 죄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께로 회개하며 돌아가는 통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 22장 5절에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돔은 그의 형제국인 유다가 노략을 당할 때 그들의 고통을 모른척 했을 뿐만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즐거워했고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를 이용하는 죄에 있었던 것입니다. 에돔의 행위는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완전히 대립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원수도 곤궁에 빠지면 도와야 한다는 삶의 도리가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에돔은 오히려 형제 유다의 고통을 보고 좋아하며 그들의 고통에 고통을 가중시킨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중 가장 큰 불행으로 남아있을 히틀러의 만행과 관련하여 늘 궁금하게 여겨지던 것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는 것과,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당시의 독일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말로 몰랐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의 만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실패한 화가이고 실패한 건축가였던 히틀러가 유대인들에게 분노와 좌절로 인한 질투심을 쏟아 부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히틀러가 가지고 있었던 전 인류에 대한 증오심을 유대인들을 통해 쏟아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서 비롯된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분노와 적대감을 히틀러가 교묘하게 유대인들에게 돌렸다고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역사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한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라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가 벌이고 있는 만행을 정말로 몰랐던 것일까요? 당시 나치는 국민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었고, 대량 학살과 관련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방책을 강구했기 때문에 당시 독일인들은 수용소가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고 있는 것이 없었을 거라고 우리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독일 내 수용소 중의 하나였던 부헨발트의 생존자로 나중에 뮌헨 대학 정치학과 교수가 된 오이겐코곤에 따르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개략적으로 알고 있는 판사, 경찰, 변호사, 성직자, 사회복지사의 수가 수천을 헤아렸습니다. 독일의 많은 대기업이 포로를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대학의 교수들이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힘러가 만든 의학연구소와 협동 연구를 했고, 국가소속 의사와 개인 병원 의사들이 전문적인 살인자들과 협력을 했습니다. 많은 군인들도 곳곳에서 얼마나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지적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있었는데,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었고,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직접 죄를 지어서 만이 아니라 나는 모른다는 고의적인 태만함으로 더 큰 죄에 동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입니다. 나만 편하고 안전하면 그만이라는 고의적인 태만과 무관심과 방관이 더 큰 죄라는 것을 깊이 명심하지 않으면 어느 날 문득 그 죄의 결과가 우리를 덮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돔은 그의 형제국인 유다가 노략을 당할 때 그들의 고통을 모른척 했을 뿐만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즐거워했고 방관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에돔의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본문 15절에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에돔의 악한 행위가 자기들의 머리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남아 있지만 에돔이라는 나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그 손길을 우리에게 떼신다고 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희생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하나님은 믿기 어려운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의 어리석은 잘못의 결과들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을 막으시기도 하시고 보호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하루 하루 삶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뜻을 드러내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며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17절이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21절을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17/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18/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며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들 위에 붙어서 그들을 불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여호    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19/그들이 네겝과 에서의 산과 평지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    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20/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많은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이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          이며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혔던 자들 곧 스바랏에 있는 자들은 네겝의 성읍들을 얻을 것 이니    라 
21/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          라 
  
어떤 내용입니까?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날 야곱 족속(남유다)은 불이 될 것이고, 요셉 족속(북이스라엘)은 불꽃이 될 것이지만, 에서 족속(에돔)은 지푸라기가 되어 불살라 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9절 이하에는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자기 지경을 넓혀가고 또 땅들을 많이 얻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도 하나님의 이러한 무한하신 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21절 끝절에 보면 “나라가 여호와께 속했다” 말씀합니다. 나라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라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친히 역사해나가신다는 것이 바로 이 오바댜서의 결론입니다. 

주권자가 누구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교회를 다스려나가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가정을 책임져주시는 분이 누구시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이 오바댜서의 대단원의 결론입니다. 오바댜서를 통해 하나님은 침묵하지 아니하시고 잠잠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참 마음이 괴롭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이런 말을 하면서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우리를 찾아와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우리의 실패를 성공으로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생만큼 우울하고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도 없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살해되어 고아처럼 자랐습니다. 청년기에는 혁명당에 가담한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사형집행 전에 천재적인 문학성 때문에 황제 특사로 사면이 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그 후 결혼하여 자식이 하나 있었지만 추위와 배고픔으로 견디지 못하고 결국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는 하늘의 형벌과도 같은 질병인 간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일평생을 인생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과 같이 읽을수록 인생의 깊이와 고뇌, 그리고 용기를 얻게 되는 작품들을 쓸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인생의 고통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를 좌초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영혼의 돛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이 주신 희망으로 고통스런 인생을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라도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오늘 오바댜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만국을 벌할 날이 어떤 자들에게는 멸망과 심판의 날이지만, 어떤 자들에게는 구원과 회복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야곱 족속이 멸망해 모두가 죽고 없어졌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남긴 자들이 있고, 재앙을 피할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그들의 죄 때문에 바벨론의 포로라는 엄청난 고통과 핍박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을 떠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이스라엘이 오랜 연단의 과정을 겪은 후에 절망 가운데서 소망으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바댜서를 보면서 궁극적으로 회복은 하나님의 정한 때, 곧 주의 날에 이루어 질 것이라는 희망찬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의 줄을 든든히 붙잡고 오늘 이 하루도, 또 이 한 주간도 승리하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성도님들의 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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