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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 (고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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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 (고전 4:1-5)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오래 전에 ‘Come September’(9월이 오면)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입추 처서도 벌써 지나고, 이제 9월이 오고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가을은 진상이 드러나는 계절입니다. 곧 가을은 유실수와 무실수, 낙엽수와 상록수의 진상이 속일 수 없이 밝히 드러나는 계절입니다. 지난주일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가 자신을 하나님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고, 누구든지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하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며,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고, 스스로 경건하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는 사람 역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자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진실무망한 사람들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전 1:10절로부터 시작된 ‘분쟁 문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제 4장에서 결론적인 권면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1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포함한 사역자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합니다. 여기 ‘일군’이란 단어는 의미가 깊은 단어입니다. 

일군 즉 휘페레타스(υπηρετα?)란 υπο(아래)+ερετη?(배 젖는 자)의 합성어로서, 3단으로 된 노예선 맨 하단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배의 선장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배를 젓는 종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볼로나, 게바나, 바울 자신을 당파나 분파의 지도자로 높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사역자들에 대하여, 또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즉 οικονμου?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흔히 ‘청지기’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롬 16:1절에 ‘일군’으로 번역된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라고 했는데, 여기 ‘일꾼’은 ‘집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때의 ‘집사’ ‘오이코노모스’란, 먼지를 뒤집어쓰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일하는 머슴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60세가 넘으면 집사로 임명하지 않는 것도 보았습니다. 연세가 많으면 주님과 교회를 머슴처럼 받들면서 섬기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어떤 교회, 어떤 성도들은 기를 쓰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려고 합니다.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것이 주님의 교회를 위해 머슴처럼 일하기 위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만, 그러한 중심이 아니니 탈입니다. 집사나 권사나 장로와 같은 교회의 청지기직 봉사 직을, 마치 무슨 명예직이나 권리 직으로 착각하고, 기를 쓰고 그 직분을 얻으려 하니, 이 또한 타락한 교회상의 일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 어떤 책임을 맡았던지 자기의 직분, 자신의 위치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기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출석하는 교회까지도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여기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한 것은, 성직자의 신적 존엄성을 강조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특히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가리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라고 한 데서, 그 직분의 신성함과 고귀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비밀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골 2:2-3절에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2. 천국 운동, 생명 운동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마 13:11절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고전 15:51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비밀이란,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부활하신 것과, 그를 믿으면 죄 사함을 얻고 구원받는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비밀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 비밀은 눈으로 보아도 모르고, 귀로 들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은 성령께서 그 귀를 열어 주시고, 눈을 뜨게 해주셔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또한 ‘하나님의 비밀’ 이란, 천국 운동, 곧 생명 운동이 하나님의 비밀인데, 하나님께서 영혼을 살리시는 생명 운동은, 사람이 자기 지혜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 영혼이 살아나는 것과, 생명의 역사와, 성도의 영혼이 자라나는 일들은, 불신 세계에서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인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성도들이 부활하는 것은 불멸과 성화의 비밀인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맡은 자요, 전파하는 자요, 가르치는 자입니다. 전도자는 종은 종이로되, 그리스도의 종이요, 청지기는 청지기로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존귀한 청지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종들을 대할 때, 경홀히 여기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성도가 주님의 종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가 주님을 대하는 태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가 신본주의,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갈 때, 그 성도는 하나님을 높인 것만큼, 주님을 사랑한 것만큼, 그분께서 세우시고, 붙드시고, 사용하시는 주님의 종을, 귀히 여기기도 하고, 또는 반대로 경히 여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현신애 권사님은 수십 명의 신학생을 목사로 길러낸 분인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제가 교육 전도사로 일하게 했던 임태교 전도사입니다. 그 임태교 라는 신학생이 서울의 현신에 제단에 갔더니, 전도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사람들 가운데 상좌에 앉게 하고, 밥그릇도 제일 먼저 놓아주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손자 벌밖에 되지 아니한 청년, 그것도 자기의 도움을 받고 있는 양아들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간다는 하나의 증거라고 보여서, 그분의 신앙과 인품을 그 한 가지만으로도 조금은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 목사님이 자기를 가르쳐 주신 은사 목사님을 찾아가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우리 교인들이 기도할 때마다 젊은 종이 지금 단위에 섰사오니, 혹은 젊은 종을 붙들어주시고....하는 식으로 젊은 종, 젊은 종하면서, 마치 자기들의 종처럼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참 섭섭합니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백발의 은사 목사님께서 “그래도 자네는 젊은 종이라 한다니 다행일세. 나한테는 기도할 때마다 노종이 지금 단위에 섰사오니, 노종을 붙들어주시고, 하는 식으로 말끝마다 노종, 노종 하니 여간 서글프지 않다네.”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물론 젊은 종이니, 노종이니 하는 말들은, 표현의 잘못일 것입니다. 주님의 젊은 종을, 또는 주님의 노종을...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주님이란 말은 빼 버리고, 젊은 종, 노종 하니까 섭섭해서 한 얘기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릴 리가 없지만, 만일에 그리스도의 종들이 성직의 존엄성을 모르고, 사람들의 종으로 자신을 비하해도 잘못이고, 또 신자들이 사례비를 드리고 하니까, 마치 주님의 종에 대하여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로 생각하는 일이 있어도 엄청난 잘못입니다. 

교인들의 헌금 원리는 너무도 자명한 것 아닙니까? 단 돈 천원의 헌금이라도 하나님께 드린 것이지, 목회자를 위해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비록 목회자들에게 사례비를 드려도, 그 원리는 십일조건, 감사 헌금이건, 주일 헌금이건 하나님께 바친 것이고, 주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리를 잘 알지 못한 교회나 교인들은, 목회자들에 대하여 무슨 큰 은전이나 베푸는듯 하기도 하고, 마음대로 목회자들을 움직여 보려고도 합니다. 목회자의 권위 문제는 일단은 목회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도들도 요즈음의 목회자 경시 풍조를 본받지 않도록 크게 삼가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현 권사님 얘기를 예로 들었으나,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실례를 찾아보면, 다윗이 사울을 선대했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추격하다가 잠들어 있는 사울 왕을 발견하고,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다만 사울의 옷자락을 조금 베고 나서도,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종인데 하면서 마음이 찔려 후회를 했습니다. 후일에 사울 왕이 불레셋과 전쟁에서 패배하고, 자결하려 칼 위에 엎드러졌다가 죽지 않자, 아말렉 청년에게 자신의 목을 베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그 아말렉 소년이 사울 왕의 목을 베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갔는데, 원수의 목을 베어 온 그 청년에게 포상을 하기는커녕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 하였느냐?”고 책망을 한 후, 오히려 그 청년을 처형해버립니다.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수년 동안 괴롭히고, 그 때문에 수많은 고통을 겪었으나, 끝까지 사울을 선대한 것은, 다윗의 신앙이 신본주의, 하나님 제일주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윗인지라 하나님께서 그를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하시기도 하고,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높여 주시기도 하고, 그의 후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도 하는 축복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이 같은 다윗의 본을 받아 목회자를 선대한다면, 결국 여러분 자신과 후손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맡은 자들이란, 문맥상으로 보아 1절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결코 방관하시지 않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충성을 기대하고,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계2: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충성이란 오직 한 곳에 자기의 전폭을 쏟아 부어서, 그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충신 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과 벗이 되거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면, 충성스런 성도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충성스런 종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하여, 마음과 뜻과 힘과 생명 전체를 다 바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행 20:24절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충성이란 말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말씀에 충성하고, 불변의 교리를 부패시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인심은 조석변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들의 신앙이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결혼만 해도 변하는 믿음, 직장만 생겨도 변하는 믿음, 조그만 어려움과 역경만 닥쳐도 변하는 믿음은 충성스런 믿음이 아닙니다. 

‘충성’(πιστο?)이라는 말은 ‘믿을 수 있는 것’ ‘신실’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사역자들은 먼저 주님께 믿음직스런 일군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고,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삼상 3:19-20절에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역자들은 충성하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음직스러워야 하며, 모든 성도들은 충성하되 무슨 일을 하던지, 신실하고 진실 되게 충성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3절에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신분이 그리스도의 일군이고, 그의 사역에는 충성이 요구되는데, 그 충성이란 사람 상대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 대한 충성이라야 합니다. 사역자들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증거 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역자들은 그의 사역을 수행할 때, 반드시 인간의 판단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의 판단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정확할 때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충성되고, 신실하게 사명을 수행하고서도, 부당한 오해와 판단을 받게 되는 일도 많은데, 그러할 때 사람의 판단을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오직 주님의 판단만 믿으며,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Politian은 “아첨하는 자의 칭찬하는 말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며, 원수들의 까닭 없는 훼방이, 나를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주님께 충성할 때, 사람들의 판단은 칭찬하는 것이던지, 욕하는 것이던지, 매우 작은 일로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바울이 이렇게 다른 사람의 판단을 일체 무시해 버리기만 했다면, 고집불통, 오만 불손의 인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인간의 자기 평가는 공정하지 못하고, 항상 자기만족이나 독선과 자만, 자기도취에 빠지는 경향이 많습니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날카롭고 예리하기 그지없지만,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늘 합리화를 잘 시키고, 또 더할 수 없이 관대합니다. 

다음은 이해인 수녀의 ‘그와 내가 다른 점은’ 이라는 글입니다. <만일 그가 그의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그는 게으르다 하고, 내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나는 너무 바쁘고 많은 일에 눌려 있기 때문이라 하고, 만일 그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면 수다쟁이라 하고, 내가 다른 이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건설적인 비판을 한다 하고, 만일 그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해서라고 하고, 만일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다고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순간에 복잡한 다른 많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고, 만일 그가 친절하게 하면 나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 친절하다 하고, 내가 친절하면 그것은 내 유쾌하고 좋은 성격의 한 부분이라 하고, 그와 내가 이렇게도 다르다니, 얼마나 딱한가? 인도의 속담인데, 대체 어느 누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잘도 꿰뚫었을까 하면서, 자신을 반성하며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그의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그는 너무 바쁘고 많은 일에 눌려 있기 때문이라 하고, 내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나는 게으르다.”고 하면서 살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의 글입니다. 우리 모두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비록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충성했다고는 생각되나, 이 같은 자기의 판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만 자기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5절에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판단하실 일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므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인간이 우리의 최후의 심판자가 아님은,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가 됩니다. 부당하게 오해를 받았거나, 억울한 비방들은, 주님께서 모두 다 밝혀 주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판단하실 그 판단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판단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까지 나타나게 하는, 정확한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이란 주님 앞에서는 선악 간에 나타나지 않은 일들, 모든 비밀이 다 폭로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라는 말은,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기 전의 일, 마음의 죄까지를 말합니다. 인간은 행위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그 때문에 주님의 심판대에서는 인간의 고결하게 보이는 행위도, 가장 이기적인 추악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음이 많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판단 앞에서 칭찬들을 수 있는 성도야말로, 가장 복된 성도인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1)성도들은 오늘날의 목회자 경시 풍조를 본받지 말고, 주님의 종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알아 존귀하게 여기 줄 아시기를 바랍니다. 2)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들은 말씀에 충성하고, 모든 직분 자들은 맡은바 그 직분에 충성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인의 삶에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일에, 기도 생활에, 봉헌 생활에, 전도 생활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능력, 성별, 은사, 학식은 제각기 다를지라도, 모두 다 충성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위대한 사람은 못되어도, 충성스런 사람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판단하는 일을 함부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남들의 판단, 자신의 판단이 다 부정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을 재는 잣대로 자기를 재고, 자기를 재는 잣대로 타인을 재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서, 최후에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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