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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고백이 중요합니다 (마 16: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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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주님과 제자들에게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한 지방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사실, 주님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주님이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누구라고 말하는지 알지 못해서, 그것을 알고 싶어서 물으셨던 것이 아니라, 이 질문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물으셨던, 유도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한참이나 북쪽으로 이동해서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곳에서 제자들에게 왜 이와 같이 물으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굳이 먼 곳까지 와서 주님은 왜 뜬금없는 질문을 하고 계실까요? 주님께서 이와 같이 하신 것은 주님의 특별한 교육적 배려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만 특별히 교훈하실 때에 항상 인적이 드문 시간과 장소를 택하셔서 방해를 받지 않고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택하신 곳이 빌립보 가이사랴였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그 사역에서 잠시 벗어나셔서, 다른 것들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오직 제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시고자 하셨던 것은 이제 주님의 공생애 사역이 마쳐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 때는 주님의 사역이 끝나가고 있는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성경학자는 이 때가 시간적으로는 십자가 수난을 두 달 정도 앞두고 있었을 때라고 말합니다.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제자들을 떠나게 될텐데, 그때를 염두에 두시고 주님은 제자들과 긴요한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그 중요한 만남 가운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합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어떤 이들이 세례 요한이라고 했던 것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주님의 사역에서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더러는 엘리야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였고, 유대인들이 손꼽는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능력들을 볼 때 엘리야처럼 여기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또, 예레미야 선지자나 모세와 같이 위대한 다른 여러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나름대로 주님이 이러한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주님을 평가하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 대답에 대해서 주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른 사람들은 나를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나를 따랐던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주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자신과 함께 동행하면서 주님을 가장 잘 알 수 있었던 제자들에게 그 이상의 고백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제자들의 역량 밖에 있는 어려운 답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고, 제자들의 입장에서도 대답하기가 난해한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 시몬 베드로가 먼저 대답을 합니다. 베드로가 평소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적극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인 탓에 나섰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주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확신에서 그가 먼저 대답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고,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고,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이해하면서 고백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고, 메시야를 뜻합니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아서 세워지는 세 직분은 왕과, 제사장, 선지자였습니다. 주님은 이 세 가지 직무를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왕으로 오셨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시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은 당시 유대인들에게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차원 높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이적들을 보면서, 능력 있는 선지자 정도로는 평가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고백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고백을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앞에 ‘살아계신’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한 생명력으로 활동하실 것이라는 고백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참으로 위대한 고백이었고, 일반적인 사람의 이성으로는 고백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주님은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바요나라는 말은 요나의 아들, 요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이었고, 사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이 신앙고백 이후에 주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었습니다. 바요나 시몬이라고 부르신 주님의 이 말씀은 그의 혈통적인 신분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는 요한의 아들 시몬인데, 그의 고백은 결코 이러한 혈육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네가 복이 있노라’고, 주님은 칭찬 이상의 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은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카톨릭과 기독교를 나누는 분기점이 될만큼 해석에 있어서 문제가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반석이라는 말씀을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을 해서, 교회의 기초를 베드로로 봅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면서 법적 후계자인 교황이 지금도 교회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반석을 베드로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으로 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라는 한 사람만을 특별하게 여기셔서, 베드로라는 한 사람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지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고, 그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주님은 이제 공생애를 마쳐가고 있는 때입니다.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계셨습니다. 본문 뒤에 있는 21절 말씀을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때로부터! 이 때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바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했던 때를 가리킵니다.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 이후에 주님은 비로소 공개적으로 주님의 수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주님은 주님의 제자들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수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업적면으로 본다면, 참으로 초라한 업적을 남기셨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어떤 크고 위대한 일을 하시기보다 단 12명의 제자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코 초라한 업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은 다른 데에 초점을 맞추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일에 초점을 맞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자 양육에 초점을 맞췄을 때 그들을 통해서 초대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과 같이 왕성하게 세워져 갈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가장 필수적이고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바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고백되어져야, 그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질 수 있고, 그렇게 세워진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살아 있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시고 있을 때의 세상은 어떠했습니까? 당시 세상은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고, 로마 황제를 섬겨야 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또, 주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데리고 가신 빌립보 가이사랴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당시에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던 사람은 분봉왕 헤롯 빌립이었습니다. 그는 이 도시를 화려하게 재건하려는 꿈을 품고, 로마 황제였던 디베료 가이사의 이름을 기리면서 그곳을 ‘가이사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인 ‘빌립’과 합해서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렇게 이름한 그곳은 더 큰 권력자와 합해서 권력을 누리려고 하는 권력자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황제를 숭배하는 도시였고, 이방신 숭배가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우상숭배의 도시가 바로 빌립보 가이사랴였습니다.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교회를 세워가려고 하시는데, 그런데, 그 일을 해나가야 할 할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별로 배운 것 없이 물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좀 배웠다 하는 사람이 세리 정도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하고도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세상의 권력자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고, 세상의 부와 권력, 우상 숭배, 세상의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 그들이 어떻게 주님의 교회를 흥왕하게 세워갈 수 있을지 염려가 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그런 그들을 남겨두고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무리 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우상숭배를 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진 살아있는 신앙고백이 있을 때에! 그 신앙고백만이 교회의 튼튼한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세상의 가치관이 압도하고 있는 그 도시에서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듣기 원하셨고, 베드로가 혈육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신앙고백으로 고백했을 때에, 주님은 그 고백을 들으시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신앙고백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지를 돌아봐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올바르게 신앙고백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을 만큼 반석 같이 든든한 신앙고백을 우리는 소유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은 유명한 신앙고백이고, 주님을 흡족하게 할만큼 좋은 고백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오직 베드로의 고백이 유일한 답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또 다른 신앙고백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라합이라는 이방 여인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을 통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의 반석과 요새와, 피할 바위와 나의 방패와 피난처가 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을 만난 후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곁에 섰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제자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신앙고백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아는 주님, 내가 믿고 고백하는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나만의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향해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베드로의 고백이 정답이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만 고백해야 합니까? 신앙고백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사도들이 했던 신앙고백대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이렇게 시작해서 사도신경을 줄줄이 외우면 됩니까? 사도신경이 무슨 주술적인 주문처럼 외우는 용도로 사용하는 걸까요? 

  우리는 그 누구의 신앙고백도 아닌, 나만의 신앙고백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핵심적인 한 가지는 우리가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주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어떤 관계 가운데 있느냐 하는 것은 영생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서 ‘나는 주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느냐’에 대한 대답이 주님과의 관계를 결정짓게 됩니다. 

  어떤 분의 신앙고백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나는 주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이, 단지 ‘나를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를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분. 이 고백은 어떤 고백입니까? 잘못됐거나 틀린 고백은 분명히 아닙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불충분하고 미흡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나의 유익면에서 볼 때 나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필요하고, 그래서 믿고 있다고 고백한다면, 이것은 온전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을 한 사람이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이러한 신앙고백은 주님과 올바른 인격적인 만남을 갖지 못한 가운데 고백된 것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천국에 들어가고는 싶지만, 주님께 헌신하기는 부담스러워서 하지 못하고, 회개함은 없으면서 천국에 들어가기만을 원했고, 주님이 주시는 특권을 누리고는 싶지만 주님을 사랑하지는 않는 자의 고백이라고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을 한 사람과 주님의 관계는 사랑으로 연결된 바른 관계가 아니라, 주님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수단으로 여기는 관계일 뿐입니다.

  신앙고백은 이렇게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단지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신지, 내 뜻을 이루고 내 행복을 위해서 내가 필요로 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내 신앙고백은 어떠한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그러나 내 마음대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을 하는 주체는 우리 자신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고백하게 되는 신앙고백의 내용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랬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었지만,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신앙고백은 이렇게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의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고,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시고 고백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신앙고백에 있어서 우리가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고백은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것 자체가 신앙고백일 수는 없고,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있었던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더러운 귀신이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주님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귀신은 그들을 멸할 권세가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줄을 알았습니다. 주님께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귀신이 주님께 대해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귀신의 그 말을 우리는 신앙고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고백했지만,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알고 있는 것과 그 삶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말이 진정한 신앙고백이 되려면 그 지식과 삶이 일치해야 합니다. 귀신이 주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인 줄을 진정으로 알고 고백한다면, 그 주님 앞에 순종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신앙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이렇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서 그치는 것도 아니고, 그 지식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고백은 반드시 우리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모습을 돌아보게 해주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너는 나를 선생이라 부른다. 그러나 너는 나에게 묻지 않는다. 
너는 나를 빛이라 부른다. 그런데 너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너는 나를 길이라 부른다. 그러나 너는 나를 따르지 않는다. 
너는 나를 진리라 부른다. 그런데 너는 나를 믿지 않는다. 
너는 나를 생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너는 나를 원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사랑스럽게 부른다. 그런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의롭다고 한다. 그러나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의 입술의 고백으로는 주님을 길과 진리로 고백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우리 삶 속에서는 전혀 고백되지 못하고, 고백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신앙고백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귀신의 고백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고백과 삶이 분리되면 그것은 신앙고백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으로 고백되는 것이 진정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신앙고백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삶으로 고백돼야 하겠습니까? 예배에 대해서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평소에 아무렇게나 입던 옷을 입고, 시장에 갈 때나 신는 신발을 신고 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지켜서 좋은 옷을 입고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고백하고, 왕되신 하나님 앞에 내가 예의를 갖춘다고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한다면, 아무렇게나 준비됨 없이 나와서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 드릴 때의 태도 역시, 예배를 구경하는 구경꾼이 되고, 삐딱하게 앉아서 팔짱 끼고 다리 꼬고 앉아서 예배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귀중한 것이지만, 감사의 고백으로 가장 귀한 것을 가장 귀하신 분께 드린다는 신앙고백입니다. ④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에 핸드폰을 끄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시간이 가장 귀한 시간이기 때문에, 이 시간이 방해받지 않도록, 오직 나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만 집중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는 신앙고백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높으신 만왕의 왕으로 구원자로,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 우리가 믿고 고백한다면, 고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고백입니다. 

  또한, 신앙고백은 늘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날로 성장해야 합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성장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그것이 살아있는지를 의심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도 살아있는 신앙고백이라고 한다면, 신앙의 연륜이 깊어갈수록 신앙고백도 더 깊은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더 깊이 있는 삶으로 체득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날로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성장을 통해서 내 신앙고백이 살아있는 신앙고백이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주님께 대한 고백이 변화되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곳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보면, 주님이 여인에게 접근하셨을 때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당신’으로, 평범한 유대인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생수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여인은 ‘주여’라고 부릅니다. 호칭이 변화되긴 했지만, 주님을 제대로 알고 고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남편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여인은 주님을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이시긴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주님과 대화를 마친 후에 여인은 드디어 메시야로 고백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여인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음을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주님을 알아갈수록 우리의 신앙고백도 성장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내 신앙고백은 언제 한 고백입니까? 혹시 학생시절 고백했던 신앙고백을 조금의 변화도 없이 지금껏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어린 아이 수준의 신앙고백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장성해서는 어린 아이 때의 모습을 버리는 것이 올바른 모습입니다. 신앙고백에 있어서도 이제는 믿음에 장성한 자다운 신앙고백을 우리는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사람의 신앙고백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주님을 ‘나를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분’이라고 고백했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고백했습니다. 예전에는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주님과 깊은 관계 가운데 있지 못했지만, 이제는 주님을 이전보다 깊이 있게 알아가고 있고, 주님과의 관계도 더욱 견고해져서 그는 “주님은 나를 모든 죄에서 건져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더욱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는 고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신앙고백이 살아있는 신앙고백이고, 우리는 어제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신앙고백으로, 이전보다 더욱 성숙한 신앙고백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신앙고백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 없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고백이 없는 성도,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구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만의 신앙고백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날로 성장하는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살아 있는 우리의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이 신앙고백 위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주님의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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