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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계와 믿음 (막 5: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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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역도 여왕 장미란 선수도 잘 아실텐데, 이 두 사람은 서로 확연하게 달라 보입니다. 피켜 스케이팅이라는 종목과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는 역도라는 종목은 분명히 다른 종목이고 그 차이가 큽니다. 두 사람의 외모도 그 체격에 있어서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닮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력을 이긴 스포츠 스타’라는 점에서 닮았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중력에 대한 한계를 갖고 있는데, 한 사람은 필사적인 다이어트를 해서라도 체중을 줄여서 더 높이 중력을 이기고 뛰어 올라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어서 중력을 이기고 더 무거운 무게를 높이 들어 올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두 선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렇게 중력의 한계를 이기고 메달을 목에 건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이러한 종목에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만, 두 선수는 오랜 훈련을 통해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승리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우리는 그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포츠 스타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 ‘인간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100미터를 9초 대에 뛰는 선수를 보면서,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더 빨리 달릴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또, 기네스북에 기록된 경이로운 기록을 보면서, 극한의 도전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인간의 능력이 참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또, 놀라운 과학 기술의 발전들을 보면서도 인간 능력의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유전자와 세포들을 조작해서, 뭔가를 만들어 내고 어떤 업적을 이루는 것들을 보면, 우리 인간들이 마치 창조주라도 되는 것처럼 위대한 존재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의 능력은 분명히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모습을 이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 속에는 어떠한 한계와 믿음의 모습이 나타나는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의 영의 양식과 기도제목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앞에 있는 1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주님이 거라사로 배를 타고 가셔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 후에 주님은 다시 배를 타시고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주님이 풍랑을 뚫고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배를 타고 건너가셨다가,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돌아오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가버나움에 돌아오시니까 사람들이 주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때에 회당장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는 마치 주님이 가버나움으로 와주시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 앞에 찾아왔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주님께 찾아왔을 때의 모습을 마가는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주님께 찾아와서 주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회당에는 회당장과, 핫잔, 랍비라는 세 직책이 있습니다. 핫잔이라고 하는 사람은 종교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회당장의 조수로서 제반직무를 수행하고 정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랍비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의 어려운 점을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회당장은 회당에서 가장 우두머리 격으로 회당 건물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모든 예배에 대한 것을 주관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장은 상당한 영적 권위를 갖고 있었고,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기도와 예배를 주관하는 회당의 리더인 회당장이 주님께 엎드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이처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기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그가 한계 상황에 다다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한계에 부딪쳐서 주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한계는 무엇이었습니까? 회당장은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회당장의 어린 딸이 중한 병에 걸려서 곧 죽게 될 위기에 처했는데, 회당장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어린 딸이 아파서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대신 아파주거나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이 아버지 야이로에게는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무력합니다. 

  네 살짜리 어린 아이가 놀다가 건물에서 떨어져서 피투성이가 돼서 응급실로 실려 갔습니다. 당장 응급처치를 해야 하지만,높은 데서 떨어졌기 때문에 뇌가 상했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마취를 하면 깨어나지 못하고 식물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취를 하지 않고, 침대 시트로 아이를 둘둘 말아서, 의사들이 아이의 팔을 붙들고 아이의 아버지가 발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생살을 꿰맸습니다. 아이가 발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아이는 수술을 하는 내내 아빠를 향해서, “아빠, 나 좀 살려주세요. 아파 죽겠어요.”라고 외쳤지만, 아버지는 그 소리치는 아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언젠가 서울 강남에 있는 한 고등학교 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해서 너무 괴로운 나머지 더 이상 살기 싫다는 쪽지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동차 위에 떨어져서 죽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차린 아이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서 자기 집 앞에 한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서 뛰어내렸습니다. 이번에는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은 죽은 아이의 핏자국을 보고 알게 됐습니다. 피는 자동차 지붕 위에 고여 있었고, 거기서부터 계단을 따라서 핏자국이 계속해서 떨어져 있다가, 그 집 앞에는 흥건히 고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옥상까지 다시 핏자국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자식이 아파트 문 밖에서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부모는 알지 못하고 방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능력한 존재들입니다.

 야이로에게 있어서 어린딸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 딸이 병들었을 때에, 그는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해서 딸을 살리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가 회당장으로서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딸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딸을 위해서 사용했을 것입니다. 또, 그가 회당장으로서 사회적인 친분도 많이 있었다면, 그 친분을 통해서 많은 의원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또, 그는 날마다 회당에 엎드려서 딸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수고했겠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사랑이 참으로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자녀를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다 주고도 남음이 있는 사랑이지만, 이 사랑의 능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이 한계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그 문제를 주님께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회당장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던 일과, 한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신 일을 직접 봤거나, 그 사건에 대해서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어린 딸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한계가 있지만, 주님은 능력에 한계가 없으셔서 전능하신 분이심을 그는 믿고 의지하면서 주님께로 와서 엎드렸습니다.

  그는 주님께 간곡히 구하면서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내 딸의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쳐 달라는 말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 살게 해달라!’ 죽음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는 간곡한 외침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무능력한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 애절하게 간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게 되셨습니다.

  큰 무리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개중에는 주님이 야이로의 딸을 어떻게 고치실지를 기대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대하면서 몰려든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 번 주님의 이적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에워싸고 서로 밀면서 그렇게 회당장 야이로의 집을 향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도착하고 딸을 고쳐주시는 이야기로 이어져야 할텐데, 회당장 야이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지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한 여인이 끼어들었습니다. 저자 마가는 이 여인에 대해서 소개해 주기를,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인이었다고 소개를 해주고 있습니다.

  하혈이 멈추지 않는 병을 12년이나 앓아 왔습니다. 12년이라는 시간은 38년 된 병자와 비교하면 그리 길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12라고 하는 숫자는 3이라는 완전수에서 4를 곱한 것으로, 완전하고 많은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병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혈루증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혈루증 환자를 만지는 것도 부정한 것이었고,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인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의 질병은 단순한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그 여인의 인생의 문제였습니다. 그 여인은 인생의 그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으로 노력했습니다. 

  그것을 마가는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많은 의사들을 만나면서 진료비와 약값으로 재산을 다 써버렸습니다. 그토록 돈을 들였다면 차도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오히려 더 중해졌습니다. 돈은 돈대로 탕진해서 더 이상 의원을 찾아갈 수도 없었고, 병은 오히려 더 중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 역시 한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건강의 한계를 누구보다 절절히 느꼈습니다. 자신의 질병으로 인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고, 자신을 억누르는 그 질병의 무게로 인해서, 인생을 힘차게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또한, 여인은 물질의 한계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돈을 써봐도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인은 절망이라고 하는 영적 질병에 사로잡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한계상황에 다다르게 될 때에 절망하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절망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를 경험하면서도 여인은 믿음을 갖고 주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주님의 소문을 듣고 여인은 무리 가운데로 끼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떳떳하게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회당장처럼 당당하게 주님께 나아가서 엎드리면서 간청할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부정함으로 인해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살아왔던 여인이었기 때문에, 주님 앞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님의 뒤로 왔습니다. 자신을 감춘 채로 무리들을 헤치고 뒤로 와서 주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믿음 가운데서 그와 같은 행동을 했는데, 그 믿음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여인이 가진 믿음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여인은 믿었습니다. 지난 금요기도회 시간에 함께 나눈 말씀처럼, 이 여인의 믿음은 상상력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중풍병자를 지붕을 뜯고 주님께로 달아 내렸던 사건에서 그와 같은 일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주님께로 데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던 믿음의 사람들은 지붕을 뜯어내면 되겠다는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했습니다.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도 주님의 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주님의 옷을 만졌다가 병 고침을 받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옷자락만 만져도 낫는다고 하는 새로운 믿음을 창조해낸 여인이었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에 어떻게 됐습니까? 누가의 기록을 보면, 혈루증이 즉시 그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랐다고 말씀해 줍니다. 병이 근본적으로 치료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12년간 여인을 괴롭히던 병이 여인의 믿음대로 그 근원부터 한 순간에 치료됐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자신이 나은 줄을 스스로 알아차렸습니다. 자신의 병이 나았다고 곧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여인의 병은 완벽하게 치유되어졌습니다. 

  여인의 병이 이토록 근본적으로 치유되었다는 것을 주님 또한 아셨습니다. 주님에게서 능력이 그 여인에게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주님이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돌이켜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무리들이 에워싸는 가운데 누가 밀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도 우연히 자신의 몸에 닿는 것과 의식적으로 만진 것을 구별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을 찾기 위해서 둘러보셨습니다. 

  주님의 눈길에 여인은 두려워합니다. 자기에게 이뤄진 일도 놀랍고, 또 고침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아시는 주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전능하신 주님 앞에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여인은 두렵고 떨리지만 주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여인은 두려워 떨고 있었지만, 하지만, 주님은 여인을 따뜻하게 맞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주님은 여인을 향해서 딸이라고 부르시면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고 주님의 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으리라고 믿었던 여인의 믿음을 주님은 아셨고,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의 이야기로 인해서 끊어졌던 야이로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이어집니다. 여인 때문에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던 주님의 행보가 지체되었습니다. 그 때 야이로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겁 없이 끼어든 한 여인 때문에 자신의 집으로 향하던 발길이 길에서 멈춰 서게 됐을 때 그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한 시라도 바쁘게 자신의 집으로 가주셔야 할텐데, 자신의 옷을 만진 여인이 있다고 하시면서 여인을 찾으시고, 여인에게 말씀하시면서 시간을 지체하시는 주님이 어쩌면 원망스러웠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은 슬픈 소식이 전해지게 됩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마가는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온 시간은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고침을 받고,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말씀하고 계시는 중에, 그 말씀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여인의 희망과 야이로의 절망이 교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은 딸이 죽었는데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모든 희망이 다 사라져 버렸는데, 주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그들은 말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죽음은 곧 절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개의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그 하나는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 인간은 죽음 앞에서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불로장생하기 위해서 온갖 것을 구했던 진시황도, 그 어떤 사람도 죽음만큼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우리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한계는 지식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만 보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혈루증을 갖고 있는 여인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일은 그의 계획에는 없는 일이었고, 그 일로 인해서 시간이 지체 되고, 딸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해서 그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장래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 정도가 아니라, 당장 몇 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우리는 알지 못하는, 지식의 한계가 있습니다. 

  죽음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이런 한계상황 가운데서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주님이 곁에서 들으셨습니다. 36절 말씀에서, 주님이 ‘들으셨다’라고 하는 말씀은 ‘들어 넘겼다’는 의미가 강한 말입니다. 주님은 인간적인 판단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떠들고 우는 자들을 향해서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주님의 이 말씀에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라고 하는 한계는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믿음 없는 사람들은 뒤로 하시고, 야이로 부부와 제자 베드로와 아고보, 요한을 데리고 소녀에게로 가십니다. 그리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어 다닙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죽음의 한계마저도 뒤로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한계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주님은 그 모든 한계들을 뒤로 하시고 전능하심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에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에 있어서 한계가 있습니다. 자녀를 향한 사랑이 있으면 될 것 같습니까? 자녀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될 것 같습니까?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가정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까? 우리 능력으로 사업을 내 마음대로 경영해 나갈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막상 중요한 순간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이 한계를 알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내 자녀와 가정과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바로 이것을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고, 우리와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한계상황 가운데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문제를 들고 주님께로 나아갔고, 그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는, 믿은 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계를 초월하신 분을 믿으면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죽음의 한계마저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부활의 주님이 되셨고,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죄 앞에서 우리의 무능력함으로 인해서 절망 가운데 있을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로 오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전능하신 주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주님은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태도가 바로 우리가 전능하신 주님을 대하는 태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기만 해야 합니다. 우리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한계는 무엇입니까? 내 자녀의 문제입니까? 물질의 문제입니까? 건강의 문제입니까? 일터의 문제입니까? 이 모든 것들을 전능하심으로 역사하시는 주님께 우리는 두려움 없이 믿음으로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한계가 있지만, 한계가 없으신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의 한계들이 믿음으로 극복되어지고, 한계가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운 역사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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