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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이야기(10) : 나를 당신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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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10) : 나를 당신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1-8)
 
총리가 되기까지 요셉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아홉 번에 걸쳐서 요셉의 인생을 살펴보았습니다. 급전직하를 경험하며 고통과 고난 속에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낮은 밑바닥 인생에서부터 한 나라의 총리가 되었던 영광스러운 과정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열 번째 시간을 맞이하여 요셉이라는 인물을 묵상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요셉은 애굽 땅에서 수많은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을 애굽에 팔아 넘긴 형들을 향해서 마지막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가치관과 인생관, 신앙관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세기 45:5)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되돌아보니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었지만 모두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나를 먼저 이곳으로 보내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이고, 인간이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는 같은 의미의 조금 다른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창세기 50:20∼21)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했지만, 이 사건 속에서 나는 힘들고, 어렵고, 외롭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이유는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팔아 넘겼다.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의 생애에 찬란한 결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있었고, 깊은 구렁텅이와 같은 삶의 나락 속에 빠진 적도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대목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 봐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환경의 어려움, 여건의 한계, 인간관계 속에 나타난 비난과 조롱, 때로는 질병에 걸리고,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수난의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요셉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였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자신에게 힘을 주었다는 것을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요셉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가치관과 신앙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요셉을 요셉 되게 하였을까요? 요셉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셉은 사랑받는 아들에서 성년이 되지 않은 열 일곱 살 나이에 느닷없이 이방 나라 땅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힘겨운 종살이를 했습니다.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어두운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때 요셉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과연 그는 기대를 갖고 있었을까요? 아버지와 함께 있었을 17살 때 주신 꿈을 하나님이 실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습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에게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 인생을 맡기겠다’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지켜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그는 어느 순간에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요셉이라는 인물을 놀랍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종의 신분으로 있을 때도 칭찬합니다. 감옥에 있을 때도 칭찬합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그에게는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셨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이 저절로 된 것일까요? 요셉같이 특별한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요셉이 순간순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떠나는 것은 나입니다. 내가 떠나는 겁니다. 내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나님의 시선에서부터 도망가 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요셉은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됩니다. 

요셉은 감옥에 들어가고, 종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다시 되돌아보게 됩니다. 아마 처음에는 미움과 분노가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 미움과 분노가 얼마동안 지속되었는지는 성경이 말해 주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화나고, 원망이 생기고, 분노했던 마음이 어느 날 가라앉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아마도 자신이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는 깨달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노예생활을 하며 가장 먼저 바뀌게 된 것이 사람에 대한 태도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 형들은 양을 치면서 가축의 똥오줌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괘념치 않았구나. 17살이나 되었으면서도 아버지가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며 채색옷을 입고 형들 앞에서 자랑했었지. 내가 못됐었구나! 꿈을 꾸고 나서는 형들이 나한테 엎드려 절하게 될 거라면서 뽐내기도 했었지.’ 요셉은 자신이 형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형들로부터 배반을 당하게 된 것은 많은 부분 자기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만남의 복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의 많은 복 중에서 인복이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인복은 선천적인 것일까요? 저절로 되는 것일까요? 특정한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인복은 후천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태복은 7장 12절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관계를 이렇게 해쳐 나갈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구약에 쓰인 많은 율법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일까요? 선지자들이 가르친 내용은 결국 무엇인가요? ‘네 옆에 있는 이웃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대접이란 곧 이웃을 존중하라는 것이고, 이웃의 인격을 귀히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것은, 그도 나 같은 복된 존재임을 알고 그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현실이 아닌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면서 그를 격려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신이 귀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인복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복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돈이 많은 것이 인복의 비결일까요? 권력을 차지하고 세상의 지위가 높아지면 인복이 생기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내 이웃을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어쩌면 인복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인복이 있습니다. 내게 있는 인복을 감사하며, 남을 소중히 여기면 그 인복이 점점 커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왜 저 친구는 잘나가지? 왜 저 친구 주위에는 저렇게 사람이 많지? 나는 이게 뭐야?’ 하며 탄식하면 스스로가 위축되고, 더욱 주위 사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 만나는 복을 누리는 것이 때론 힘들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임했던 사람이 나를 배반하기도 하고, 내 인생을 밑바닥 치는 인생으로 전락시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 사람을 신뢰해도 될까? 이 사람에게 정을 줘도 될까?’ 하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 때문에 위기가 올 것을 알기에 때론 멈춰 서 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도, 이 사람이 나를 떠나고 나를 다시 버려도 그 사람에게 다시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다시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용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 아닐까요? 

저는 요셉의 생애를 보면서 도대체 요셉을 요셉 되게 한 것이 무엇인지, 요셉이 어떻게 그렇게 변화될 수 있었는지, 나락 속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깨닫게 된 것은,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추락시키기도 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하십니다. 요셉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잘 벌고, 재물이 풍성한 것이 마치 모든 것의 근원인 것처럼 돈에 취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오직 돈을 위해 일하게 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일입니다. 일 자체의 즐거움에 빠져야 돈도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앞으로 달려가게 되면 금방 추해지고 천해집니다. 갑자기 돈을 번 졸부들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몇 푼 더 벌었다고 재세합니다. 사람들에게 뽐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본색을 금방 알아챕니다. 

돈과 재물을 갖는 복보다 더 중요한 복이 일할 수 있는 복입니다. 일을 즐거워할 줄 아는 복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복은 사람을 만나는 복입니다. 일 때문에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일할 때에 그 일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그에게도 인간관계가 바닥을 쳤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하였습니다. 종의 신분이었지만 동료들에게 신실했고 그래서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주인 보디발을 위해서도 충성을 다했습니다. 인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 봤자 누가 나를 알아준단 말이야? 주인만 부자가 되는 거지!’ 만약 그 생각에 멈추었다면 그는 결코 보디발에게 그토록 충성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감옥에 들어가서도 간수장을 위해서 충성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사리사욕을 차리지 않고, 애굽 백성과 바로왕을 위해서 충성했습니다. 

지금의 자리에 충성된 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인복이 있으면 일복도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일하고 싶으십니까?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일하고 싶지 않습니까? 맡은 일에 충성을 다 하는 사람에게 넘치게 주고 싶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은 25장에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그냥 땅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시간을 낭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나가서 수고하고 땀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아와서 주인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태복음 25:23) 

“내가 작은 일을 네게 맡겼는데 네가 그 일에 충성하였으니 앞으로 큰 것까지도 맡기겠다. 이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복이 새로운 사명을 줍니다. 요셉에게 주어진 새 사명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의 옆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신뢰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고, 인정해야 남편의 마음은 훌훌 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운 아내라도 남편의 신뢰와 사랑이 없으면 외롭고 답답합니다. 내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범주의 사람들에게 신뢰와 정성과 성실을 다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와 성숙으로 이끌고, 하나님이 주신 풍요의 자리에 들어가게 하는 비결입니다. 

성경은 요셉이 애굽의 군대장관 보디발에게 신임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창세기 39:4) 

요셉이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가정의 일들을 맡겨도 되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간수장에게도 신임을 받습니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창세기 39:22) 

총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애굽 왕 바로에게 신임을 얻었습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창세기 41:38)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충성하고, 지금 하는 일을 즐거워하면서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요셉은 그렇게 자기 인생을 걸어갔습니다. 

바로 지금, 내 인생의 자리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을 찾으실까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은 어떠합니까? 요셉의 초기 삶처럼 불안하고 괴롭습니까? 어느 것을 해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습니까?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시간표와 내 시간표는 너무나 다르다고 탄식하고 있습니까? 시편 27편 14절에 기록된 다윗의 말을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편 27:14) 

여호와를 기다리는 삶의 태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 그 사람, 그 시간, 그 장소,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가정을 꾸리게 하셨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직장을 나가게 하셨습니다. 먼저 교회에 오게 하셨습니다. 먼저 이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먼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내셨군요!”라고 여러분이 밟는 땅을 향하여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그렇게 선언하세요. 그때 한 사람, 한 사람은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나를 이곳에 보내주셨군요. 내가 다시 주님과 함께 시작하겠습니다.”하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 결단과 함께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으며 한걸음씩 내딛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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