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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하게 하는 자 (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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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 (마 5:9)

지독스럽게 말을 안 듣는 말썽꾸러기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빠가 가장 아끼는 도자기를 깨버리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아빠가 아들을 붙잡으려고 하자 아들은 냅다 도망치더니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립니다. 그리고 아빠에게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한참을 대치하던 아빠가 아들에게 안 되겠다 싶어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내가 내는 문제를 알아맞히면 안 때리겠다.” 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빠가 너를 어떻게 할 것 같으냐?” 고 물었습니다. 

그런데요 아들의 대답이 한 수 위입니다. “때릴 것 같습니다.” 하거든요. 자, 어떻게 된 것입니까? 만약에 때리면 자기가 한 약속이 있고, 사실은 붙잡아 혼내고자 한 것인데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아빠는 소위 말하는 <논리적 모순> 에 빠졌습니다. 어찌됐건 일단 이 싸움은 아들이 이겼습니다. 아들은 안심하고 의기양양하게 문을 열고 나와서 아빠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한참을 바라보고 있던 아빠가 갑자기 달려가서 아들의 엉덩이를 한 대 때립니다. 아들이 항의합니다. “아니, 아빠 문제를 맞히면 안 때린다 해놓고 약속이 틀리잖아요!” 그러자 아빠가 하는 말이 “야, 웃기지 마라 널 때리고 안 때리고는 아빠 마음이지 그런 게 어디 있냐!” 그랬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계약의 논리> 이고 또 다른 하나는 <힘의 논리> 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삶에도 이 두 논리가 언제나 첨예하게 대립을 합니다. 

그런데 이 대립의 문제는 언제나 싱겁게 일방적인 형태로 끝나버립니다. 그 결론이란 무엇입니까? 계약의 논리보다 힘의 논리가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힘센 사람이 이긴다.” 는 묵시적인 논리가 그것입니다. 강자의 말이 언제나 옳은 것처럼 되어버리는 세상입니다. 힘의 논리가 계약의 논리도 진실의 논리도 묵살하고 평정을 하려는 데서 세상이 어수선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힘의 논리를 앞세워서 억압하고 조용하게 만들어 놓고는 그것이 평화라고 착각한다는 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평화에 대해서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떻게든 동요가 일어나지 않고, 시끄럽지만 않으면 그것이 평화입니까? 

성경은 이것을 평화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평화란 그게 아닙니다. 화평이란 말은 우리가 많이 듣고 자주 사용하는 히브리어 샬롬이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완전하다. 전체적으로 건강하다.” 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한 쪽도 일방인 힘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건강한 것이 화평이라는 말입니다. 

북한에는 데모도 없고 파업도 없이 조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우리는 북한이 평화롭다고 말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힘의 논리에 의해 쥐죽은 듯 고요한 이것을 결코 평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하는 짓이 또 있습니다. 다함께 죽자는 가공할만한 핵을 만들어 내고 신무기들을 숨기고 있으면서 당장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조용하다고 이 상태를 과연 평화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위장된 평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동물인지라 생각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싸워서 이겼다고 해서 그 마음이 절대로 평안하지가 않습니다. 내가 이기는 순간 누군가가 졌습니다. 내가 빼앗았다면 빼앗긴 자의 눈물이 있습니다. 내가 성공했다고 마냥 기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의 실패와 어려움과 억울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화란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기고, 나도 기쁘고 너도 기쁜 이것이 완전한 평화입니다. 

이러한 평화의 개념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평하게 하는 자란 단지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즐기는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구나 평화를 사랑하는 자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사랑한다고 모두 평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 무대에 등장한 역대 독재자들이 항상 내세운 슬로건이 무엇입니까?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입니다. 마치 평화를 사랑하는 자임을 자처하는 이 명목으로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저질렀습니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이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평화를 사랑하는 차원을 넘어서 아무나 할 수 없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비난도 있고, 손해도 있고, 고통도 있고, 아픔도 있지만 그것을 안고 현장에 뛰어 들어가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 이 사람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에는 언제나 작고 큰 싸움들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건 어른들이건 싸울 때 보면 그 싸움 주위엔 언제나 세 부류의 무리가 있습니다. 첫째 무리는 싸움을 붙이는 무리입니다. 이 쪽 저쪽을 옮겨가면서 싸우게 만듭니다. 이쪽엔 이런 이야기로, 저쪽엔 저런 이야기로 도저히 싸우지 않고는 안 되게 분위기를 몰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싸울 일도 아닌데 이런 사람 때문에 싸우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평하게 하는 자와는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trouble-makers 라고 합니다. 오나가나 그 어디에서나 문제를 만들고, 다툼을 조장하는 사람입니다. 이건 참 나쁜 일입니다. 남의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남의 이야기는 되도록이면 좋게 해야 됩니다. 둘째 무리는 구경하는 무리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누구든지 이겨라!” 라는 식의 모순적인 응원을 하면서 즐기려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세 번째 부류는 싸움을 말리는 무리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입니다. 어떻게든 싸움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시키면서 말리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요. 잘못 싸움을 말리다보면 말리는 사람이 코피가 터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피 흘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뛰어들어서 싸움이 더 커지지 않게 만들어 놓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옛날에 두 나라가 어찌나 심하게 싸웠던지 더 싸우다간 두 나라가 다 망하게 생겼습니다. 지혜로운 사람 하나가 중간에 나타나서 이쪽나라에 가서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비유해서 말하면 당신네는 보름달 같고 저쪽나라는 초승달 같은데 뭐 큰 나라가 조그만 나라를 치려고 합니까?” 그러니까 왕이 기분이 좋아 가지고 “아, 그러면 그만두지 뭐 까짓 것” 하면서 전쟁을 그만 두게 되는데, 이쪽에 오니까 이쪽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 그 나라는 보름달이고 우리는 초승달이라고? 이 사람이 우리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냐?” 고 화를 냅니다. 그러니깐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보름달은 이제 기우는 일만 남았고 초승달은 이제 점점 더 커질 일만 남았는데 뭘 그러십니까?” 합니다. 이 왕도 기분이 좋아 전쟁을 피차에 그만두었다는 얘깁니다. 

말 한마디로 이렇게 쉽게 화해가 이루어지나 싶겠지만 “저 사람이 당신 무지하게 욕합디다.” 하는 말이나 “아무개가 당신 무시합디다.” 라는 말들보다는 훨씬 지혜롭고 부드럽지 않습니까? 심성의 문제입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과연 복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어떤 복입니까? 오늘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 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군에 있는 저희 아들 녀석이 9살 무렵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 “아빠! 집사님들이 왜 자꾸 나보고 국화빵이라고 하고 복사기라고 해요?” 그러는 겁니다. 아마 저하고 똑같이 닮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들은 아버지를 닮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보는 사람들이 똑같다고 하는 데는 뭐라고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은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또 다른 분신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그대로 모방했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한평생 터득한 기술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물건을 만들고 장사하는 것을 보면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복을 얻었다 함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남들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해도 정작 그 아버지가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대로 어느 구석을 보아도 아버지와 닮은 데라고는 없는데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데는 또 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이라는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에 의해 누구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느냐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왜 구원받았는지, 왜 하나님이 자녀로 삼아 주셨는지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과 행위에 있어서 모든 것을 아버지를 닮으라고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아들로 부르셔야만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비결을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라“ 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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