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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생활이란? (창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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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생활이란? (창 12:1-4)

모교단의 총회장을 지내셨던 고 유00 목사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일찍이 조실부모하시고 이모님 슬하에서 자라셨습니다. 이모님이 깊은 믿음을 가지고 사시다가 임종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모님께서 임종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유 목사님께 이렇게 유언을 하셨답니다. “유 목사님! 예수 잘 믿으십시오. 예수 잘 믿으셔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는 당부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목사에게 예수를 잘 믿으라니요... 목사는 예수 믿는 일이 직업이고, 예수 믿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유호준 목사님은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는 목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교회에 문제를 일으킨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목사님에게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은 어폐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모님이라는 분은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너무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성의 죄고봉은 사랑이지만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런데 영적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영생이 없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믿음생활이란?”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다루는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가 자랑할 것은 자신의 능력도 아니고 자신의 배경도 아니고 자신의 행위도 아닙니다. 그의 자랑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된 믿음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첫 번째 만남이며 동시에 우리들에게는 믿음생활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믿음생활이란 어떤 것인지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1.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음의 길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전 1장에 보면 십자가의 도를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고, 지혜로운 자도 많지 않고, 많이 가진 자도 별로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구원 얻는 사람들 중에는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족함이 많은 그들이 구원을 얻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전 1:26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롬 8:30에 보면 믿음의 여정을 4단계로 정리했습니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믿음생활 할 사람들을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이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 나를 선택하셨느냐?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나를 부르셨느냐?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나를 의롭게 하셨고, 누가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냐?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생활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2월에 미국을 다녀왔습니다. 미국을 어떻게 다녀왔을까요? 제가 걷고 수영해서 미국을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지금도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으로 가고 있든지 아니면 태평양에 빠져 죽었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비행기를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제 힘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비행기에 제 몸을 실었기 때문에 미국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믿음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내 힘, 내 능력, 내 공로로 믿음생활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려주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하나님의 붙드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2. 믿음생활은 하나님과 대화로 유지됩니다(1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사 41:8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셨습니다.
   
여러분! 친구가 되려면 다른 것은 몰라도 대화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친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화가 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신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과 대화라고 말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잘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기도를 끝내지 않습니다. 기도를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가 하고 있는 기도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는지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경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말씀하시고 수천 년 동안 침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성경 말씀은 살아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 시대의 설교자들에게 감동을 하셔서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주로 생각이나 감동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분은 성령께서 말씀하신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을 괴이한 일이라고 표현을 하더군요.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성령님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 10:19-20입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속에서 말씀하신다고 하잖아요. 행 8:29에 보면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행 10:19에 보니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행 13:2에 보니 “성령이 이르시되” 성령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를 원하십니다. 사 1:18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변론이 무엇입니까? 사리를 밝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변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라고 하셨습니다.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는 것입니다. 대화하자는 말이죠.
   
믿음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가정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가족들과 대화를 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자꾸 말을 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내가 누군가와 동행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상대와 대화가 없이 동행한다면 얼마나 서로 불편합니까. 얼마나 서먹서먹합니까. 믿음생활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가 잘 되는 사람입니다.
   
영국의 한 보험회사(Sheilas' Wheels)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영국 남성들은 운전을 하다가 길을 잃어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는답니다. 영국 남자 10명 중의 1명은 목적지를 안 가면 안 갔지 끝까지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1년에 평균 444km를 헛 주행 한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헛고생 하는 셈입니다.
   
믿음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물으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하십시오. 그리고 범사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시기길 바랍니다.


3. 믿음생활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1절). 
   
1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는 지금과 다른 사회입니다. 그 당시에는 힘 있는 사람이 힘으로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을 모으기 위해서 부족사회를 이루며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친척이 많다는 것도 상당한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나 친척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은 우리들의 신앙의 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야 40년을 생각해보세요.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물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서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모세를 의지하면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였을 뿐입니다. 모세의 능력으로는 광야에서 단 하루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일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믿음생활을 하면서 전심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자기 힘이나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신천옹이란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새 중에서 가장 오래 사는 새입니다. 약 80년을 산다고 들었습니다. 또 이 새는 오래 날고, 멀리 난답니다. 이 새가 멀리 날고 오래 날 수 있는 비결은 하늘의 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 새의 날개 길이는 3미터 정도 되는데, 날 때의 에너지를 보면, 10%는 자기의 힘이고, 나머지 90%는 바람의 힘이랍니다. 바람의 힘으로 나니 힘이 들지 않아요. 그래서 오래 날 수 있고, 멀리 날 수 있고, 에너지 소비가 적으니까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신천옹 (믿을 新) (하늘 天) (늙은이 翁)입니다. 하늘을 믿고 오래 사는 새라는 뜻입니다.
   
벌새는 신천옹과 반대입니다. 이 새는 약 6cm 정도 되는 작은 새입니다. 벌새는 날개 짓을 1초에 80번을 한답니다. 이 새의 특징은 신천옹처럼 바람을 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힘으로만 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만으로 나니 멀리 날 수도 없고, 오래 날 수도 없습니다. 전깃줄에 앉았다가, 울타리에 앉았다가, 땅 바닥에 앉았다가 10미터를 못 날아갑니다. 수명도 4년 정도로 짧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내 힘으로 살려고 하면 오래 못 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야 오래 갑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래서 인생이 고달픈 것입니다. 인생이 고달픈 것은 돈이 없어서, 몸이 병들어서가 아닙니다. 내적인 만족과 안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만족과 안식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4. 믿음생활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1,2절). 
   
1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땅으로 가는 것이 비전의 삶입니다. 내가 원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모토 중에 하나가 “위대한 비전이 위대한 인생을 만든다”입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비전은 위대한 비전입니다.
   
왜 위대한 비전인지 아십니까? 사람이 만들어내는 비전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기 때문에 위대한 비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비전의 크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 비전이 위대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위대한 비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축복은 내가 목적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낸 비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는 것이 완전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빌 2:13).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고 싶으신 일이 있으면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한 소원을 주십니다. 그러면 마음에 소원을 받은 사람이 자기 마음의 소원대로 행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품는 것입니다. 히 11:1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소원,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그 비전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한 명의 자녀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큰 민족이라는 비전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능력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비전입니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사니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던 큰 민족의 비전이 결국은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 중에는 아주 작은 소박한 비전도 있고 또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강력한 비전도 있습니다. 보통 아주 작은 소박한 비전은 우리 편에서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큰 비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비전을 받으면 현실을 바라보고 뒤로 물러납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또 현실적으로 무리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습니다. “능력은 꿈에 맞춰 성장한다.” 무슨 말입니까? 작은 꿈을 가지면 작은 능력을 얻게 되고 큰 꿈을 꾸게 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큰 능력이 임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도 물러서지 마십시오. 우리가 받은 비전을 붙들고 기도하며 노력하면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든지 돕는 사람을 붙여주셔서 성취하게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이었습니다. 그는 모세를 수종들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두려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대한 선지자 모세의 영도를 받으면서도 항상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심지어 돌로 모세를 치려고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봤던 여호수아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지도자로 세우시면서 수 1장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비교하면 형편없이 연약한 사람, 무능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역은 모세보다 여호수아가 더 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여호수아에게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
   
모세가 사역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원망과 불평으로 모세를 힘들게 했습니다. 심지어 백성들은 모세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말한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모세 때처럼 여호수아에게 원망하고 불평하거나 반역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비전만큼, 사역만큼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비전을 주시든지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담대하게 비전을 향하여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5. 믿음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주십니다(3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3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는 네 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편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인 사라와 함께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왕이 무서워서 아내를 아내라 하지 못하고 누이라고 했습니다. 사라의 미모에 반한 애굽 왕이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와 약대를 주고 사라를 궁으로 취하여 들였습니다. 바보 같은 아브라함이 말도 못하고 아내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시며 바로에게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이 두려워 아브라함의 모든 소유를 하나도 취하지 않고 다 보냈습니다. 잘못은 아브라함이 한 것 같은데 하나님은 바로를 혼내시고 사라를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창 20장에 보면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가서도 동일한 실수를 합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반합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사라를 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현몽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취한 그 여인으로 인하여 네가 죽으리라” 겁에 질린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자신의 땅에서 내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시 118:6에 보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라고 시편 기자가 고백했는데 정말로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고난 당하셨습니다.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항상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6.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4절). 
   
4절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이나 환경을 따라가지 않고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버지도 친척도 중요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그 당시에 그가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큰 위험부담이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상식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상식으로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상식대로라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베드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날 때 그는 베테랑 어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고기를 잡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밤새워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물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을 때 쯤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날이 밝았고 그 시간에 깊은 곳에는 고기가 없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환경이나 자신의 몸의 상태 그리고 자기가 가진 지식이나 상식보다 주님의 말씀을 쫓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베드로나 아브라함의 자세를 따라야 합니다. 먼저 그 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분별되어지면 내가 원하는 것과 달라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상식과 달라도 또 내 감정과 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가십시오. 그것이 올바른 믿음생활의 자세입니다.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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