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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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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계 2: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말씀 중에 먼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경제적 중심도시로 소아시아에서 제일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아데미(Artemis) 여신상이 있어서 미신이 횡횡하고 있었는가 하면 황제숭배로 부도덕한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도시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사도 바울의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서 전해졌습니다. 이곳은 바울이 2년간 머물면서 목회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목회활동을 했고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서 기독교 중심 국가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에베소 교회의 풍기風紀(남녀 간의 교제에서의 절도)가 금수禽獸보다 못했다고 합니다. 
에베소 도시가 불결한 것으로 인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웃음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상업의 도시, 미신의 도시, 쾌락의 도시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8:18-23; 19:1-8).

바울은 이곳 에베소 교회에서 3년간이나 눈물로 목회를 했습니다(행 20:17-38). 나중에 아볼로와 디모데도 이곳에서 목회했습니다(행 18:24-28).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전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거룩한 도시, 깨끗한 도시에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시고 죄 많은 도시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본문 2장 1절에 『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1장 16절, 20절에는 『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 일곱별을 붙잡고 』라고 하므로 명사적 용법에서 동사적 용법으로 표현했습니다. 

계시록 1장 13절에는 일곱 금 촛대 사이에 『 서 있다 』고 했는데 본문에서는 좀 더 역동적으로 『 다니신다 』고 했습니다. 명사적 용법에서 형용사적 용법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사역동사적使役動詞的 용법으로 전환한 것은 어떤 목적을 예견하는 표현입니다. 

예컨대 "건강하세요"라는 표현은 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는 것이 바른 표현입니다. 

본문에 『 가라사대 』( , 타데레게이)라는 표현은 구약에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유교에서도 가라사대曰가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子曰, 자왈이라고 하면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영어로는 confucius said가 됩니다. 
아무튼 이러한 표현은 당시의 황제들의 포고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의 말씀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Ⅰ.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했습니다. 

본문 2장 2-3절에 『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고 했습니다. 
여기 『 행위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가( )는 에베소 교회의 전체적 삶의 모습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여기 『 수고 』에 대한 원어적 의미는 단순한 육체적 노동이나 육체적 봉사 차원이 아니라 육체적 노동력에 의한 최선의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컨대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롬 16:12),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고전 15:10)라고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 인내 』에 대한 원어적 의미는 어떤 어려움에도 자기의 위치나 자리를 이탈하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확고한 태도를 말합니다. 
야고보서 1장 3절에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진리운동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거짓 사도와 이단들을 공개적으로 정죄한 사실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거짓 사도들을 가려내는 영적 혜안을 가지고 그들로 인해 교회에 임할 타격을 미리 알고 경계한 사실을 칭찬했습니다.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계 2:6)는 사실을 감안할 때 자칭 사도는 니골라당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부인하고 자신들의 확신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고후 11:13, 15; 12:11).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에베소 교회는 황제숭배 강요 때문에 심한 박해를 감수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복음에 확고한 자세를 가지고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 삶에 목적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주께서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 안다 』( , 오이다)라는 의미는 히브리 말에 야다( )라는 말과는 다른 의미로 "야다"가 가시적 앎, 육체적 앎, 외면적 앎이라고 하면 "오이다"는 영적 통찰력의 앎, 내면적 앎을 말합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그분의 앎에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오이다" 하신다. 너의 모든 수고와 인내를 내가 알고 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는 바울의 고백은 주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Ⅱ.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책망했습니다. 

본문 2장 4절에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고 했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처음 사랑은 예레미야 2장 2절에 『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찌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 이른바 교회설립 때의 뜨거운 희생적인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처음처럼 이란 말이 한때 유행어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에베소 교회는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② 형제끼리의 바른 관계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교회 설립 당시 처음 가졌던 사랑과 단절( , 아페카스)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처음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졌던 교리적 탁월성과 신앙전통의 자부심과 역사적 긍지가 모두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하나님께로부터 나에게 주신 처음 사랑의 신적 가치를 알고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변하는 것과 비례해서 우리의 신앙이 따라서 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 우리의 삶의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익숙함으로 변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교회를 향한 사랑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신앙전통의 가치가 평가절하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의 행위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변한 것입니다. 

따라서 ① 처음 사랑은 행동하는 현장감 있는 사랑입니다. ② 처음 사랑은 처음보다 성장한 사랑, ③ 처음 사랑은 사랑의 진보(성숙)를 나타내 보이는 사랑입니다. ④ 처음 사랑은 처음보다 더 나은 사랑입니다. 


Ⅲ.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본문 2장 5절에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고 했습니다.

1)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처음 사랑이 변했는지 깊이 상고하라는 말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에서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결론이 날 때까지가 아니라 계속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2)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빨리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늦추지 말고 즉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뻔뻔스럽게도 회개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벌을 내리는 것이지 영벌은 아닙니다. 징벌을 영벌로 생각해서 징벌을 낙관적으로 보거나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징벌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범죄했을 때는 곧 회개해야 합니다. 죄의 출발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죄의 근원의 뿌리부터 뽑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교회설립의 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처음처럼 이라는 말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도 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개척할 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걸고 다시 시작하기도 합니다. 운동선수가 무엇인가 잘못 되었을 때 기초 자세부터 교정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도 처음에 시작한 기초가 변하면 운동자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4) 만약 그렇지 못할 때는 심판이 임할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2장 5절에 『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고 했습니다.
교회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땅에서 에베소 교회의 존재의의가 없으니 교회를 없애버리겠다는 말입니다. 

그 도시전체가 교회로 인해 부해지고 화려하고 아름답게 될 수도 있지만 교회 때문에 도시전체가 폐허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6절에 『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신령한 귀(영적인 청력)를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을 교훈으로 삼아 칭찬에 고무되지 말고 어디서부터 떨어진 것을 알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은 생명의 주 그리스도를 비유하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기지 못해 영생의 식물을 놓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는 아담과 하와가 놓쳐버린 것을 도로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실패를 극복해 주셨기 때문에 그를 믿음으로 그것이 우리의 기업이 됩니다. 

오늘 이 시대는 타락한 인간의 윤리가 인간의 삶의 척도가 되어가는 시대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타락한 세상이니 타락한 인간의 윤리가 척도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상적인 인간의 윤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윤리입니다. 곧 회개가 주는 윤리입니다. 그러나 무지한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윤리를 쓸데없는 것으로 토해버립니다. 

조선조 제 8대 임금이 된 세조에게는 19살에 시집 온 똑똑한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대의 학자 한학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두 아들을 데리고 사가로 나오게 됩니다. 
마침내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그가 성종이 되고 중전이 되지 못한 채 대비가 되니 그녀가 후에 죽은 자기 남편을 덕종으로 추존시킨 그 유명한 인수대비입니다. 

인수대비는 나중에 연산군의 모후가 되는 폐비 윤씨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는 파평 윤씨문의 왕대비와 대비 사이에 중전 폐위를 놓고 정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이조 27대 왕들 가운데 성군이라고 할 수 있는 왕이 성종입니다. 

성종이 성군의 칭호를 얻는 데는 모후 인수대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인수대비가 자기 아들 성종에게 성군이 되어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군은 조정에 충신이 넘쳐나고 청백리(淸白吏)(의정부, 육조, 경조의 정종正從 이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수직(首職)들이 추천하여 뽑던 청렴한 관리)가 아니면 조정에서 얼굴을 들 수 없어야 주상이 성군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감동적으로 받았습니다. 진정한 교회운동이 무엇입니까. 우리교회, 우리교단, 한국교회가 새로운 교회상으로 거듭나는 길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갈보리교회는 어린아이에서부터 노년에 이르는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얼굴을 들 수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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