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 서머나교회- ..

첨부 1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계 2:8-11)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하나님의 계시 앞에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 이어 서머나교회를 향해 두 번째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서머나(Smyrna)는 몰약(myrrh)이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목격한 지금의 터키 이즈미르(Izmir)에 소재한 서머나는 그때와 변함없는 항구도시였습니다.
서머나가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천혜의 자연경관에 더하여 먼 옛날부터 계획도시로 재건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머나는 로마제국의 건국 초기부터 로마시대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대가로 로마
로부터 절대 보호 가운데 최고의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서머나에 로마의 여신상이 즐비한 것을 감안하면 로마 황제 숭배가 처음으로 시행된 도시라는 사가史家들의 증언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서머나 도시에 몰려와서 상업을 변화시켰고 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그들의 세력들을 키워갔습니다.

서머나교회는 제 3차 선교 여행 중에 있던 바울이 에베소에 3년 가까이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때 이곳을 잠시 방문하여 세워진 교회로 추측합니다.

서머나교회는 물질적으로 풍부한 도시였습니다. 서머나는 기독교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황제숭배 외에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유대주의였습니다.
당시 서머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를 주主라고 부르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을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무리라고 고발했습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고발자(false accuser)라는 뜻입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던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2장 28-29절에 『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고 했습니다.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차라리 사탄의 회였습니다. 사탄의 회라는 말은 자칭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여호와의 총회라고 했습니다(민 14:27, 35).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자식들입니다(요 8:31-47). 주님은 이러한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Ⅰ. 서머나 교회의 실상을 주님이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9절에 『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주님을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묘사했습니다(2:1). 여기서는 주님을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로 묘사했습니다(2:8)

1) 환난을 안다고 했습니다.
여기 『 환난 』은 기독교 신앙으로 인하여 받는 외적 압력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압력을 받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당해 때문에 항상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8절에 『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2) 궁핍을 안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9절에 『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라고 했습니다. 궁핍은 외부적 압박의 결과로 인해 당하는 생활상의 빈곤을 의미합니다.

서머나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의 핍박을 당한 결과 경제적인 궁핍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는 이유 때문에 내몰림과 약탈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4절에 『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고 했습니다.

3) 영적인 부요를 안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9절에 『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고 했습니다.

표면적으로 서머나 시市는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부요한 서머나 도시에서 궁핍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겉으로는 궁핍하나 영적으로는 부요하다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서머나의 영적 부요를 아신다는 말은 영적 부요를 인정하셨다는 말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주님께서 서머나교회에 영적 부요를 허락하셨다는 말입니다.

4) 유대인의 훼방을 안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9절에 『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고 했습니다. 

사단의 회는 누구인가? 이들은 자칭 유대인이지만 실제로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불신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따라 모인 자들이었기 때문에 사단의 회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서머나교회의 일원이 아니라 서머나의 유대인 회당 소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 22절에 『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고 했습니다.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이 순교할 때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이방의 폭도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혈통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아래 백성이 진정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사단의 회라고 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
서머나교회의 이러한 사실을 주님이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앎은 육체적 앎에 국한되지 않는 전체적 앎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나의 속을 아시고 겉을 아시고 나의 양심을 아시고 나의 생각을 아시고 나의 진행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나를 알고 계신다는 대전제가 우리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의의요, 목적이요, 그리스도인의 활력이요,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로부터 지음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6절에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라고 했습니다.


Ⅱ.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주님이 죽도록 충성하 라고 했습니다.

본문 2장 10절에 『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고 했습니다.

남은 10일간의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환난은 마귀가 시험하는 유혹을 말합니다. 유혹은 "매력", "속이는 것"입니다. 매력 있는 먹잇감이 되지 아니하면 고기가 낚시 바늘을 물지 않듯이 유혹은 사망의 미끼를 가지고 속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10일 이라는 말은 서머나 교회가 환난을 당하는 기간을 말하는 데 짧은 기간 동안이라는 말입니다. 시험과 환난 당하는 부류가 교회 지도자급이라는 말입니다. 
『 죽도록 충성하라 』에서 "죽도록"이라는 말은 죽음에 이르는 데까지라는 말입니다. 개혁주의 삶 중에 신행일치의 삶 곧, 순교적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러한 신앙 전통을 소통 수단으로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신앙은 배신하거나 변절하지 아니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서머나교회는 "폴리갑"이라고 하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86세에 순교를 당하면서 지금까지 주님이 나를 배신한 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배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욥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도 두 아들을 잃는 죽음에 이르는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죽도록 충성하는 신앙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주셨기 때문에 주께로부터 받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1)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10절에 『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면류관은 썩지 않는 면류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 했습니다.

자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에 『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라고 했습니다.

의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고 했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4절에 『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면류관은 서머나가 헬라식 경기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에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월계관을 연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서머나 도시의 상징이 면류관이었기 때문에 면류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고상한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2)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11절에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첫째 사망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둘째 사망은 영과 육이 같이 지옥에 던져지는 죽음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4절에 『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20절에 『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도록 충성하게 하신 이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는 이미 상을 받은 것입니다. 비젼(vision; 시력, 상상력, 통찰력, 꿈 미래도, 상상도, 환상, 아름다움 등…)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젼이 진리 밖에 있는 자신의 야망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비젼이라야 합니다. 신앙은 신앙이어야지 돈이나 명예나 자신의 야망이 신앙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핍박당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죄 중에 빠진 일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나 사탄은 교회의 지도자를 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행일치는 곧 순교신앙입니다. 

우리의 육은 죽을지언정 영혼이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이 사는 것입니다. 육은 부족함이 없는데 영혼이 죽으면 그것은 모든 것이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부활신앙은 둘째사망에 대한 확고한 지식으로 충만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주님의 몸된 교회 앞에 바른 관계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강구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